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frarang Mar 05. 2024

마음에 내린 눈

2월의 어느 멋진날

늦은 2월, 한동안 따뜻했는데 느닷없는 눈 소식에 봄기운이 꺾였다. 눈송이도 크고, 많이 내려 금방 쌓이고 있다. 퇴근길이 혼잡할 것 같다. 우리 동네는 입구부터 마을 끝까지 약 4km 정도의 왕복 2차선 길 양옆으로 집들이 촘촘히 모여있다. 집들은 대부분 빌라다. 마을 초입부터 중간까지는 길이 완만하지만, 그 이후부터는 서서히 경사가 있으며 마을 끝은 산 정상이다. 거기까지 집들이 모여있다. 우리 집은 마을 끝, 그러니까 산 정상 근처다.


마을 중앙에 난 2차선 왕복 도로가 시내로 나가는 제일 긴 길이며 유일한 길이다. 길에 문제가 생기면 불편한 일이 많아진다. 그 도로를 지나다니는 버스는 우리 마을의 발이다. 버스는 마을 주민들을 학교로, 직장으로, 시장으로, 병원으로 안내한다. 우리 동네에서는 길과 버스는 결코 흔한 것이 아니다. 마을 중앙에 난 도로와 몇 대 없는 버스의 소중함은 겨울에 더 선명해진다. 눈이 많이 내리는 날이면 동네 사람들은 긴장하기 시작한다. 길에 눈이 쌓이거나 미끄러워지면 버스가 다니지 않기 때문이다.


눈이 제법 오는 날이면 버스는 마을 중간까지만 운행했다. 높은 경사의 도로는 아니지만 제설 작업이 잘되지 않아서다. 눈이 쌓이면 윗동네 사람들은 자기 집 앞보다 도로의 눈을 먼저 치운다. 처음 이곳에 이사오고 몇 해 동안은 눈이 오면 2km를 올라 집으로, 2km를 내려와 버스를 탔다. 하지만 몇 년 새 늘어난 인구만큼 주민들의 민원도 늘어 제설 작업도 제때, 수시로 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눈이 온다고 버스가 마을 중간까지 오다 멈추는 일은 사라졌다. 이젠 눈이 와도 걱정은 덜 하다. 이런 곳에 이사 온 내가 바보라며 투덜대던 신세 한탄은 눈 내리는 풍경을 감상하며 이 동네 살만하다는 여유로 바뀌었다.


퇴근길 버스 창밖은 평소보다 어두워 보인다.


“내리세요”


버스 기사가 큰 소리로 말했다. 승객들은 고개를 돌려 운전석을 바라봤다. 눈이 많이 내려 00 정류장까지만 운행하라고 회사에서 문자가 왔다고 전했다. 10명 남짓한 승객들은 어리둥절하더니 한두 명씩 내렸다. 버스 안에는 나를 포함해 다섯 명이 남았다. 내가 버스 기사에게 말했다.


“다른 차는 올라가는데 왜 버스만 못 가요?”


버스 기사는 큰 차는 승용차랑 다르다며 못 올라간다고, 회사 지침이라고 큰 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뒤에 있던 중년의 여자분과 남자분도 목소리를 높여 따지기 시작했다. 일방적으로 이러는 게 어디 있느냐, 여태 잘 올라가더니 오늘 왜 그러냐, 트럭들도 올라가는데 버스는 왜 못 가냐며 언성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그때 앞자리에 앉아있던 할머니 한 분이 눈에 띄었다. 버스 기사와 중년의 남자분이 주고받는 큰 소리를 뚫고 할머니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고 난 어떡해요. 걷지를 못해요. 기사님 한 정거장만 가면 우리 집인데 가주세요.”


앞좌석에 앉아있던 할머니는 울상을 지으며 간절하게 외치고 있었다. 할머니의 한 손엔 지팡이가, 무릎 위엔 핸드백보다 조금 큰 손가방이 올려져 있었다.

버스 기사와 중년의 남자는 큰 소리로 계속 싸우는 중이었다. 나는 버스에 있어봤자 해결될 일이 아니라 생각해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향했다. 눈은 세상 모든 것을 덮고 있었다. 뾰족하고 모난 것들에게도. 한 100미터쯤 걸었을까, 갑자기 할머니 생각이 떠올랐다. ‘근데 할머니는 집에 어떻게 가시지?’. 난 다시 버스가 있는 곳으로 되돌아갔다. 내려가던 중 큰 소리로 싸우던 중년의 아저씨와 마주쳤다. 그 아저씨를 보자 할머니가 더 걱정됐다. 버스는 비상등을 깜박이며 회차를 준비하고 있었다. 버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버스 뒤쪽으로 가보니 할머니가 지팡이를 들고 서 계셨다.


“할머니, 걱정돼서 왔어요”.


할머니는 나를 보더니 어떡하냐며 울먹이셨다. 나는 그때부터 지나가는 차를 향해 팔을 뻗어 손을 흔들었다. 히치하이크를 시작했다. 멈추는 차는 없었다. 그렇게 5분여 시간이 지났을 때쯤 흰색 SUV 차량 드디어 멈췄다. 차창을 내리더니 운전자가 ‘타세요.’라고 말했다.. 젊은 부부였다. 나는 ‘감사합니다.’라고 말하고는 뒷좌석 문을 열어 할머니를 태웠다. 할머니와 운전자는 나도 타라고 했지만 괜찮다며 얼른 문을 닫았다. 차는 눈을 헤치며 오르막길을 치고 올라갔다.


몇 년 만에 멈춰 선 버스. 다시 오르게 된 2km 눈길. 질퍽하고 미끄러운 길이었지만 기분이 좋았다. 누군가를 도왔다는 뿌듯함, 아직 살만한 세상이라는 희망,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아이에게 들려줄 무용담이 생겼다는 만족감이 불편과 짜증을 덮었다. 내 마음에도 눈이 내렸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