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련이 만개했다.
사위를 밝히는 하얀 등롱은 마치 보이지 않는 곳을 소쇄시켜주는 듯 하다.
봄 햇살은 산수유나 생강나무 혹은 일렁이는 공기 탓인지,
약간 색이 있는데 목련 주변은 하얀 등롱으로 인해 무척 투명하다.
경쾌한 鬱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가까이 다가서면 벌써 상처 입고 시들어 가는 모습도 있다.
문득 아래를 바라보니 벌레처럼 보이는 거뭇한 아린이 무수히 떨어져 있다.
여든이 되어서야 풀과 나무 동물과 곤충의 모습이 보이더라는 일본 화가 이름이 가뭇하다.
꽃에 홀려선가 아린을 본 기억이 별로 없다.
이제 나도 꽃보다는 아린이 되어서인가.
겨울 그 추울 때 단단하고 여무진 모습으로 꽃을 감싸고 있다가
꽃이 피어나니 훨훨 져내린 것이다.
꽃이 밀어낸 것인가, 스스로 떨어진 것인가,
몇 년 전 기억인데도 선명하다.
아주 늦은 밤의 문상이었는데 소천하신 분 영정이 참으로 젊고 아름다웠다.
햇 육십이라고 들었는데 사진은 사십대 초반쯤...
여자 가장 아름다울 때가 삼십 대 후반에서 사십대 초반이 아닐까,
아주 화려한 색깔의 자켓은 생뚱맞을 정도로 선명했고
자신이 충분히 아름답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듯한 미소.
영정이 꼭 낡고 희끄무레해야 할 이유야 없겠지만
그 생경함이 생과 사에 대한 기이한 관계를 유별스럽게 나타내는 듯 하여 기억에 있다.
이청준은 장례식에서 일어난 일을 적으며 축제라 명명한다.
인간사 모든 일들이 그렇듯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일은 없다.
수많은 실날들이 얼키고 설켜 도무지 가닥을 잡을 수 없는 것이 삶이다.
장례라는, 죽음에 대한 의식을 치루는 일,
삶이라는 휘장이 휙 걷어 내버린 껍질 아래 속살.
그 때 사람들은 어느 때보다 예민하고 날카로우며 구운 조기 껍질 벗겨내 버린 속살 같다.
거기 어디 숨겨져 있던 날카로운 가시가 고개를 들고 상처로 인한 고함이 터져나오기 십상이다.
그래서 哭이랄지 곡비가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곡은 주위를 덮고 슬픔을 불러낸다.
슬픔은 죽음과는 전혀 상관없는 자신만의 포한抱恨을 촉발해내니
결국 장례를 덮기 위해 영리한 선비님들은 곡비를 불러왔던 것이다.
포르테..포르테시모 포르테시시모.......
그래야 속살을 감출 수 있었다.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소설 속 화자는 이런 이야길 했다.
“지난 시간을 돌이켜 볼 사람을 잃는 것은 '세월에 대한 증인을 잃은 것'이며,
증인이 없는 그 세월만큼 남은 자 역시 '자기 삶의 역사를 잃은 것'이다.”
적확한 말이다.
장례식에 갈 때 마다 느낀 거지만 곡비가 사라진것처럼 슬픔도 사라진 것 같다.
혹여 슬픔, 무리 지어 여기저기 움직인다고 하더라도
남은 자식이나 남편 떠나버린 그녀를 몹시 사랑했다 하더라도
그리하여 움직이는 슬픔에 잠시 갇혀 있다 할지라도
손님에게 대접해야 할 음식, 음료수, 혹은 커피 부탁, 다리 저림, 타인의 옷차림과 묵념하는 태도,
시들은 국화, 피어나는 향의 냄새, 처리해야할 일들,
그 지극히 사소하고 일상적인 것들이
아주 쉽게 슬픔의 막을 찢어내고 대신 들이찬다.
우리에게는 찢어내지 못할 강철같은 슬픔이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죽음은 가장 큰 슬픔과 직면할 수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발길로 다져진 소롯길이지만,
이제 그 소롯길은 신작로가 되어 차를 타고 다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스피드 속에 슬픔은 머물지 못하니까.
슬픔은 마치 연기 같아서 ,
그래서 슬픔은 흔들리는 것들, 작은 바람조차 없어야 아주 조금 머무는
지극히 섬세한 존재이니
봉투내고 미소 짓고 악수하며
살아 있는 사람들 끼리 회심의 미소를 짓는 장례식장 어디에 슬픔이 고이겠나.
장례식에 가면 직면하게 된다
사소한 것들의 위대함을....
슬픔ㅡ죽음과 이별이라는
인생에서 어쩌면 가장 큰 별리의 장소이지만 그 위대한 슬픔도
인사 미소. 손짓, 예의 악수 포옹, 탄성. 관심. 반복되는 마지막에 대한 설명등 .
서푼도 안되는 것 들에 의해 잡아먹히고 만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 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성경이 기록한 것은 단순히 슬픈 자 위로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장례라는 축제 속에서 너를, 네 미래를 보라는 이야기다.
생각해야 하리, 아니, 볼 수 있어야 하리.
얼마 후면 분명히 치러질 내 장례식을,
설령 누군가.....우리 딸일까,
세상이 무너질 것처럼 세상이 적막할 만큼 슬픔에 젖는다 한들
떠나는 사람에게 아무런 일도 아니라는 것
죽음은 무시무시한 홀로이다.
그 홀로를, 고독을, 산자여 유심하라.
어젠 요양원에 가서 휠체어를 타신 99살 엄마와 작은 공원을 거닐었다.
몸은 말할 수 없이 작아지고 여기저기 아픈 곳은 많으시다.
그래선지 하나님이 왜 나를 안 데려가시는지 모르겠다는 말씀이 빈말처럼 들리지는 않았다.
생사화복을 맘대로 어찌 하겄소 엄마, 그라제
생각해보니 엄마 진짜 아린 아니신가.
나 역시 아린의 길에 들어섰으니,
비 소식도 없었는데 아주 살짝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
목련꽃에는 회초리겠네.
이 비에 꽃 상처 입겠네.
내 고향 보성에는 대원사라는 절이 있는데
그 절 입구 까지 약 사 킬로 정도 벚나무가 심겨 있는데
그 벚나무는 여름에도 완강한 그늘이 지닌 서늘함을 자랑하는데
그 길 곁에 보성강이 흐르는데
지는 꽃잎 그 강물 위로 져 내리기 위해
이 비는 꽃봉오리를 조탁하듯 두들길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