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개월 10일
한창 바쁜 오후 네시쯤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어린이집 하원 시간이라 전화가 없을 시간인데, 웬일인지 싶어 바로 전화를 받았다. 통화는 ‘어떡해’ 시작했다. 아내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고 나는 바로 왜 그러나며 재촉하듯 물었다. 어린이집 담임 선생님한테서 연락이 왔단다. 주아가 어린이집에서 친구를 때렸고 어린이집 버스를 타면서도 친구를 때렸다는 전화였다. 3초간 정적. 나는 친구는 다쳤는지, 어떻게 때렸는지, 누구를 때렸는지, 왜 때렸는지, 질문을 쏟아냈다. 놀다가 로이, 범서를 때렸고 버스에서는 가을이를 때렸다는 것 말고는 정확한 내용은 알지 못했다. 평소 제일 친하게 지내는 친구들이다. 그래서 더 놀랐다. 곧 하원하는 주아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했다. 따끔하게 혼을 내야 할지, 집에 오자마자 왜 그랬는지 다그칠지, 아무 일 없듯 지내다 저녁쯤 차분히 물어볼지, 여러 생각이 뒤섞였다. 우리는 아무 일 없듯 평소처럼 반겨주고 천천히 물어보기로 했다. 한숨과 내쉬며 전화를 끊었다. 심장이 빨리 뛰었다. 불안하고 두렵고 혼란스러웠다.
주아가 친구를 때린 이유는 전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벗어놓은 신발을 주아가 밟았는데 친구들이 와서 왜 신발을 밟냐고 동시에 따지자 어찌할지 몰라 당황하고 놀라서 운 일이 있었다. 그 일이 속상했는지 다음날에 자신이 놀고 있는 장난감을 가져가자 때렸다는 것이다. 버스에서는 귀엽다며 볼을 살짝 잡은 것을 친구가 때렸다고 선생님께 말한 거였다. 주아의 말을 듣고 우리가 조합해 구성한 사건 경위다. 아내는 주아한테 맞은 아이의 엄마들에게 전화를 했다. 평소 친하게 지내는 엄마들인데 혹시 사이가 틀어지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들 괜찮다며 웃어넘겼다. 다들 주아가 때렸다는 얘기에 ‘주아 가요?’ 라며 되물었다. 우리가 아는 주아도, 남들이 아는 주아도 그럴 아이가 아닌데. 아내는 작년 담임 선생님과도 통화를 했다. 놀라며 ‘주아 가요?’를 또 한번 듣고는 마음에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다시는 친구를 때리지 않겠다고 자기 전까지 수차례 약속했다. 다음날 친구들 만나면 사과했으면 좋겠다고 우리의 바람도 수차례 이야기했다. 아내와 난 다음날이 더 긴장됐다. 주아가 의기소침해 친구들에게 다가가지 못하면 어쩌지, 아이들이 안 놀아주면 어쩌지, 또 때리면 어쩌지 하는 걱정들로 하루 종일 초조했다. 다행히 염려했던 일 없이 친구들과 잘 놀다 왔다.
주아의 소식을 들었을 때 내가 한 일은 아니지만 마치 내가 저지른 잘못이나 실수처럼 속상하고 미안해하는 알 수 없는 감정이 일었다. 공감과 이해를 넘어 내가 아닌 존재와 동일시되는 이런 체험은 처음인 것 같다. 아이의 잘못은 아이의 몫이지만 그 잘못의 배경엔 누군가의 소홀함과 안이함 때문은 아닌지. 좋은 건 다 아이의 몫이지만 그렇지 않은 일은 부모의 잘못이나 실수에서 기인된 것만 같은 죄책감. 이런 게 부모의 마음인가. 그리하여 아이의 잘못은 부모의 몫이 되고 부모의 노력은 아이의 몫이 되는 외줄 걷기 부모의 길. 그 길을 잘 걷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