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늘봄유정 Jun 12. 2024

너의 지루함이 반갑다

< D - 503 >

"완전 편해!"

제1수송교육연대에서 후반기교육중인 네가 자주 하는 말이다. 선임 없이 같은 기수의 훈련병들만 모인 곳이니 눈치 볼 일도 없고, 운전 교육만 받는 곳이니 혹독한 훈련도 없다지. PX도 자유롭게 갈 수 있고 매일 저녁 휴대폰도 쓸 수 있으니 더할 나위 없는 곳이지. 토요일 브런치식으로 나온 용기라면을 비 오는 야외로 들고나가 운치 있게 먹었다는 말에 네 말대로 야수교는 '야라다이스' '야놀자' '야스베가스'가 맞아 보이더구나.


"너무 지루해..."

운전 교본을 보며 자습을 하는 시간도 더디 갈 테고 2,3분 남짓한 운전 연습을 위해 몇 시간을 멀거니 서서 기다리는 것이 일과라고 하니 지루할만하지. 그나마 이번 주에는 다음 주에 있을 실기 시험을 준비하느라 조금은 재밌다고 하니 다행이지만...


아이러니하지? 입대 전, '자발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삶'을 지향하던 네 입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지루하다는 이야기를 하다니 말이야. 하고 싶은 것도 없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해야 할 이유는 더더욱 찾을 수 없던 너마저도 진공상태 같은 훈련소의 시간은 견디기 힘든 일이라니...


훈련이 끝나고 빨리 자대에 안착하고 싶다는 네 말을 전하니 형이 그러더라.

"꽃이 진 뒤에야 봄이었는 줄 알지."

지루하지만 편한 지금의 시절이 그리워질 날이 온다는 전역 용사의 잔소리에 엄마는 한참 웃었다. 그런 명언은 어느 학원에서 배워오느냐고 물었지.


네가 입대하던 날, 함께 가지 못했던 형이 가족 톡방에 올렸던 말, 기억나니?

"해? 말아? 고민되면 일단 하고,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건 하지 말아라. 꿀팁이다!"

"ㅈ같은 기억은 경험이 되고 좋은 기억은 추억이 되니, 버티거라."

전역과 동시에 꼰대 계급장을 달고 나온 것 같지만, 어느 하나 틀린 말은 없어 보인다.


지루하기 짝이 없던 6월의 기억은 네가 사회에 나와서 하고 싶은 무수한 것을 떠올릴 때 도움이 되는 경험으로 작용하지 않을까? 혹은 어쩌면, 가는, 그 지루했던 시절이 그립지 않을까?

퇴소식 때 가져다 달라던 책 <쇼펜하우어 소품집>에는 이런 글귀가 나온다. (이미 읽었을지도 모르겠구나.)

"인간의 행복에 방해가 되는 요소는 고통과 지루함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우리 인생은 크고 작은 진폭은 있겠지만, 결국 고통과 지루함을 오가는 움직임 사이에 있다..... 빈곤과 결핍은 고통을 낳고 안전과 과잉은 지루함을 낳는다."


네가 있는 그곳의 안전과 과잉을 누리기를 바란다. 매일 저녁 하는 통화에서 우리가 더 이상 새로운 이야기를 나누는 일은 당분간 없겠지만, 그래서 다소 지루한 통화가 이어지지만, 엄마는 너의 안전을 확인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그 지루함이 반갑다.

매거진의 이전글 성시경이 부릅니다. 웰치스는 감동이었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