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개월 14일
아내의 생일을 맞아 남원과 곡성으로 여행을 떠났다. 가족만의 여행은 어언 2년만 인 듯하다. 그동안 할아버지, 할머니 또는 이모네랑 자주 다녔지만 우리 셋이 다닌 여행은 오랜만이다. 우리끼리 여행이니 무언가에 얽매일 일 없다. 틀어진 시간, 놓친 관광지, 더 머무른 장소, 바뀐 메뉴처럼 매 순간 마음 가는 대로 몸을 맡겼다.
“너무 행복해.”
주아가 여행 첫날 한 말이다. ‘어때’라는 평범한 질문에 돌아온 황홀한 대답. 주아의 봄날 같은 대답에 비로소 아내와 나도 지금 이 순간이 행복임을 알게 됐다.
첫날 낮부터 하늘이 얇은 비를 뿌리며 샘을 냈다. 비가 내려 더 운치 있던 폐역에서 음악처럼 듣는 빗소리, 미술작품 보듯 바라본 능선에 걸린 비 구름, 사람을 훑지 않은 생 바람을 아랑곳없이 즐긴 덕분일까 비도 금세 질투를 멈췄다. 숙소에 도착했을 땐 조금 전 먹구름은 클렌징 거품이었을까 하늘은 더 깨끗해진 얼굴을 드리웠다. 행복이다.
숙소는 편안했다.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은 규모와 주변엔 걷기 좋은 산책로가 잘 닦여 있었다. 숙소를 둘러싼 산과 개천이 편안함의 원천일지도 모르겠다. 베란다에 나가면 개천을 건너 보이는 앞 산에는 초봄에만 볼 수 있는 같은 초록이지만 저마다 다른 빛깔을 내는 잎새들이 눈을 맑게 해 줬다. 행복이다.
택시를 타고 시내로 갔다. 소문난 고깃집에서 삼겹살에 소맥 한 잔, 후후 불어 식힌 고기 한 점을 씹으며 맛있다를 말하는 주아를 보니 말하진 않았지만 이 역시도 행복이다. 저녁에 먹을 간식거리를 사고 다시 숙소로. 어둑해져 더 낯설게 보이는 풍경은 갈 곳이 있다는 안도감과 만나 여행자의 설렘을 다시 일깨워 주기도 한다. 어두워져 더 밝아진 숙소 안에서 별처럼 반짝이는 서로에게 집중하며 행복을 이어간다.
행복. 그거 별거 아니라고, 큰 게 아니라고들 하지만 우리는 평생 답이 없는 숙체처럼 찾아 헤맨다. 행복은 길게 머무는 게 아니라 잠깐 스쳐가는 바람 같은 것, 나도 모르게 지나치는 풍경 같은 것, 어쩌면 익숙해서 체감하지 못하는 습관과 같아서 못 찾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답이 없는 숙제는 맞지만 그래서 더 찾을 답이 많은 숙제, 특별한 누군가만 느끼는 신성한 것이 아니라 ‘좋다’, ‘괜찮네’로 바꿔 말하는 바로 그 흔한 일들이 행복일 수도 있다.
지도를 펴 내일 갈 곳을 찾아본다. 여긴 꼭 들러보자며 힘줘 말해보지만 이미 답은 정해져 있다. 내일도 오늘처럼. 모든 날도 오늘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