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한국인 대학원생이라고 다 잘하는 건 아닙니다
"너는... 우리랑 달라."
정말 더웠던 매홍손 맥주집 어딘가, 열심히 맥주를 주유하고 있던 제게 연구실 프로젝트를 위해 태국을 방문하신 지도교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잉, 어떤 점이요?" 벙 쪄서 교수님께 다시 되물었습니다. 사실 샨주에서의 제 연구성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기 때문에 좀 뜬금없는 말씀이었거든요.
"현장에서 네가 사람들과 어떻게 소통을 하고, 어떻게 행동하는지 계속 지켜보고 있었단 말이지. 여기서 너는 '외국인'이 아니야. 그들 앞에서 외국인처럼 행동하지 않는 너도 너지만, 여기 사람들도 너를 외국인처럼 대하지 않잖아. 나 같이 직설적으로 내뱉는 백인 아저씨는 절대로 좁힐 수 없는 그 거리감이 있는데, 너는 그런 거리감이 없어."
맥주가 얼큰하게 들어갔었던 제겐 조금 슬프게 들렸습니다. 프랑스계 캐나다인인 제 지도교수님은 대학원 시절 인도네시아어를 완벽하게 마스터하고 독재가 시퍼렇던 그때 그 시절의 인도네시아 농촌에서 현장연구를 하셨었습니다. 그분은 '나는 인도네시아에 가면 자바인이 된다'는, 지금도 인도네시아어로 강의를 하실 수 있을 정도의 분입니다. 저는 도저히 범접할 수 없는 경지에 오르신 분이죠.
그런 제 지도교수님은 어쩌면 태국어를 거의 못 알아듣는 저를 보며 "와 씨, 태국 사람/샨족/까친족인줄"하며 화들짝 놀라는 이곳 사람들, 그리고 안 되는 태국어로 "아이고 쿤 까올리(한인)입니다"라 하며 너스레를 떨며 현지에 어느 정도 동화된 저를 지켜보며 많은 생각을 하셨던 것 같습니다.
"옛날 제국주의 시대인 마냥 백인이 아시아 연구를 하는 시대는 이제 끝났어. 한국을 연구하는 한국인, 아니면 미국, 유럽으로 가 '서양 정치'를 연구하는 게 아니라, 동남아를 연구하는 한국인은 그 모습 그대로 학계에 큰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 만두박사 네가 조금 더 자신감을 가지고 너 자신을 어필할 수 있다면, 아주 좋은 강점이 될 거야"
하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피부색 덕에 누리는 이점을 넘어 다른 노력이 지도교수님께 잘 보이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아무리 태국에 있는 동양인이더라도 현지 문화와 식습관에 절여지지 않으면 그저 놀러 온 외국인처럼 보일 겁니다. 만약 제가 무례하거나 현지 관습에 충돌하는 못난이 짓을 반복했다면 그저 (매우 못난) 한국인으로만 보였을 겁니다.
저는 각양각색의 민족들이 모여사는 태국 국경지대 산속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관습과 문화를 궁금해했고, 또 그들이 불편하지 않게끔 조심스레 물어보고 따라 하려 노력했습니다. 그들이 사는 세계의 손님으로서 그들의 생활 관습을 따라 하려고 최대한 노력하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즘엔 태국 근접지역에서 널리 사용하는 인사법인 '와이'는 언제, 어떻게 해야 하는지의 그 오묘한 기술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로이따이렝에서 "길에서 만나는 사람 모두에게 와이를 안 해도 된다"는 소리를 들어서요(...)
