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개월
아내가 주아를 유심히 본다. 얼굴을 구석구석 한참을 살피더니 양손으로 볼을 감싸고 끌어당겨 입술에 뽀뽀한다. 손으로 머리를 이 대 팔로 넘기며 우리 주아는 이마가 너무 이쁘다며 흐뭇해한다. 아내와 난 주아를 앞에 두고 해부를 시작했다. 눈은 엄마, 코는 콧구멍이 큰 걸 보니 아빠, 입술은 두꺼우니 엄마, 턱은 짧은 무턱이니 아빠, 귀는 크니까 아빠, 이마는 적당히 나온 것이 엄마.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은 얼굴에서 이마가 진짜 중요한데 자길 닮아 다행이라며 아빠 닮았으면 꽝이었다고. 그건 나도 인정한다. 얼굴이야 부모 닮는 거니 좋은 부분만 골라 닮으면 다행이니까.
아내가 주아의 발톱을 깎고 있다. 걱정 섞인 투로 네 번째 발가락이 약간 휘었다고 말한다. 나는 크는 중이라 그러는 걸 거라며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며칠 후 저녁 시간,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꼬고 TV를 보고 있는데 아내가 말했다.
“주아가 발가락이 휜 게 자기를 닮은 거네”.
나는 발가락을 유심히 봤다. 그리고 주아를 불러 내 발과 주아의 발을 번갈아 보며 살폈다. 똑같았다. 껍질 안 깐 땅콩을 닮은 모양과 휘어있는 각도까지 비슷했다. 난 어이없어하며 말했다.
“이런 것도 닮아?”
유전자의 신비에 또 한 번 놀랐다.
주아와 편의점에 갔다. 초코파이를 먹고 싶다며 찾아다녔다. 나는 초코파이는 어떻게 알았냐며 함께 찾았다. 초코파이를 사 들고 집에 와서 먹고 있는데 주아가 물었다.
“근데 왜 아홉이라고 쓰여 있는 거야?”
무슨 말인가 싶어 주아를 보니 초코파이 상자에 쓰여 있는 글자를 보고 있었다. 한자로 쓰여 있는 정(情)을 보고 한 말이다. 초코파이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광고 문구 정(情) 말이다. 순간 소름이 돋았다. 나도 어릴 때 정(情) 자를 아홉으로 읽었었다. 초코파이가 아홉 개씩 들어있다는 건지, 9살까지 먹어야 하는 건지 등등 궁금했던 적이 있었는데 주아도 나처럼 똑같이 읽고 궁금해했다. 놀라웠다. 설마 이런 것도 닮는 건가? 인지하는 방법까지? 학습하는 과정까지? 이런 것도 유전인가? 여러 생각이 엎치락뒤치락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정말 이런 것도 유전이라면 주아가 성장하는 동안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내가 포기했던 수학을 주아는 싫어하지 않도록 미리 수학에 재미를 붙이려 여러 시도를 해본다거나 친구들에게 인기가 좋아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내신 등급을 높이려면 어떤 활동을 해야 하는지 등 내가 놓치거나 실수했던 일들을 주아는 반복하지 않도록 미리 조작해보면 어떨까. 그리곤 바로 뒤따라 온 생각들. 주아가 그걸 못 받아들이면 어쩌지? 힘들어하면 어떡하지? 결과가 예측되는데 밀어붙일까, 아빠가 해봐서 아는데, 아빠가 살아봐서 아는데 라며 억지로 설득하진 않을까. 설계된 인생처럼 한층 한층 힘겹게 쌓아 올리려 하진 않을까. 그렇다면 주아는 행복할까? 우리 관계는 끈끈할까? 원하는 삶을 살게 될까?
지금이야 공부 좀 못해도 괜찮고, 학원도 가기 싫다면 다니지 않아도 되고, 그냥 건강하게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며 사람을 존중하는 아이로만 성장한다면 더 바랄 게 없다. 하지만 아이가 클수록 이런 마음이 유지될 수 있을지. 어릴 땐 하나라도 날 닮았으면 바랄 게 없고 발가락 하나라도 날 닮은 걸 발견하면 기뻐했지만, 아이가 커갈수록 내 모습보다는 내가 바라는 모습을 닮길 원하게 되고 다그치고 요구하게 되진 않을지. 부모로부터 받은 유전보다 부모의 후천적 욕심을 닮게 하려는 사회적 유전에 더 관심이 가게 되진 않을지. 혹 그걸 이루기 위해 나는, 우리는 다른 사람을 삶까지 해치진 않을지. 2호선 순환 열차처럼 종점 없는 상상들이 돌고 돌았다.
고개를 흔들어 생각을 흐트러트렸다. 정을 아홉으로 읽는 우연의 일치에 정나미 떨어지는 상상을 했었다. 나의 상상은 유전학적으로 가능한 이론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부모의 양육 태도나 우리가 만들어 주는 생활 풍경은 유전의 힘보다 강하다. 주아의 삶이 변형 없이 자라 건강한 숲을 이루는 구성원이 되도록 좋은 영양분이 돼야겠다.
혹시, 그래도 혹시나 돌연변이 같은 생각이 들 때면 주아와 함께 초코파이 한 상자를 사러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