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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rang Jul 27. 2023

60개월

60개월


주아가 생후 60개월이 되었다. 다섯 번째 생일이자 우리나라 나이로 여섯 살 생일을 맞았다. 꿈틀대던 갓난쟁이가 살고자 엄마 젓을 찾아 물고, 눕고 엎드려 지내다가 갑작스레 뒤집고, 기고, 두 발로 서 있더니 뒤뚱뒤뚱 제힘으로 걷다, 엄마 아빠를 외치고, 음식다운 음식을 먹더니 기저귀를 벗고 화장실로 뛰기 시작했고 숟가락을 사용해 스스로 밥을 먹고, 옷을 입고 벗고, 안된다는 말에 울고불고 몸부림을 치더니 그새 말은 단어에서 문장으로, 조건 없이 베푼 사랑에 조건으로 돼 걸고 개월 수에 따른 호칭도 사랑스러운, 고운, 미운, 지긋 지긋한으로 바뀌었으며 어른 넷도 감당 못 할 체력이 생겼고, 띄엄띄엄 글을 읽고 글자를 따라 쓰는 문화인이 되었다.


나는 주아가 빨리 60개월이 되길 바랐다. 그쯤 되면 애착 형성이니 성격 형성이니 하는 민감한 단계도 지났거니와 육아 정보도 다섯 살에서 일곱 살까지는 대부분 함께 다뤄 육아 시름을 덜 수 있는 안정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다섯 살과 일곱 살 그 중간이므로 너무 어리지도 크지도 않은 어린아이의 귀여움이 아직 묻었을 나이며 학습 걱정이나 입학 준비에도 아직 여유가 있을 개월 수라 생각해서다. 하지만 60개월을 기다린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사계절 내내 봄이던 연애 시설, 우리에게도 꽃씨가 내려앉았다. 주아는 예고 없이 찾아와 뱃속에서 잘도 커갔다. 우리는 결혼을 서둘렀다. 어른들을 찾아 인사를 드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고, 청첩장을 만들고, 웨딩 사진을 찍고, 결혼식을 올릴 성당을 알아보고, 부부 교육을 듣고, 신부님을 만나 면담과 서약을 하고, 청첩장을 돌리고, 신혼여행을 알아보고, 살 집을 둘러보고 계약하고, 그 와중에 병원도 다니고. 그쯤 새로 꾸려갈 가정과, 태어날 아이를 위해 받았던 대출. 안정된 살림살이를 위한 결정이었지만 불안했던 나날들, 월급날이 되면 계산기를 두드리며 남몰래 쉬던 한숨들. 버티면 나아지겠지, 죄짓지 않고 살면 보상받겠지, 오늘보단 내일이 더……. 막연하게 붙들던 바람들에 서서히 희망을 채워준 건 주아의 성장이었다. 대출금 상환 기간은 60개월. 줄어드는 원금만큼 늘어나는 주아의 개월 수. 기고, 걷고, 뛰는 걸 정신없이 보다 보면 금세 채워질 것 같았다. 그때가 되면 미안함과 한숨도 사라지리라. 이것이 내가 60개월을 기다린 진짜 이유다.            


어디 사람 일이 예상대로 됐던가. 주식 차트처럼 퍼렇고 뻘겋게 굴곡진 시간이었다. 그토록 안절부절못하고 발버둥 쳐도 올 시간은 약속처럼 제때 오고, 좋아지고 나빠지는 건 우리 능력 이상의 어떤 힘이 필요한 것 같다. 사실 다 아는 진리지만 내 삶에 빗대면 왜 다를 거란 기대가 생길까. 그냥 살면 됐을 것을. 60개월이 다 된 지금 달라진 건 거의 없다.


지난 60개월을 돌이켜보면 나의 가장 큰 걱정은 대출금을 빨리 갚는 일도, 월급 다음 날도, 돈 나갈 일이 많은 계절도 아니었다. 제일 큰 걱정은 주아였다. 때가 되면 다한다는 일도 조금만 늦어지면 이자가 밀린 것 마냥 마음이 급해지고, 열이 나는 날이면 밤새 체온을 재고 몸을 닦아주며 휴식을 양보하고, 어린이집에 처음 간 날은 늘어난 심박수에 숨이 찼고, 떼를 안 받아준 날엔 죄책감에 각성되어 잠 못 자고, 물질적 풍요보다는 더 놀아주지도, 더 이해해주지 못한 정서적 풍요를 걱정했다. 하지만 늘 근심만 있던 건 아니다. 걱정만큼 기쁨도 많았다. 줄어드는 원금보다 늘어나는 말과 행동이 더 뿌듯했다. 스스로 하는 일이 많아질수록 적금 쌓이는 듯 으쓱했다. 건강하게 큰 걸 알아차릴 때면 더 바랄 것 없는 부자의 마음이 됐다. 애초의 걱정 말고 다른 걱정에 신음하고, 그것들과 뒤엉킨 기쁨을 누리다 보니 60개월은 금세 찾아왔다.


빨리 찾아왔으면 했던 그 개월 수, 금방 채워지길 바란 그 시간은 사실 한 순간도 그냥 지나칠 수 없고 소홀해선 안 되는 내 평생 가장 소중한 시간이었다. 주아의 삶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이렇게 중요한 시간을 단순히 채무를 끝낼 시간으로만 인식하고, 달력을 휙휙 넘겨보며 혼자 몇 달을 앞서 살아가던 기억에 얼굴이 달아오른다. 이런 마음 때문에 가족에게 또 다른 빚을 졌다. 그래서 이번 빚은 즐겁게, 시름 않고, 오래도록 갚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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