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아
소설을 사랑했었다.
쓰고 싶었고 실제로 몇 편 쓰기도 했다.
그래서 한 때, 그때가 내 글의 정점이었을까?
크리스챤 신문에 소설이 당선되기도 했었고
소설을 선해 준 강정규 선생이 동화를 써보면 어떠냐고 같이 쓰자는 말을 건네주시기도 했다.
삼십 대 중반이었으니, 젊었으니, 소설만이 문학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으니,
화들짝, 그게 무슨 화들짝 할 일인가,
아니에요, 저는 소설을 쓸거예요. 했다.
그 때 동화를 썼어야 했을까,
내가 아는 제법 유명한 동화 작가의 글을 읽어보면
아, 이런게 동화인가, 싶기도 하던데,
그러고 나서 소설의 문이라는 신춘문예, 동아일보 최종심 세 편 중 한편으로 남기도 했다.
송우혜 선생이던가,
전화해서 자신은 세 편 중 내 글이 제일 좋아서
당선될 거로 여겼다며 전화기 저쪽에서 말해 주셨는데
(글도 아닌 누군가의 말 몇 마디가 어느 사람에게는 이렇게 오래도록 남기도 하는 것이다)
그 때 3등이나 2등이 아니라 1등이 되어 데뷔했다면 어땠을까,
삶이 좀 더 나아졌을까?
과연 좀 더 나아진다는 것은 무얼 말하는걸까,
돈을 번다는 것? 그보다 좀 더 유명해진다는 것?
아니면 익명의 독자,
누군가의 책상 앞에 자신의 글이, 분신이, 혹은 생각이
하나로 묶여 조신하게 펼쳐진다는 것?
그보다는 과정이겠다. 좀 더 진지한 항해가 되었을수도,
이성아 작가는 작가의 말을 아일랜드의 벨파스토를 떠나며 썼는데
아일랜드의 소도시를 아내와 함께 한달 반 가량 여행을 하러
북클럽 맴버는 요즘도 여행루트를 짜고 있는데,
제임스 조이스를 언급했는데,
새로 완역된 율리시즈 2권을 (1권은 누군가가 빌려 가서)
읽고 난 후, 내가 얻은 결론 하나는 다시 이 책을 읽을 때는 집에서 읽지 말고
카페나 도서관에 시간을 정해 가지고 가서 허리를 곧추 세우고 읽을 것,
그니까 허리 힘이 필요한 책이라는 생각을 했는데,
이성아 작가는 벨파스토에 가서 제임스 조이스를 생각하니,
이런 저런 연결도 아닌것들을 연결해 내는 것은
결국 외로움 탓이리라,
홀로 보다는 작은 끈이라도 함게 붙잡는 것,
가끔 깜깜한 어둠 속에 서면 앞산이나 먼 산들이 지척의 익숙한 숲들조차
무섭고 두려워질 때가 많다.
어느 땐가는 버스를 타고 오는데 어둠이 다가왔다.
오메 스쳐 지나가는 산들이 어찌나 무섭던지,
버스 안인데도 몸을 움츠린 경험이 상기도 선연하다.
“짙은 산그림자가 날개를 활짝 펼친 거대한 맹금류처럼 보였다.”
아주 너무나 적절한 표현이다.
실제 북한산 의상봉은 독수리 부리 같다.
밤에 보면 엄청 더 무서울 것이다.
아 한때는 북한산 백운대에 올라 동두렷이 뜬 보름달을 바라보는 것이 꿈이었는데....
이성아 작가의 <유대인 극장>
재미있게 아니 흥미롭게 읽히니 아주 잘 쓴 글이다.
어디 편안한 인생 있으랴만
이성아 소설 속 인물들은 하나같이 어둡고 힘들고 치열하다.
그렇지, 모든 어둡고 습한 그리고 우울속에서 문학은 탄생하는 것이지.
<유대인 극장>에서 방제복을 입은 사람들은 우리 자신이다.
그말이 무슨 말인지 관객들은 알 수 없는데 알 수 없는 말을 분명 눈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그 알 수 없는 말들은 팩트로 각인되고 듣지도 알지도 못한 그 말은 아는 것이 된다.
보는 것의 틀림, 아는 것의 틀림, 생각하는 것의 틀림이 진실인데
그 현저한 차이를 의식하지 못한 채 우리 모두 살아가고 있다.
탈북자를 다룬 <천국의 난민>은 꿈처럼 사람들을 만나는 이야기다.
꿈처럼 하루코를 만나 북한으로 가게 되고
견디기 힘든 수난의 시간을 지나 어찌어찌 탈북하게 되고
아버지의 고향 집에서 다시 하루코를 만나는 ...그러나 하루코가 아닌.....
꿈같은 만남이 펼쳐진다.
소설 안에서 전지전능한 작가는 들었고 바라보고 느꼈던 삶의 가락들을 베를 짓듯 엮어낸다.
한산모시도 곱지만 삼베도 아름답다.
<스와니 강>도 아름다운 작품이다.
단 한번도 만나지 못한 사람이지만
그 어느 누구보다 더 서로의 삶을 이해할 수 있는 관계도 있는 것이다.
우리모두 스와니 강을 모르면서도 아는 것처럼 노래를 부르듯이
그리움, 그 형체 도 없는 그것이 얼마나 사람을 가없이 만드는가,
그것은 마치 우리에게 다가오는 햇살처럼 선명한 게 아닌가.
오늘 아침 내 방에 들이차는 햇살이
스와니강을 지나쳐 오듯 뉴욕 퀸즈의 빈 아파트를 밝히고 오듯,
그러니 참 제목도 절묘하다.
<베이비 시터>의 우희는 작가가 많이 들어간 케릭터 일 것 같다.
자폐아인 기우만이 아니라 리사 하다못해 남편 선호조차,
우희는 그녀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이해하고 수용하고 결국은 연민케 된다.
마지막이 좀 색달랐다.
기우를 밀치는 우희
사고를 낸 운전자는 선호였을까?
우희를 죽이려는?
“우희의 두 눈이 멀어버렸다.”?
류근 시인의 추천사는 어디에 있을까?
윤 루시아 선비의 마음을 담아~
책 앞에 써 있는 작가의 글이 시원시원하다는 것을 느꼈다.
윤루시아 선비~~~ 좋네, 그래 루님은 선비의 자격이 있지. 윤 선비,
책을 다 읽고 나서 다시 앞을 보니 선비가 아니라 선배였다.
사랑하는 후배의 출간을 축하하는 의미의 선물이
연천을 지난 햇살이 내게로 비쳐왔던 것이다.
(그림은 가브리엘르 뮌터의 그림들 소설집 표지화의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