처음 아이를 보고 든 생각은 ‘정말 사람이 나왔네’였다. 아이가 태어나는 장면을 처음 봤기 때문에 그렇게 아이가 쑥 하고 나올 줄 몰랐다. 순간 동공이 눈 전체를 뒤덮을 정도로 커진 듯 했다. 그리곤 ‘왜 숨을 안 쉬지...’라는 두려움이 몰려왔다.
그러나 분만실 간호사, 의사는 미동도 없었다. 수간호사는 나에게 가위를 쥐어줬다. 탯줄을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잘랐다. 한 번에 자르지 못해 두 번 가위질을 해야했다. 수간호사는 “탯줄도 굵네”라며 농을 쳤다.
그 순간 아이가 울었다. 분만실 넘어 대기실까지 들린 큰 울음소리였다.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이는 잘못되지 않았다. 탯줄을 끊어야만 아이는 코로 숨을 쉬고 울음을 터뜨린다고 한다.
사실 아내는 몸이 약해서 분만 도중 위험한 순간을 여러 번 맞이했다. 통증 때문에 거의 실신하는 단계에 이르렀고, 고통 때문에 몸을 내내 뒤틀었다. 수간호사가 아내에게 “그렇게 뒤틀면 아이가 위험해요”라고 소리치기까지 했다. 문 밖에 서 있던 나는 오금이 저렸다. 손바닥에 흥건히 차오른 땀을 바지에 연신 닦았다.
그 때 수간호사가 “남편분 빨리 들어오세요”라고 다급히 불렀다. 분만실 광경을 잊을 수 없다. 간호사 한 명이 아내의 왼쪽 다리를, 다른 한 명이 오른쪽 다리를 붙잡았고 그 사이에 의사가 앉아 있었다. 수간호사는 나에게 아내의 등을 다리 쪽으로 들어 올리라고 했다. 그리곤 본인은 팔뚝으로 아내의 배를 밀어 아이를 밑으로 내렸다.
아이의 머리가 한 차례 골반에 꼈다. 그 다음 어깨가 꼈다. 의사는 진공청소기처럼 생긴 깔때기를 아이의 머리에 부착해 빨아냈다. 그렇게 아이가 태어났다.
아이는 건강했다. 간호사는 나에게 아이의 신체를 하나씩 확인시켜줬다. 눈 두 개, 코 하나, 입 두 개, 손가락 열 개, 발가락 열 개... 멀쩡해서 고마웠다. 어울리지 않게 눈물도 나왔다. 아이는 요람에 누워 겁먹은 얼굴로 오열했다. 아이에게 “은총아, 아빠야”라고 말했다. 아이의 울음이 그쳤다. 태교로 매일 아이에게 목소리를 들려준 게 효과가 있었다. 아내의 배 위로 아이를 옮겼다. 엄마에게 찰싹 안겼다. 아내는 “은총아”라고 말하곤 울었다. 이 순간을 잘 견뎌준 아내와 아이에게 감사했다. 또한 세상에 태어나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기쁨이 무엇인지 알게 해준 우리 어머니께도 감사했다. 나를 낳을 때도 이렇게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한편으론 남자라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산후조리원에서 2주를 보내고 집으로 왔다. 아이는 장모님이 키워주시기로 했다. 아내가 분만 때 겪은 극심한 통증으로 회복이 더뎠고 나는 회사에 출근해야 했기 때문이다. 둘 다 초보 부모라는 점도 크게 작용했다. 두부보다 더 약해 자칫 잘못하면 깨질 것처럼 보였던 우리 아이를 그래도 장모님이 정성껏 돌봐주신다면 안심할 수 있었다. 장모님이 아직 젊은 50대라는 점, 끔찍하게 자신의 딸을 아끼고 사랑한다는 점, 그 딸이 낳은 손자를 그에 못지않게 아껴주실 것이라는 믿음도 작용했다.
그 때부터 장모님은 우리 집에 상주하며 손자 돌보기를 시작했다. 손자 방에서 잠을 자고 손자를 먹이고 씻기고 재우고 갈아입히는 일을 매일 반복했다. 젖병 소독, 기저귀 갈기, 토한 옷 갈아입히기, 얼굴에 난 태열 때문에 맘 고생하기, 2시간 마다 깨서 밥 달라고 우는 아이 달래기, 똥 안 싸서 걱정하기, 똥 색깔이 달라져서 걱정하기, 똥이 너무 되거나 묽어서 걱정하기, 똥을 너무 자주 싸서 걱정하기, 아이가 아플까봐 전전긍긍하기, 사위 눈치 보기, 딸 눈치 보기, 집 걱정하기, 처제 걱정하기, 장인어른 걱정하기, 남들이 하는 말 신경 쓰기, 사돈 식구 치르기, 외출 못하기, 어깨 뭉치기, 눈 밑 다크 써클 생기기, 허리 통증, 불면증, 우울증, 피로감, 짜증, 화, 푸석푸석함, 몸 붓기, 당분 과다 섭취 등등. 장모님이 겪은 고생은 일일이 열거할 길이 없다. 그 모습을 보고 ‘아이는 한 명만 낳아 키우자’라고 다짐했다. 그 분이 안 계셨다면 우리 아이를 이렇게 정상적으로 키워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문제는 처가가 부산이고 우리는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는 맞벌이 부부라는 점이었다. 100일 때까지 우리 집에 계신 장모님은 결국 아내가 복직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부산으로 아이를 데려가기로 했다. 그게 우리 마음에도 편했다. 집에 있어봐야 아이와 보낼 시간도 얼마 없었고, 전적으로 장모님을 신뢰했기 때문이다. 그 능숙하고 유연한 솜씨와 즐겁고 긍정적인 자세로 육아에 임하는 태도, 아이와 노는 순간을 감사해하며 전력으로 놀아주는 투지 등이 충분히 나와 아내를 감동시켰다.
아이를 KTX에 태워 보내고 아내는 울었다. 나는 그를 달랬다. 그날 오후 ‘퇴근 후에 집에 가도 아이를 볼 수 없다’는 상실감에 부산에 내려가신 장모님께 안부 전화를 했다. 전화기 너머로 울먹이는 내 목소리를 장모님도 눈치 채셨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 아이는 부산에서 잘 지내는 줄로만 알았다. 처제가 올라오기 전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