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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rang Apr 19. 2024

아픔이 머무는 세상

목포 생일여행

그녀를 처음 만난 날을 기억한다. 깔끔한 단발에 곱게 화장했던 모습. 약간의 긴장이 얼굴에 묻어 어색한 미소가 뜬 모습이었다. 저녁 일곱 시가 넘은 시간, 반포 한강공원에 모인 다섯 명의 이야기도 깊어갔다. 쭈뼛거리던 그녀의 목소리가 커지고 빨라졌다. 여러 사람의 이름을 부르면서 자신은 이들을 위해 매일 기도한다고 말했다. 나열한 이름들은 가족도, 친구도 아니었다. 세월호 사고 미수습자 아홉 명의 이름. 2016년 9월의 어느 날이었다.


그녀의 기도 중에 네 명의 이름이 빠졌다. 인양된 세월호가 목포 신항에 거치되고 수색한 지 63일 동안 네 명이 발견됐다. 참사 발생 1,161일 만이다. 선체를 수색하면서 한 명 두 명 발견될 때마다 우린 제일 먼저 소식을 전했다. 안도와 슬픔을 함께 나눴다.


2017년 11월 18일. 참사 발생 1,312일째 미수습자 다섯 명의 추모식이 엄수됐다. 그 누구도 포기하지 않았고 보낼 수 없었지만 시간이, 비용이, 갈등이 만든 사회적 이별이었다. 더 이상 수색작업은 진행되지 않는다. 유품으로 대신한 마지막 배웅은 온전한 모습으로 마음에 들여온 첫날일 것이다. 다섯 명의 이름은 영원히 아내의 기도 속에 머물게 되았다. 슬픈 희망은 깊은 고통이었다. 그래서 이젠 고통보다 슬픔 안에 머물기 위한 기도가 될 것이다.



아내 생일을 맞아 목포로 여행을 갔다. 세 시간 삼십 분을 달려 도착한 우리의 첫 일정은 산정동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는 것이었다. 아내는 성당으로 들어갔고 주아와 난 성당 주변을 산책했다. 성당 입구에는 세월호 참사 10주년을 알리는 현수막이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벌써 10주년이네…. 혼잣말하고는 주아에게 물었다.


“주아야, 세월호가 뭔지 알아?”


모른다는 주아에게 세월호 이야기를 해줬다. 304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고. 299명은 찾았지만 5명은 아직 찾지 못했다고. 엄마가 그분들을 위해 매일 기도한다고도 알려줬다. 천진한 질문과 무거운 답변이 오갔다. 주아를 옆으로 끌어당겨 안았다. 우리가 나눈 이야기와는 다르게 목포의 아침 햇살은 따뜻했다.

점심 식사 후 해상 케이블카를 탔다. 케이블카가 유달산을 넘어 고하도를 향할 때 저 멀리 보이는 신항에 녹슨 배 한 척이 보였다. 세월호였다. 아내에게 말할지 말지 고민했다.. 생일을 기념해 온 여행인데 마음을 무겁게 하고 싶진 않아서였다. 고하도를 둘러보고 돌아오는 케이블카 안에서 결국 그 배를 가리키며 세월호라고 알려줬다.


“진짜? 저게 세월호라고?”


한참을 보더니 다시 목포 시내와 다도해 경치로 관심을 돌렸다. 다음 일정은 호텔로 가는 것이었다. 내비게이션으로 가는 길을 찾아보니 목포 대교를 지나가는 길이었다. 목포대교를 넘어 조금만 가면 목포 신항이 나온다. 세월호가 있는 곳이다.


“세월호 보고 갈까?”


조심스레 꺼낸 말에 아내는 그러자고 했다. 말끝이 떨렸다. 주아는 그새 잠들었다. 우린 세월호를 가장 가까이 볼 수 있는 곳으로 갔다. 철조망이 쳐져 있었고 매듭 사이 사이엔 빛바랜 수많은 노란 리본이 나부끼고 있었다. 바람에 서로 엉켜 부딪히는 소리는 울음소리 같았다.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 옆엔 미수습자 5명의 사진이 놓여있었다. 사진을 보자 아내는 어떡해 하며 손으로 입을 막고 서성이다 사진 앞으로 다가가 두 손을 모아 기도했다. 3,650번째 기도다. 항으로 들어가 더 가까이 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참관 시간이 지나 들어가진 못했다. 세월호는 여전히 눈앞에 있지만 더 가까이 갈 수 없는, 보고 있지만 믿어지지 않는 그런 실체였다. 사진을 찍기도 불성 했지만 급하게 몇 장 담았다. 우리 뒤로도 두 가족이 와서 세월호 참사를 추모했다. 주아는 아직 아무 일 없듯 차 안에서 자고 있다. 우린 다시 호텔로 향했다.


다음날, 1박 2일의 마지막 여행지는 시화 마을이었다. 목포에 가면 꼭 가보고 싶은 장소가 있었다. 영화 ‘1987’에 나오는 연희네 슈퍼다. 나는 슈퍼 앞에 앉아 데모를 하면 세상이 바뀌냐며, 가족 걱정은 안 하냐며, 꿈꾸는 그날은 안 온다며 따져 묻는 연희에게 한열은 박종철 열사가 그려진 전단지를 매만지며 말하는 장면을 제일 좋아한다.


’나도 그러고 싶은데 그게 잘 안돼. 마음이 너무 아파서. ’


한열의 대답은 이 영화를 관통하는 대사다. 변화는 거대한 담론이나 특정 인물에 의해 오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작은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을 알리고 싶었던 감독의 의도가 담긴 장면이다. 연희네 슈퍼는 시화 마을 초입에 있었다. 나는 둘이 대화를 나눈 평상에 앉아 그 장면을 떠올려 봤다.


아파하는 마음들이 모여 더 나은 세상을 만든다는 시대의 서사가 숙명이라면, 한편으로는 꼭 그래야만 세상이 변한다면 그런 변화는 거부하거나 멈추고 싶을 때가 있다. 아파할 일 없이 세상은 변하지 않는 것일까. 그렇다면 지금 아파하는 일은 어쩌면 아파할 일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미래의 아픔을 대신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더 나은 방향으로 우리가 향해 가고 있다면 그건 지금 아파하는 사람들 덕분이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해선 아파해야 한다는 슬픈 진실. 그래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아파하고, 기억하고, 추모하는 일이다.


이한열 열사의 마음과 그를 걱정하던 마음이 6.29 선언으로 증명됐듯 아내의 오래된 기도와 많은 사람들이 품고 있는 아파하는, 기억하는, 추모하는 마음은 유가족의 남은 삶은 물론 지금 내 옆에서 고양이와 대화 중인 주아의 삶에도 빛을 밝히리라 믿는다. 지금보다 생명이 존중되고 안전하며 약속이 지켜지는 세상이 될 것이라 굳게 믿는다.


우리 아내의 생일은 4월 17일이다. 생일 축하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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