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수들이 넘쳐나는 학계에서 치킨각 띄우기 위한 첫걸음
("만두박사 학술대회를 가다"에서 이어집니다)
학술지(academic journal)는 학계의 최근 연구결과를 주기적으로 실어 소개하는 잡지랍니다. 짧게는 6-8만 단어, 길게는 그의 수배에 달하는 책을 출간하기까진 큰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연구과제의 중간결과를 소개하기 위해, 또는 바로 책으로 쓰긴 좀 부족하지만 또 그냥 자기만족으로 남기엔 아까운(...) 애매한 사이드 프로젝트 석사논문 를 다듬어 출간하기도 합니다. 연구결과를 간결하게 전달하는 게 그 목적이기 때문에 보통 8000~12000자 내외로 이루어진답니다.
따라, 학술지는 연구를 업으로 하는 사람들의 주된 경쟁의 장이기도 합니다. 학술지 논문 기재 수, 그리고 등재한 학술지의 퀄리티는 취업은 물론, 정년심사의 향방을 결정하는 객관적인 지표로 활용되기 때문이죠. 따라 학계에선 "Publish or Perish (출간하거나 사라지거나)" 라는 좀 섬뜩한 말이 오가기도 합니다. 정기적으로 출간하지 않으면 학계에 소속된 연구자로서의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죠.
보통 박사후보들의 경우 졸업 전 최소 1개의 단독 (solo-authored) 학술지 등재를 목표로 한다 캅니다. 그게 업계 최소 커트라인이라는 소문과 함께요. 그 소문의 진위는 제가 아직 취업 사이클을 돌지 않아서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도 많은 박사생들은 저널, 저널, 되뇌며 학술지 등재를 위해 필사적인 몸부림을 치고 있답니다. 보통 박사생의 경우 (해외대학의 경우 몹시 편리하게도 8000-12000자의 단어제한이 있는) 석사논문, 박사과정을 거치며 생산되는 연구지, 또는 박사논문의 몇 부분을 뜯어 다듬어 학술지에 투고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 경우 제 석사논문은 지금도 아예 보기도 싫을 정도의 똥이었고(...) 박사논문은 연구과정이 너무 늦고 길어진 관계로 박사과정 중 제출한 과제를 학술지에 먼저 투고하게 되었습니다.
학술지 초안이 마무리되었으면 어디에 넣어야 할까요? 저와 같이 처음으로 학술지에 투고하는 학생들의 경우 여기서부터 막막함을 느낄 가능성이 높을 것 같습니다. 제 친구들 몇몇은 이미 머릿속에 학술지 랭킹과 투고할 논문과 학술지 간 핏을 다 머릿속에 넣고 다니는데... 솔직히 그런 친구들은 극히 소수일 것 같습니다.
정치학의 경우 모든 분야를 섭렵해 소개하는 "종합 학술지 (General journal)"와 지역학, 선거•여성학•내전• 등등과 같은 개별 연구분야에 집중하는 "전문 학술지 (Specialised journal)"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세간에 장려되는 통념상 논문이 학계의 어느 분야에 기여할 수 있을까를 잘 따져 종합 학술지, 또는 전문 학술지에 넣는 게 좋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미얀마에 온전히 집중하는 논문은 동남아 지역학을 주로 파는 전문 학술지에 보내야겠고, 한 지역에 집중하지 않고 좀 더 큰 이론적인 기여를 하고자 하는 논문은 종합 학술지에 더 어울리겠죠. 그렇겠는데...
뭐든지 랭킹을 매겨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 습성상 그게 잘 안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논문들은 정치학의 플래그쉽 학술지로 여겨지는 탑급 학술지에 먼저 투고되고, 기재 거절 (이른바 "리젝")을 받으면 점점 낮은 랭킹의 저널로 내려가는 수순을 거치게 됩니다.
이 랭킹이란 것이 몹시 주관적이긴 하지만, 북미 정치학계에서는 대체적으로 종합 학술지들인 American Political Science Review (APSR), International Organization (IO), World Politics 등을 '성배'라 부르며 정치학계의 최상위 학술지라 평가하는 편입니다. 상술된 학술지들은 투고된 모든 논문 중 5% 남짓만 기재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아마 다른 고티어 학술지들도 비슷할 겁니다.
하지만 박사생들도 졸업 전 봐줄 만한 스펙을 꾸려야 살아남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탑급 학술지에 목숨을 거는 건 큰 리스크가 따릅니다. 학술지 출간 과정은 난이도가 높은 과정이기도 하거니와, 대부분 수차례의 동료평가와 수정을 거쳐야 하는 몹시 긴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이죠. 그리고 왠지 모르게 학술지의 랭킹과 투고부터 출간까지의 소요 시간은 정비례하는 편이기 때문에 탑급 학술지들은 더더욱 긴 기다림을 강요한답니다.
