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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유정 Oct 09. 2024

<흑백요리사>의 최종 승자는?

< 흑백요리사 >  관람기

징검다리가 휴일이 많아서 다행이었다. 큰아들이 내준 숙제를 할 여유가 생겼기 때문이다.

학업과 아르바이트로 바쁜 큰아들과는 얼굴 보며 대화할 시간조차 부족한 데다, 어쩌다 함께 식사하더라도 대화 소재를 찾느라 머릿속 구석구석 숨은 낡은 이야기라도 끄집어내야 한다. 그러니 요즘 엄청 핫한 프로그램이 있는데 엄마도 한 번 보라는 아들의 제안은 같이 여행 가자는 제안만큼이나 설레고 기대됐다. 반드시 제안에 응하고 싶었다.


아들의 추천이 아니었다면 망설였겠지만 한번 발을 들여놓은 프로그램은 절대 헤어 나올 수 없을 정도로 나를 끌어당겼다. 어떤 드라마보다도 흥미진진하게 전개돼 '다음 화' 버튼을 누를 수밖에 없던 프로그램.

<흑백요리사>다.


요리 경연프로그램은 과거에도 많았다. 그때도 흥미진진하게 봤다. 그런데 흑백요리사는 과거의 그것들보다 진화했다. 몸집이 더 커졌고 훨씬 영리해졌다. 게다가 더 도발적이었다.


거대하다.

넷플릭스라는 거대 자본이 만들어냈다는 것은 압도적인 규모의 세트장에서부터 알 수 있었다. 최대 40명이 한꺼번에 요리 경연을 벌일 수 있는 40개의 주방, 즉석에서 재료를 골라 요리할 수 있는 정육점과 수산물 가게, 100명의 심사위원단이 층층 시야 시댁처럼 앉아 있는 방청석, 푸드 코트를 옮겨놓은 것 같은 음식 장사 경연장. 라운드마다 감탄을 할 수밖에 없었다. 완성된 음식의 데코레이션만 눈을 즐겁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요리하는 사람들을 품은 곳의 풍경까지도 요리에 포함시키는 것 같았다.


영리하고 도발적이다.

기존의 오디션, 경연 프로그램은 개별 참가자의 능력을 겨뤘다. <흑백요리사>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계급 전쟁'임을 전면에 내세운다. 실력과 명성을 두루 갖추고 이름만 들어도 누군지 알 수 있는 20명의 백수저 요리사와, 패기와 열정은 넘치지만 아직 자신의 이름을 알리지 못한 80명의 흑수저 요리사가 겨룬다. 상위 20%가 전체 생산량의 80%를 차지한다는 파레토의 법칙과, 주목받지 못하는 다수가 핵심적인 소수보다 더 큰 가치를 창출한다는 롱테일 법칙을 연상시킨다. 어느 사회에나 계급은 나뉘어있지만 그것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며 언제든 전복될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준다. 다소 뻔하지만 여전히 먹히는 테마다.


진정성도 느껴진다.

두 명의 심사위원이 요리사들에 대한 배경지식 없이 오로지 요리의 맛만 평가하기 위해 검은 천으로 눈을 가리고 심사하는 장면은 이 프로그램의 진정성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 같다. 함께 일한 적도 있는 요리사의 요리를 얼굴 보고 심사한다면 공정성 시비가 불거질 테다. 코로 전해지는 풍미, 혀로 느껴지는 식감과 맛으로 음식 자체만 평가하겠다는 것은 꽤 괜찮은 시도 같았다. 많은 크리에이터들이 패러디할 정도니 바이럴 마케팅에도 성공했다.

내가 인상 깊게 본 것은 심사위원인 백종원과 안성재 셰프에게 옆에 서 있는 출연자들이 숟가락으로 음식을 먹여주는 장면이었다. 장사의 신 백종원에게, 국내 유일 미슐랭 별 세 개 레스토랑의 셰프에게 밥을 떠먹여 주다니. 시청자들로 하여금 우리가 그들에게 따뜻한 밥 한 끼 대접하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것 같았다. 범접할 수 없을 것 같은 기교와 높은 수준을 자랑하는 요리들이 겨루고 있지만 우리가 원하는 건 그저 어렸을 때 엄마가 먹여주던 따뜻한 밥 한 숟가락이 아니었을까 싶은 장면이었다. 거리감을 두고 있던 시청자들을 화면 안으로 확 빨아들인, 영리한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따로 또 같이 해낸다.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합가 했을 때 가장 많이 부딪히는 곳이 주방이란다. 그만큼 자신의 영역표시가 확실한 곳은 없다. 일반 가정에서도 이럴진대 셰프들에게 주방은 각자의 개성을 극대화하고 자신이 곧 법인 곳일 테다. 그런 셰프들을 팀으로 묶고 겨루게 했다. 어떤 팀은 일사불란하게 각자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고 하나의 요리를 완성하는 데 막힘이 없는가 하면 어떤 팀은 어깨에 힘을 빼지 못한 채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였다. 개인전에서는 어떤 요리도 능수능란하게 척척 해내던 요리사들이 어리바리해지는 모습은 시청자로 하여금 '저들도 사람이구나...' 하며 조금은 마음을 열게 만들었다. 그러다가 이내 멋진 요리를 완성하는 장면은 '전문가는 전문가구나'라며 그들을 온전히 인정하게 했다.


