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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영 Dec 30. 2023

고도를 기다리며




‘오래 지속되는 것은 진실’이라고 까뮈가 사막이란 글에서 썼다.  

그가 죽은 나이가 41이니 이글은 그 한참 전에 쓴 글일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젊은,  아직 어린 그가 이런 글을 이런 내용을 알 수 있었을까,

천재들에겐 날카로운, 검 같은 시선이 선천적으로 부여되는 것일까, 

나는 여전히 지금도 오래된 대문이나 오래된 나무 앞에서 서성거리지만

그것이 진실이라는 한 부분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고 연결하지 못했다.



국립극장에 <고도를 기다리며>를 갔다. 

생각해보면 음악도 미술도 좋지만  

그래도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물을 때 엄마, 라고 눈치 안 보며 대답할 때처럼 

나는 연극~ 할 것이다.  

연극의 역사도 실로 오래되었다. 

기원전 5세기이니 연극의 역사는 얼마나 오래된 것인가. 

아주 오래된 습속의 산물인 연극.   

오래 지속 되어 왔으며 앞으로도 계속 지속해 나갈 것, 

그것도 아주 오래 산 사람들이 한다면?

진실은 더욱 중첩되며 레이어드로 화 할 것이다.


      

인터미션 후 이부가 시작되고 어느 순간 살짝 졸았다.

아, 나보다 훨씬 나이 많으신 

(87세 신구, 83세 박근형, 81세 박정자)

무대 위에서 애써 삶이란? 해답을 구하고 있는데

그 아랫 자리, 무대 하고 가깝기도 한 자리에서 졸다니,, 데끼!   

잠간 졸아선지 두 시간 삼십분이 훌쩍 지나갔다.     

조용한 연극이니 조용하라는 말을 가까이서 말하고 다니더니 결국 마지막에는 마이크로 또 한다.

내겐 상당히 위협적으로 들렸다.  

뽀시락 거리는 소리도 내지 말고, 기침도 절대 하지 말아야 한다. 

감기 들어서는 연극 보러 가지 말기,

미리 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오른쪽도 왼쪽도 나처럼 혼자 연극을 보러 온 젊은 여자들이다.

아 근데 왼쪽 여자가 세 번쯤 내 자리를 흘깃 거리며 바라본다. 

그러더니 결국 말한다. 

내 벗은 겉옷이 자기를 만진다고,

 흠,

너는 그렇게 성깔이 못돼서 네 주변에 사람이 없겠구나. 

그 정도도 이해를 못 하니? 옷자락이 늘어져서 네게 살짝 스치는 것, 

내 손도 아니고 몸도 아니고 그저 옷자락인데 그게 그리 거슬리니?

옷을 여무지게 싸 안으면서 그런 생각을 마구 했는데

입장을 바꿔서 생각하니 거슬릴 수 있겠네.


기침이나 큰 숨을 쉬거나 자신도 모르게 나타나는 몸의 언어가 발현되는 늙음.

좀 더 나이 들어 제어가 안될 때는 연극도 못보겠다.        

그리고 겨울에 연극 보러 올 때는 커다란 비닐을 접어서 가지고 가야겠네

 그래서 거기다 담아 발아래 놓고 보는거야. 

소리도 안나고 옆 사람을 스치지도 않겠지.  


    

 무대는 아주 간소하다.

 나무 한 그루와 약간 삐뚤어진 담? 벽? 그리고 의자로 쓸만한 돌팍 하나 

그 위로 둬번 나타나던 푸르고 환한 달.     

박근형 선생은 생각보다 키가 크지는 않으셨다. 

티비에서 보던 그대로 목소리와 모습이 그랬고

신구 선생은 그가 입은 너덜거리는 옷만큼 낡고 쇠약해 보였다. 

그런데  어떻게 저리 나이드신 분들이 그 한도 없는 

그것도 거기서 거기인 대화를 다 외우시는 걸까?

 까뮈만 신기한 게 아니고 나는 저분들도 신기해~       

서로를 고고와 디디라는 애칭으로 부르는 두 사람.

그들에게 있는 거라고는 ‘시간’과 ‘기다림’과 ‘서로’ 뿐이다. 

서로 함게 있기에 견뎌낼수 있는 시간,  

그들의 대화는 맥락이 없다. 

그래서 터져 나오는 실소 같은 미소, 

그런 웃음들이 오히려 그들을 더 외롭게 한다. 



그런 그들에게 몹시도 개성적인 포조와 럭키가 나타난다.   

포조는 소리 치고 럭키는 목을 매단 채 살아가지만

그들 역시 고고와 디디처럼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일지 모른다. 


그리고 아주 앳된 어린이

고도와 사람들 사이를 이어주는 유일한 메신저.

오늘은 안오고 내일.

그 희망처럼 그 아이는, 우리들의  아이들은 우리에게 희망인가, 

그러나 그 희망 역시 오늘은 오지 않는다는 비극을 품고 있다.

어쩌면  사뮈엘 베키트는 고도를 기다리며를 희극이나 비극으로 단정 짓는 것도 못마땅할지 모른다.

고도는 신도 아니고 철학도 사상도 아니라고 했으니까, 

고도의 시간은 시간의 개념도 모호해지고야 만다. 

하룻만에? 아니 누구에게는 하루가 누구에게는 천 날이듯이 

다시 만나게 된 포조와 럭키는 

눈이 멀고 귀가 들리지 않게 되어 있다.

시간은 확장되고 그들의 기다림은 색깔을 띄게 된다.

함께, 

관계 속에서 이루어져 가는 삶의 한 모습인것만큼은 확실하다. 


세 노배우의 응측된 연기는 단순히  연기가 아니다.

 그들의 생애가 배인 호흡같은 것,  

그들의 연기는 물흐르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

 너무도 자연스러우면서 

 그 자연스러움이 또 매우 연극적이어서

그들이 기다리는 고도를 더욱 궁금하게 하며 신비롭게 만든다.     

  

연출가의 섬세한 시선은 고고가 벗은 낡고 헌 신발을 빈 무대에서 비친다. 

누구나 다 고흐의 그림으로 연상하며 거기 구두에서 

그 구두를 신은 이의 삶을 엿보게 한다. 


마지막 엔딩 장면도 무대 뒤로 사라지거나 커튼이 내려지는 것이 아니라

고고와 디디가 가자며 손을잡으나 가지 않고 거기 그대로 정지된다.      

그 한 장면만으로도 길다란 글을 써낼수 있을 만한 장면이었다.

정지는 새로운 시작이자 희망이며 기다릴 수  힘을 축적할 수 있는 시간이다.    


여운이나 아우라가 풍성한 연극

보고난 후  기억속에서 더욱 아름답고 처연해진다.

아, 연극이라서 얼마나 다행인가.

그런데 혹시

그 연극에서 벗어난 고도가 

내 삶으로 들어온 건 아닌가.

안 이전부터 내 안에 있었지만 잠든 그를 연극이 깨운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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