이 브런치 글의 주제가 된 논문은 첫 번째로 투고한 학술지에선 수개월에 걸린 동료평가 후 기재를 거절당했고, 두 번째 학술지에선 1여 년이 걸린 동료평가 끝에 개제 되었습니다. 첫 번째 투고와 두 번째 투고 사이 제 스스로의 게으름을 제외하고도 2년에 가까운 시간이 걸린 셈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투고부터 출간까지 과정이 몹시 짧다는 점을 어필하는 학술지 에디터들도 있고, 연구성적에 치이는 연구자들이 약탈적 학술지의 꾀임에 넘어가는 경우도 생각보다 흔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오래 기다린 후 받아 든 결과가 '리젝'이라면 슬퍼지는 건 물론, 다시 또 다른 학술지를 찾아 투고하고, 또 기다려야 합니다. 짧게는 수개월이 걸리고 길면 정말 수년이 걸리는 과정이기 때문에 첫 빠따를 아주 기술 있게 잘 쳐야 합니다. 물론 등판하기 전에 감독 코치진과 잘 상의해서 방망이를 휘둘러야겠지만, 사실 개인의 판단과 배짱, 그리고 학회 발표 후 홈런각인지 파울각인지 청중 반응을 가만히 잘 살피는 눈치(...)가 크게 작용합니다.
느낌상 학회발표 후 가지는 질의응답 시간에서 내 논문이 얼마나 많은 질문을 받는지가 안타각인지, 파울각인지 살피는데 아주 중요한 지표인 거 같습니다. 보통 질문과 질문을 가장한 공격(...)은 논문 주제의 퀄리티와 정비례하는 편으로 보이거든요.
어쩌면 출간 난이도와 소요기간을 고려했을 때 사실 학술지의 랭킹을 곧이곧대로 따지는 것보다 주변 인식을 종합해 투고할 학술지를 정하는 건 어떨까, 생각합니다. 사실 우리가 누구라고 학술지에 랭킹을 매기고 그 수준을 논하겠습니까. 어느 학술지던 그곳에 기재된 논문들은 동료 연구자들이 피, 땀, 눈물을 흘려가며 깎아낸 연구결과들인걸요. 고로, 랭킹보단 주변 누군가가 그 학술지 이름을 들어봤다면, 또는 강의계획서에 한두 번쯤 이름을 본 학술지라면 어디던 랭킹을 떠나 정말, 정말 좋은 학술지입니다.
사실 우리 마음속에 자리한 I 성향을 이겨내고 지도교수님께 여쭤보는 게 제일 좋습니다. 지도교수님께 투고할 논문에 대한 검토를 부탁드리면 산더미 같은 코멘트와 함께 대충 "어디쯤 넣으면 좋겠다" 하시며 논문의 싸이즈를 알려주시기도 합니다.
논문의 오탈자를 모두 바로잡고 마음의 준비가 되었다면 마음에 드는 학술지에 논문을 투고합니다. 투고된 논문은 먼저 학술지의 에디터가 진행하는 '데스크 리뷰'를 거치게 됩니다. 대충 투고된 논문이 학술지가 추구하는 방향과 적합한지, 과연 우리 학술지에 기재될만한 싸이즈가 되는지를 보는 과정입니다.
상당수의 논문에 이 과정에서 컷 됩니다. APSR의 경우 50% 조금 안 되는 논문을 데스크 리뷰에서 걸러냅니다. 보통 학술지의 방향성과 맞지 않는 논문이기 때문에 (예를 들어, 미국정치 전문 학술지에 서유럽을 주된 사례로 삼는 논문을 투고한다던지) 컷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종종 투고한 논문의 퀄리티가 학술지 기준에 맞지 않는다는 점으로 컷되기도 합니다.
만약 데스크 리뷰를 성공적으로 통과한다면 동료 연구자들이 논문을 심사하는 동료평가 (Peer-review)를 거치게 됩니다. 학계는 다수의 노력으로 지식을 쌓아 올리는 집단입니다. 따라, 모든 연구결과는 다른 연구자들이 연구과정과 결과의 신뢰성을 검증한 후 공식적으로 발표된답니다. 학술지는 물론, 지도교수진과 더불어 학교 내외의 검증인이 붙는 박사논문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학술지들의 경우 심사부정을 최대한 차단하기 위해 "Double blind" 동료평가, 즉 동료평가인 (이른바 '리뷰어')과 저자가 서로를 모르도록 하는 심사를 거칩니다. 몇몇 학술지의 경우 동료평가인, 저자, 그리고 에디터 모두가 서로가 누군지 모르는 "Triple blind" 동료평가 방법도 존재합니다만, 흔하진 않습니다.
거의 모든 정치학 학술지의 행정 스태프들은 무보수 명예직입니다. 어디는 돈을 주면서 리뷰어와 에디터를 굴린다고 합니다만, 솔직히 흔하진 않습니다. 즉, 돈 안 받고 하는 사람들의 스케줄에 따라 동료평가 기간이 개월단위에서 연 단위(...)로 늘어날 수 있답니다.
