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frarang Jul 05. 2023

인생 네 컷

59개월 24일


삼청동엔 네 개의 장면이 있다. 나만의 컷, 아내만의 컷, 연인 시절의 컷,  그리고 우리 가족의 컷.      


나는 삼청동을 좋아한다. 한때 이곳은 지금과 다르게 조용하고 고즈넉하며 예술 감각이 흐르는 곳이었다. 평일 쉬는 날이면 주로 혼자 이곳을 걷곤 했다. 도심의 중심에 있지만 혼잡하지 않고, 오래되고 낮은 건물과 구불거리는 골목이 주는 낯선 느낌은 이방인이 된 것처럼 자유롭고 평화로로운 기분을 만들어줬다. 걸을수록 마음은 차분해진다. 나는 구석구석을 살피며 나만의 지도를 만들어 갔다. 안국역이나 광화문역, 가끔은 종로 3가에서 인사동을 관통해 찾아오기도 했다. 나의 지도는 북촌으로 계동으로 익선동으로 서촌으로 부암동으로 점차 넓혀갔다. 기분 따라, 날씨 따라, 사람 따라 원하는 코스를 골라 걸었다. 어딜 가도 삼청동이 중심이었고 잠시 머물다가는 쉼터 같은 곳이었다. 나에게 삼청동 한 컷은 쉼이다.     

  

연애 시절, 아내는 삼청동 끝자락 삼거리에서 액세서리 파는 장사를 했다. 소박하고 아기자기한 가게는 아내와도, 삼청동과도 잘 어울렸다. 결혼하고 출산 전까지 8년의 세월 동안 작은 가게를 가꾸고 돌봤다. 가뜩이나 볼 것 많고 예쁜 게 즐비해 심장 박동이 두 세배는 빨리 뛰는데 거기에 애인을 만나러 가니 삼청동 길은 설렘 그 자체였다. 걷기 좋아하던 내가 아내를 빨리 만나려고 버스를 타고 차창으로 무심히 사랑스러운 거리를 흘려보낼 때도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 가는 길, 아내와 나에게 삼청동 한 컷은 설렘이다.   

   

아내에게 삼청동은 지긋한 출퇴근 길이다. 그리고 계절과 날씨 영향을 많이 받는 곳이라 장사 걱정이 끊이지 않던 길이다. 또 가게 크기에 비해 비싼 임대료 때문에 불만이 많았지만 건물 주인 할아버지의 능글스러운 대처에 한 마디 못하던 곳이다. 하지만 아내도 그곳을 사랑했다. 자식 같은 액세서리를 수없이 데려오고 보내던 곳, 아끼던 자식들이 팔리면 못내 아쉬워하며 정을 나눈 곳이다. 사람이 없으면 없는 대로, 비가 오면 오는 대로, 계절이 바뀌면 바뀌는 대로 그대로 흡수하던 그곳을 좋아했다. 가게 안에서 보는 바깥 풍경은 영화 속 장면 같았고, 좋은 카메라로 찍은 사진 같았다. 그 풍경들이 지친 순간들의 위안이었다. 작은 가게를 가득 메운 음악에 따라 영화의 장면과 사진의 색감은 달라졌다. 삼분마다, 그 삼분이 쌓여 매일매일 다른 세계와 장소에 살았다. 사람이 많아야 장사가 되련만 사람이 없어 좋다던 아내의 갈팡질팡한 말은 진심이었다. 아내에게 삼청동 한 컷은 애증이다.      


얼마 전 삼청동 나들이를 다녀왔다. 오랜만에 익숙한 거리를 걸었다. 혼자 걷던 길, 둘이 걷던 길, 이번엔 아이와 함께 셋이 걸었다. 쉼과 설렘을 주고 사랑과 미움이 섞였던 그 거리에 또 하나의 장면이 만들어질거라 기대했다. 길을 걸으며 건물과 골목에 얽힌 엄마, 아빠의 연애담을 들려주었다. 하지만 듣는 둥 마는 둥 주아는 우리의 추억 따위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주아는 오로지 지나가는 길에 보이는 피카추나 어몽어스 캐릭터 상품, 자동차 장난감에만 관심을 보였고, 가게로 들어가 구경하며 잠시 더위를 피하며 쉬는 시간을 갖거나 혹시 아빠가 사주진 않을까 설레었다가 안된다는 엄마의 말에 입을 삐죽거리며 애증의 표현만 했을 뿐 우리와 같을 거라는 건 과한 욕심이었다.   

   

삼청동 거리를 한 바퀴 돌고 되돌아오는 길에 주아가 ‘이거 하면 안 돼?’ 하며 어딘가를 가리켰다. 동시에 바라본 곳은 스티커 사진을 찍는 가게였다. 나는 주아에게 이런 것도 아냐며 찍자고 했지만 아내는 시큰둥했다. 아내는 사진 찍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우리 가족은 액자로 만들어 벽에 걸어둘 만한 가족사진이 아직 없다. 주아의 삐죽거리는 입술 사이로 ‘힝’ 소리가 나오자 아내는 마지못해 승낙했다. 가게 안으로 들어가 사진 찍을 때 사용할 가발이나 안경 등 소품을 골랐다. 서로 이거 써봐라, 저것 써봐라, 어울리네, 안 어울리네 를 한참 주고받고는 머리띠와 안경, 모자를 쓰고는 사진을 찍었다. 돈을 내고 찍은 첫 번째 가족사진이었다. 출력된 사진 위로 동시에 머리 셋이 모이더니 사진 플래시처럼 환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불편한 옷과 어색한 웃음이 묻었을 사진관 사진보다 더 마음에 들었고 더 선명하게 기억될 사진이다. 스티커 사진 덕분에 삼청동에 우리 가족이 함께 기억할 장면이 하나 생겼다. 나, 너, 연인, 가족의 기억 네 컷이 모인 곳, 우리 가족에게 삼청동은 인생이다.     

  

우리는 삼청동을 서서히 놓아주며 광화문으로 향했다. 삼청동엔 네 개의 장면이 있다. 나만의 컷, 아내만의 컷, 연인 시절의 컷,  그리고 우리 가족의 컷.      

매거진의 이전글 부모의 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