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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유정 Oct 18. 2024

인생 축제 탐험가의 기록

< 마지못해 사는 건 인생이 아니야 - 안희정 >

삶은 버티는 것이라 생각했다.

기왕 태어났으니 삶이 고단하고 퍽퍽하더라도 끝까지 가봐야 하며, 어차피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 게 인생이라면 내가 할 수 있는 건 세월의 너울에 몸을 맡기는 것뿐이라 생각했다. 그런 태도를 '초연', '달관' 같은 이름으로 멋지게 포장하려 했고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려 애썼지만, 마음속은 그렇지 않았다. 초조하고 불안했으며 서글프고 우울했다.


그때 글을 만났다.

'글 쓰는 삶을 시작했다'라는 표현은 나를 너무 능동적인 사람으로 만들어 글에 미안해진다. 우연히 글을 만났고 글이 이끄는 대로 살았다는 것이 맞다. 글을 쓰려다 보니 삶의 의미와 재미를 찾아내야 했고 또 그러다 보니 삶이 조금은 살만해졌다.


나처럼, 글을 만나 팍팍한 현실을 보듬어 안게 되었다는 작가가 있다. 글쓰기 모임인 라라크루의 수장이자 < 마지못해 사는 건 인생이 아니야 > 의 저자, 안희정 작가다.

맨발로 흙길을 걸으면 발이 새카매지듯이 영혼은 차츰 글에 물들어갔다. 무력하게 살던 내가 새로운 길을 밟으며 기꺼이 살기 시작했다. - p267



글을 만나 무력의 삶에서 탈출했다는 점, 글에 물들어갔다는 점은 같지만, 그녀는 나와 달랐다. 그녀는 맑았다. 천진했다. 실제 만났을 때도 글 속의 화자와 다르지 않았다. 사람을 대할 때 경계하며 훑어보거나 따져 보거나 재는 일이 없다. 아이같이 동그란 눈, 호기심 가득한 눈을 깜빡이며 관찰한다. 어떤 편견, 선입견 없이 있는 그대로의 당신을 만나고 싶다는 얼굴이다. 이 말간 얼굴이 책에도 그대로 드러났다.


우산, 나사, 멍, 슬라임, 먼지, 사탕, 전깃줄에 걸린 달, 떡케이크, 왜가리, 막걸리, 그늘막. 무엇을 만나든 작가는 의심하지 않았다. 오로지 사유했다. 그녀의 시야에 들어온 모든 것이 사유의 대상이었고 그녀의 글로 태어난 많은 것이 그녀가 삶을 대하는 태도를 여과 없이 보여주었다. 그녀는 믿고 있었다. 삶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으며 우리는 그것을 터득하기만 하면 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삶의 의미는 삶에 대한 의문에 있지 않고 믿음에 있었다. - p257



작가는 스스로를 '인생 축제 탐험가'라고 칭한다. 탐험가로서 인생이 던지는 도전과 경험을 즐겁게 받아들이고 삶의 노예가 아닌 주체로 당당히 서는 삶을 사는 것이 우리의 과제라고 말한다. 그래서일까. 작가는 삶의 모든 장면을 애정 어린 눈으로 묘사한다. 모든 장면에서 터득한다. 인생은 그 자체가 축제라는 것을.

소슬히 부는 가을바람에 대롱대롱 매달려 춤을 추는 낙엽, 친구와의 수다 속에서 피어나는 즐거운 웃음소리, 가족과 캠핑하러 가서 활활 타는 모닥불에 생각을 쑤셔 넣는 시간, 여행 후 집에 가는 차 안에서 곤히 잠든 아이의 눈 밑으로 보이는 아기자기한 속눈썹, 그건 분명 후회와 근심으로 점철되었던 날들보다 훨씬 가치가 있다. -p138

 


얼마 전 작가는 말했다. 시를 쓰고 있노라고. 그녀와 시는 제법 잘 어울린다. 시인의 눈과 마음을 가졌기 때문이다. '진짜 삶은 퍼즐과 퍼즐 사이의 균열에 있고 이승의 정체는 개똥 그 자체'라는 표현을 시인이 아니면 누가 할 수 있겠는가. 건조하고 지루한 삶을 마지못해 살지는 않겠다고 다짐한 작가는 구태여 하나 남은 사탕을 버리고 맑은 청주 대신 탁하고 진한 막걸리를 들이켠다. 그렇게 매일의 축제를 탐험한다. 즐긴다. 기록한다.

신호등이 초록불로 바뀌었다.
건널목을 건너기 위해 주저 없이 그늘막을 나왔다.
내 아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내 인생의 축제는 그렇게 개막되었다.

모든 연습은 끝났다.
- 263



#라라크루

#라이트라이팅

#안희정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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