그렇기 때문에 출간이 목표라면 어느 학술지던 빨리 넣는 게 중요합니다. 곧 졸업하고 취업시장에 뛰어들 박사후보라면 더더욱. 이제 학술지에 갓 한편 기재한 허접 연구자지만, 제 느낌상 2019년에 다듬은 논문 초안과 2024년 초에 출간된 최종본을 비교하면 솔직히 큰 변화가 있진 않았던 거 같습니다. 동료평가는 그 결과 불문하고 저자에게 정말 정성스러운 개선점을 보내주기 때문에 어디던 빨리 넣고, 논문을 수정하며 넣고, 또 넣는 게 중요한 것 같습니다.
수개월의 동료평가를 마친 학술지는 에디터의 최종결정에 따라 그 엔딩분기가 갈립니다. 절대 대다수의 학술지들은 빠꾸, 즉 '리젝'을 받게 됩니다. (위 엔딩분기 1 참조) 보통 리뷰어의 평 중 하나가 부정적이거나, 학술지를 뼈대부터 뜯어고치는 수준의 수정이 필요하거나, 리뷰어들이 에디터의 동료평가 결정에도 불구 투고한 논문이 학술지의 '끕,' 또는 분야에 맞지 않는다는 판단을 할 경우 리젝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빠꾸를 먹은 논문 원고는 상심한 박사생이 서랍장에 구겨 넣어 사라지곤 합니다. 대학원생들을 괴롭하는 지독한 자기부정의 결과라 하겠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기부정이 참 나쁜 것이고, 다시금 용기내어 나아가야 함을 잘 알고 있습니다. 고로, 리뷰어들의 제안대로 수정해 차상위 학술지에 다시 투고하는게 좋습니다. 학술지 투고 결과의 보통값은 리젝이기 때문에 이 과정을 수 번 거치게 된답니다.
정말 좋은 리뷰어는 기재 거절 의견을 내더라도 어떤 학술지에 내는 게 제일 알맞을지 추천을 하기도 합니다. 물론 가끔 터무니없이 낮은 급의 학술지를 제안하기도 하는데(...) 잘 걸러서 들으면 내 논문의 주장이 어느 정도 퀄리티인지 가늠하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가령, 위 APSR 리젝 리뷰어 1인은 종합 학술지 대신 Journal of Peace Research, Security Studies 등의 전문 학술지에 투고를 권했습니다.
만약 동료평가의 결과가 나쁘지 않다면 수정 후 재투고 (Revise and resubmit), 이른바 R&R 요청을 받게 됩니다. 그 정도의 따라 대폭 수정 (major revision) 소폭 수정 (minor revision), 혹은 정말 세기의 걸작급인 논문일 경우 수정 없이 투고 (accept without revision) 요청으로 갈립니다. 물론 이론상 그렇다는 거지, 대폭수정 외 다른 결과는 유니콘 급으로 희귀한 결과랍니다. 리뷰어들의 요청에 따라 수정을 해서 (또는 리뷰어들의 요청이 왜 말이 안 되는지 소상히 밝히는 키배 편지를 보내며) 다시 투고하면 또다시 동료평가를 거칩니다. 보통 이 단계의 동료평가는 비교적 빠른 편이고, 학술지에 기재될 가능성도 대폭(!) 높아집니다. 제 친구들 대다수는 수정 후 재투고는 사실상 기재결정과 마찬가지인 결과로 여긴답니다.
수정 후 재투고한 논문이 리뷰어들이 보시기에 몹시 흡족한 결과물이라면 기재를 결정하는 이메일이 오게 됩니다. (물론 수정 후에도 영 논문이 미흡하다면 여기서 추가수정을 요청하기도 하고, 그래도 영 미흡하다면 리젝을 받기도 합니다) 이때부터는 슬슬 친구들에게 자랑해도 좋을지 고민하게 되는 시간입니다. 학술지 스타일에 맞게 논문 포맷을 수정한 후, 숨을 참고 기다리면 학술지에 실제로 올라갈 논문의 Proof를 받게 됩니다. 검토해 그 모양새가 몹시 마음에 든다면 며칠 내로 논문이 웹사이트에 먼저 올라가게 됩니다. 이제 진짜 자랑해도 좋은 타이밍입니다. 축하합니다.
이 글은 저와 비슷하게 학술지 투고를 놓고 주저하는 분들, 그리고 학술지 투고에 앞서 뭔가를 읽으며 정보를 얻고 싶은 분들을 위해 준비했습니다. 이제 학생이 아니라, 지도교수와 슬슬 맞먹으려 하는(...) 학계 동료로서 첫걸음을 떼는 모든 분들께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또, 제 브런치를 찾아주시는 모든 분들께 깊은 감사드립니다. 출간된 학술지의 Author Manuscript는 이곳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