그리고 저는 저와 인연이 닿은 모든 사람들을 그들의 역할, 또는 저의 필요에 의해 부여된 '연구 참가자'를 넘어서 하나의 사람으로 존중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제가 만나는 사람들이 제게 공유해주는 경험과 생각은 그들이 어떤 사람으로 살아왔는지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는 생각을 항상 하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저는 제가 만나야 하는 반군단체 아저씨들 뿐만 아니라, 제가 만나는 많은 사람들의 인생이 무척 궁금했습니다. 예를 들어, 그들의 가족은 어디에 있고 어떤 일을 하며 지내는지, 그리고 그들이 어떤 일상을 살아왔는지 항상 물어봤습니다. 기술적으로도 처음 만난 사람들의 서먹함을 무너뜨리기 위해 탁월한 아이스 브레이커이기도 했지만, 그냥 그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무척 궁금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사람을 공부하기 위해 그 사람을 이해하려 하는 건 최소한의 예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제가 미얀마 양곤에 있을 적, 언젠가 같이 식사를 하던 중국계 미얀마인 친구가 웃으며 "너는 꼭 무슨 버마족 아저씨처럼 밥을 먹는다"고 얘기한 적이 있었습니다. 아마 쭈그려 앉아 숟가락을 바삐 놀리며 이름도 모르는 각종 채소를 손으로 집어 장에 푹푹 찍어먹는, 지극히 버마인스러웠던 저를 놀리려고 한 말일 테죠. 그 친구는 아주 우아하게 숟가락과 포크를 사용해서 식사를 하고 있었거든요 (...) 하지만 지금 와서는 최고의 칭찬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최대한 현지에 동화되려는 이런 노력들이 연구에 큰 도움이 되었을까요?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국경지대에서 만나는 모든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데는 큰 도움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그런 노력이 지도교수님에게는 스스럼없이 현지 문화에 푸욱 적셔진 연구자의 모습으로 다가온 게 아닐까요?
또, 사실 연구 중립성을 위해서는 삼가야 할 말이지만, 만나는 반군 단체 장교들과 병사들에게 종종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우리 한국인도 한때 식민지배를 당했고 자유를 위해 투쟁했기 때문에, 나뿐만 아니라 모든 한국인들은 당신들의 투쟁에 깊은 존중심과 애정을 가지고 있다"고. 그 말이 사실이니까요.
지금 쿠데타 정국에 놓인 미얀마인들이 "우리가 지면 북한이 되고, 우리가 이기면 한국이 된다"고 말했던 것처럼, 그들에게 한국, 그리고 한국인은 아주 특별한 의미를 가집니다. 한국 드라마의 큰 팬이라는 선생님부터, 김정은의 나라에서 왔냐, 손흥민의 나라에서 왔냐 장난스레 묻는 스님이 계셨습니다. "그때 한국처럼 우리도 대학생들이 나서 독재에 저항했다" 고 말하는 8888 세대의 소수민족 반군 지도자도 있었고, 그들과 동일한 독립투쟁의 역사를 공유한 한국인에게 큰 역사적 동질감을 느끼는 장교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너무나도 감사하게도 한인인 저에게 다른 사람들보다 더 큰 믿음과 신뢰를 보내줬습니다. 샨주 남부군에서는 짜이 쌈이라 불리며 명예 샨족이 되었고, 매홍손 근교 까레니 민족 진보당 (KNPP) 본부에서는 직원이 버선발로 뛰어나와 "언제 오는가 싶더만!" 하며, 그리고 이미 안면을 텄던 빠오 민족 해방기구 (PNLO)에서는 다시 찾아온 연구자를 아무 말도 필요 없다는 듯 큰 미소와 악수, 그리고 제가 들고 갔던 비스킷 상자 전달 기념촬영(...)으로 맞이했습니다.
아마 모두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빈손으로 오기 민망했다며 과자 꾸러미를 들고 어설프게 서 있는 이 한인은 우리를 온전히 이해할 거라는 생각을 하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그들 생각대로 저는 그들이 표현하는 심정을 전부는 아니겠지만, 어느 정도 깊이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과거였으니까요. 우리가 지금 공기처럼 누리는 그 모든 것을 그들이 목숨처럼 갈구하는 것이니까요.
저는 그런 믿음을 보내주는 그들이 있기 때문에 제가 사랑하는 미얀마에 더욱 큰 부채를 느낍니다. 제 연구활동이 투쟁에 인생을 바친 그들에게 누가 되지 않도록. 그리고 오늘도 자유를 위해 정글에서 이슬비를 맞는 청춘들에게 더욱 완전한 평화를 가져다주는데 아주 조그만 기여라도 할 수 있도록.
제게 연구자의 삶을 살며 작게나마 맡은 일이 있다면, 이게 제 일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