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마지막 일상이 될 줄은..
세민이와 오랜만에 영화관 데이트를 했다. 둘째와 함께 있으면 제대로 첫째의 기분을 맞춰 줄 수 없어 늘 마음 한구석에 미안함이 남아있었다. 그래서 기회를 보다가 마침 유치원이 휴원이라 오전에 아이를 데리고 영화관으로 갔다. 세민이는 나와 둘이 영화를 본다는 사실보다 카라멜 팝콘을 먹는다는것에 더 기대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코로나로 인해 상영관에서는 음식을 먹을 수 없었고, 우리는 상영 10분을 남기고 카라멜 팝콘을 미리 반정도 해치웠다.
그러니까, 그날은 묘하게 삐그덕 대는것 같았지만 둘이서 데이트를 했으니 만족 스러웠고, 오후에는 예정대로 세민이를 피아노학원에 보냈다. 목요일이었고 다음날은 둘째의 세번째 생일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핑계로 친정에서 한 며칠 보낼 생각이었다. 세민이가 학원을 다녀오고 짐을 싸서 친정으로 갔다. 1시간 50분을 달려서 친정에 도착했는데 두번째 '삐그덕'이 왔다. 캐리어를 두고 온것이었다. 그러니까 짐을 밖에 덩그러니 두고왔다. 나와 남편은 너무 황당했지만, 연말 마지막 이벤트(?)라며 웃어 넘기고 나는 다시 캐리어를 가지러 왕복 4시간을 운전했다.
한 통의 문자
다음날엔 친정엄마와 아이들을 데리고 가까운 부산 나들이도 갔다왔다. 둘째 생일이라서 외식도 했다. 그런데...저녁 6시쯤 나와 가족들의 모든 일상을 날려버릴 문자가 한통 왔다. "피아노학원에 확진자가 생겼는데 세민이가 밀접접촉자 입니다. 신속히 검사를 받아주세요" 도대체 언제? 무슨요일에? 언제부터? 머릿속이 갑자기 새하얘졌지만, 나는 애써 침착했다. 방어적으로 전체문자를 돌렸을꺼고, 설령 밀접접촉자이지만 양성은 아닐수도있겠지.
그 다음날 가까운 보건소로 향했다. 세민이도 나도 PCR검사는 처음 이라서 긴장했는데, 아이 앞이라서 긴장한 티도 못내고, 그저 "독감검사랑 비슷한거야~ 독감검사 해봤지?" 라며 아이를 안심시켰다. 검사 대기줄은 아침부터 길었고, 세민이 또래 아이들이 많이 있었다. 우리 차례가 왔고 세민이는 생각보다 의젓하게 검사를 마쳤다. "엄마엄마 나 잘해찌? 또 할 수 있을꺼같애!!" 라며 아이는 의기양양했고, 오히려 나를 안심시켜 주는것 같았다. 나도 검사를 마쳤고. 우리는 겸허히 결과를 기다렸다.
그리고............오전 7시. 전화가 걸려왔다. 나는 직감했다. "안세민 부모님 되시나요? 세민이 검사 결과가 양성으로 나왔습니다." 두둥....
그 날 나는 살면서 제일 많은 전화를 받았다. 보건소, 유치원, 둘째 어린이집, 역학조사관, 격리담당 공무원 등등등...
세민이의 확진으로 우리 가족은 그 날로 바깥 출입을 금지당했고, 다음 날 남편까지 양성판정을 받았다. 하하하...그리고 그것은 릴레이 확진의 시작이었다. 세민이가 밀접 접촉자였다는 문자를 받은 날 친정식구들이 다모였기 때문에 친정부모님과 내동생가지 모두 검사를 받았는데. 내동생이 남편 다음으로 확진을 받았고. 그리고 나와 친정아빠가 마지막으로 확진을 받았다.
위기의 순간에 국가의 실체를 느끼다.
살면서 '공무원'과 통화를 할 일이 별로 없었는데, 코로나에 확진되자마자 수많은 공무원들의 전화를 받게되었다. 그들은 대체로 친절했다. 정말로. 어떤 공무원은 신입이었는지 말하는 내내 떠듬거려서 속으로 내가 긴장하며 응원하게 되는 전화도 있었지만. 그리고 한 곳에서만 전화가 오는것이 아니라, 보건소, 시청, 주민센터 등등 여러 기관에서 전화가 왔기 때문에 했던말을 여러번 반복하는 귀찮음이 있었다.
그리고 친정에 있으면서 확진을 받았기 때문에 지자체마다 보내오는 구호물품도 가지각색이었다. 그런면을 비교하는것도 꽤 재밌었다. 친정은 외국인노동자가 많은 도시여서 그런지 격리설명서가 여러 국가의 언어로 적혀있었다. 내가 사는도시는 한국어만 적혀있었고. 지자체별로 가이드라인도 조금씩 달라서 격리날짜가 바뀌기도 했을때는 살짝 짜증도 났다.
릴레이 확진
격리기간이 자꾸만 늘었다. 내가 4일인가 뒤에 확진되는 바람에 남편과 세민이도 같이 격리기간이 늘어서 둘째까지 확진이 될까봐 겁이났다. 그런데 또 음성이면 더 골치가 아픈것이. 음성은 내가 격리해제 될 경우 열흘을 더 격리(미접종자 기준 적용) 해야했다. 그래서 속으로 차라리 양성확진이 되어 다같이 격리 해제되는것이 편할것같다는 생각도 했다. 그런데 우리 둘째는 슈퍼 항체를 가진것인지 결국 끝까지 음성판정을 받아 우리는 총 20일이 넘는 기간을 격리해야한다. (남편은 해제 후 회사를 갈 수 있지만, 세민이는 해제 해도 일주일 더 집에서 쉬어야 했다. 아마 유치원은 좀 더 방어적인듯 하다)
왜 안 싸울까?
남편과 아이 둘과 온종일 붙어있는 나날들이 계속 되었다. 이상하다. 왜 우리는 싸우지 않을까? 이렇게 하루종일 붙어있는데... 나는 남편에게서 해답을 찾았다. 남편은 이 격리 생활이 답답하다며 볼멘소리를 하지만, 실제로는 회사를 가지 앉는다는것에 매우 흡족함을 느끼는 중이었다. 나는 깨달았다. 우리 부부싸움의 원인은 우리가 아니라 남편의 회사에 있었던 것이다. 더 확실하게 말하면 '노동과 스트레스'일까?
긴 휴가(격리가 아니었다면 좋았을)는 의도치않게 우리 가족의 감정을 누그러뜨렸다. 남편과 아이들이 하루종일 침대에 먼지를 일으키며 뛰어놀고 나는 부엌에서 밥을 짓고 소파에 앉아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는것이 이상하게 평화롭다고 느꼈다. 좋아하는 외식도 못하지만 직접 해먹는 즐거움도 썩 나쁘지 않았고.
매일 배달앱들 뒤척이면서 뭐먹지 고민하는 것도, 서로 미루면서 아이들과 놀아주는 것도, 딱히 육체가 피곤하지 않으니 아이들을 재우고 영화를 보게되는 시간들도 좋았다.
그리고 고마운 사람들
격리를 하면서 집 앞에 음식을 두고간 지인들이 꽤 있었다. 어려울 때 손을 내밀어 주는 사람은 기억에 오래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