리더란

회차가 거듭하면서 내 시선이 가장 많이 머물렀던 장면은 팀전이었다. 5년째 디베이트 봉사팀을 이끌고 있고 100명 가까운 센터의 장을 맡으면서 가장 많은 시간 고민하는 것이 리더의 역량과 자질이기 때문이다. 겸손한 자세로 나를 낮추고 구성원을 섬기는 리더십이 최고라고 여겼는데, 거기에도 허점이 있다는 것을 최근 많이 느낀 터였다. 섬기기만 하거나 실력이 없는 리더에게는 군림하려는 팀원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전문성과 역량을 가진 리더라면 때로는 드러내는 것도 필요하다. 조용한 카리스마를 발휘하거나 확고한 신념을 전달함으로써 팀원을 이끌어야 한다. 팀전에서 보여준 각 팀의 리더를 보며 나를 돌아보았다. 전문성과 실력을 갖추었는가. 충분히 배려하고 있는가. 신뢰를 주고 있는가. 따를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인가...

보던 화면을 문득 정지시키고 물을 수밖에 없었다.


흑수저 요리사가 승자인가?

흔히들 잃을 게 없는 사람은 독기를 품고 도전하기 때문에 이길 확률이 높다고 한다. 프로그램 속 흑수저 요리사들은 패기 넘치게 말한다. 이기려고 도전장을 내민 것이라고. 너도 못하는 거고 나도 못하는 거라면 한 번 해보자고. 비록 그들의 천진한 독기가 집착으로 흘러 힘을 잔뜩 주게 만들고 자연스럽지 못한 결과물로 이어지기도 했지만, 그 열정과 자신감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승자였다. 힘 좀 들어가면 좀 어떤가. 힘이 남아도는 나이이고 힘껏 보여줄 수 있는 것이 많은 이들인데.


백수저 요리사가 승자인가?

이미 한식, 일식, 중식, 양식 최고의 자리에 올라와 있는 사람들은 단 한 번의 실패로도 잃을 게 많아 보였다. 굳이 이런 경연 프로그램에 나올 이유가 없는 사람들이 왜 모험을 하는지가 단연 이슈가 됐다. 탈락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엄청난 위험 요소가 될 것이라는 게 통념이지만 내가 보기에 그들은 잃을 게 전혀 없어 보였다. 그들은 그저 성공의 경험 한 번을 잃을 뿐이었다. 오히려 최고의 자리에서 맛본 실패의 경험으로 더 많은 것을 얻게 될 것이라는 걸 알고 나온 것이다. '내 칼은 아직 녹슬지 않았다', '내가 지겠어?'라고 호기롭게 각오를 밝혔지만, 실패를 재료 삼아 인생을 요리하는 데 익숙해진 사람들이다. 수많은 실패의 데이터가 쌓여 지금의 자신들이 있다는 것을 아는 그들은 여전히 실패에 목마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그들의 실패는 곧 승리를 의미했다.


그래서 승자는?

경연 프로그램의 특성상 최종 승자는 한 명이다. 모두를 이겨 가장 꼭대기를 차지하는 단 한 명의 생존자를 가리는 게 게임의 룰이지만 그 한 명에게 관심이 집중되지 않았다. 자꾸 떨어진 다른 사람들이 생각나고 그들이 요리에 담았던 의미와 정성이 떠올랐다.

<흑백요리사>의 대결 구도는 신구 세대의 교체를 자연스럽게 보여주는 역할을 했다. 기성세대를 향한 요즘 세대들의 신나는 반격과 그들의 도전을 즐겁게 받아들이는 기성세대들의 조화가 보기 좋았다. 프로그램만큼이나 현실 세계에서도 세대 간의 관계가 갈등이 아니라 평화로운 연대, 자연스러운 교체로 이어졌으면 싶었다.


느 경연프로그램이 그러하듯 <흑백요리사>도 간간히 개인의 서사를 담았다. 개인의 서사만큼 맛깔난 양념은 없지만 과하지 않아서 좋았다. 사람 사이의 갈등을 드러냈고 그걸 요리를 통해 해소하는 모습도 보여줬다. 부정적 이미지가 쌓였던 사람이 인생 요리를 선보이며 다른 면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도 제공했다. 계급이 무엇이든, 긍정적인 것이든 부정적인 것이든, 맛있는 것이든 맛없는 것이든, 모든 게 한데 버무려져야 음식도 인생도 완성된다는 걸 보여준 것이다.


수저로 계급을 표현하는 세상을 그대로 드러내는 줄 알았지만 실은, 그게 큰 의미 없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우리의 소망을 다독여준 프로그램인 듯하다.


"엄마, 오늘 올라온 최종화 봤어? 나 아직 안 봤으니까 말하지 마~"

숙제를 다한 엄마는 이렇게 리포트까지 제출했다. 아들아! 요즘엔 뭐가 또 핫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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