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라라크루 바스락의 금요 문장 ( 2025.10.24 )
( 라라크루에서는 금요일마다 바스락 작가님이 추천하는 문장으로 나의 문장을 만들어보는 글쓰기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
[오늘의 문장] ☞ <찌그러져도 동그라미입니다> 김창완
누군가의 행복을 빌어주면 상대방은 물론이고
스스로도 행복하게 해주는 건 틀림없는 것 같아요.
대단한 걸 도모하기보다
그저 산책길에 동반자가 돼주는 거,
주머니에 핫팩을 하나 넣어주는 거,
뭐 그런 거지요
행복한 인생, 뭐 별건가요?
[나의 문장]
어떤 이와 함께 길을 걷는다는 건 상대는 물론이고
나에게도 만만한 일이 아닌 것 같다.
상대를 업어주는 것도, 짐을 대신 들어주는 것도 아니며
그저 옆에서 상대의 말을 들어주는 것,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것,
겨우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다 인데도.
동행, 보통 일이 아니다.
[나의 이야기]
친정어머니, 고모와 함께하는 두 번째 여행이었다. 8월 말에 떠났던 첫 번째 여행이 '미국 가족들의 방한을 준비하는 모임'이었다면 이번 여행은 '미국 가족들의 성공적인 방한을 자축하는 모임'이었다. 정 많고 부지런한 고모가 전부 기획, 준비한 모임에 나와 어머니는 기꺼이 참여하고 신나게 즐기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특히 나의 역할은 더 쉬웠다. 운전사 역할을 하며 안전하게 모시면서 이틀 동안 두 분이 사주는 것을 맛있게 먹고 그들의 대화를 열심히 들으며 호응만 해주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도 뭐가 그리 힘들었는지 여행에서 돌아온 다음날 얼굴은 퉁퉁 붓고 기력은 바닥이 났다.
여행 첫날, 고모가 만들어준 하이볼을 마시며 거나하게 취한 우리 셋은 자정이 넘어 잠자리에 누웠다. 여행의 피로도 잊었는지 고모와 어머니는 주거니 받거니 옛날이야기를 이어갔다. 이야기를 하며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어느 대목에서는 깔깔깔 웃기도 하면서.
친정어머니와 고모의 관계는 특별했다. 단순히 시누올케 사이로 규정할 수 없는 역사가 그들에게 있었다. 고모는 초등학교 때 어머니를 암으로 잃었다. 사업실패로 빚에 허덕이는 아버지와 세 명의 장성한 오빠들 사이에서 외롭게 살던 고모가 중학생이 되던 무렵, 큰오빠의 아내가 된 나의 어머니가 새 식구가 됐다.
부잣집 막내딸로 고생을 모르고 살다가 남자 하나 보고 결혼한 어머니에게, 가난은 상상 이상의 것이었다고 한다. 빚과 술로 세월을 보내는 시아버지, 청년이 된 시동생 둘, 사춘기에 접어든 시누이를 감당하기에는 어머니도 어렸다.
"언니, 기억나? 어느 날인가 학교에 가려고 일찍 일어났는데 식구들은 다 자고 있고 도시락을 싸려는데, 밥이 없는 거야. '아, 우리 집은 왜 이렇게 가난할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울면서 집을 나섰어. 집에서 학교까지 40분 넘게 걸어가야 했잖아. 한참을 가고 있는데 언니가 '고모~'하면서 도시락을 들고 뛰어오고 있는 거야. 그게 얼마나 슬펐는지 몰라."
생리대가 없어서 버리려고 모아둔 오빠들의 러닝셔츠를 밑에 대고 살아야 했고 안경을 살 돈이 없어 돌아가신 엄마 묘소에 가서 몇 날 며칠을 울었다는 시절의 이야기였다.
"고모. 그날 내가 늦잠을 잤지 뭐야. 일어나 보니 고모가 학교에 가고 없는 거 있지. 얼른 도시락 싸서 따라갔잖아. 세상에, 얼마나 놀랐는지. 새댁이 늦잠을 자버린 거야 글쎄."
들이닥치는 빚쟁이에 가족들을 다락으로 숨겨야 했던 새댁은 외롭고 서러운 사춘기를 보내는 시누이를 보면서도 도와줄 길이 막막해, 아픔을 보고도 애써 외면해야 했던 시절을 이야기했다.
"쌀이 없던 게 아니라 늦잠 잔 거였어? 어머. 50년 만에 밝혀진 진실인 거야? 하하하"
이제는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는 그 시절의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두 사람은 훨씬 살만해진 오늘에 감사했다. 그 시절의 괴로움을 알턱이 없는 나였지만,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며 가슴이 먹먹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힘들었던 시절, 감당해야 하는 것들이 많았던 그 두 사람이 서로에게 의지가 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 미안함이 오랫동안 둘을 묶어주는 끈이 되기는 했지만, 각자가 경험한 결핍은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것 같았다. 그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서였을까. 매 순간 모두에게 최선을 다하다 보니 그만큼 사람에게 받는 상처가 둘 다 많았다. 그 상처 이야기를 듣는 게 쉽지 않았다. 격하게 혹은 적극적으로 반응하지 못하고, 실없이 웃으며 들어주기만 하는 스스로가 못마땅하기도 했다. 호응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고 부정적인 이야기를 듣다 보니 쉽게 피로해졌다. 하지만 최선을 다해 들어주었다. 그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도 나와의 여행이 마냥 편하지만은 않았음을 안다. "바쁜데 시간 내줘서 고마워.", "자기 이야기는 안 하고 우리 두 사람 이야기를 듣기만 하는 게 뭐 재미있겠어." 라며 내 입장을 헤아려주었다. 잠자리가 불편하지는 않았는지, 운전하느라 힘들지는 않은지를 살폈다.
70대, 60대, 40대의 여자 셋이 함께 떠나는 여행은 독특한 조합만큼이나 분위기도 묘했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여있지만 시누와 올케, 엄마와 딸, 고모와 조카라는 여러 관계가 얽혀있고 각자 삶의 역사, 기억이 다르기 때문에 혼란스럽기도 했다. 세 번째 여행을 기약하며 헤어졌지만 그때는 더 평화롭고 행복한 여행이 될지, 더 예민하고 불편한 여행이 될지 가늠이 안된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럼에도 함께 한 추억 하나가 또 완성됐다는 것이다. 바람 부는 바닷가를 함께 걸었고 전망 좋은 카페에서 여유를 만끽했다. 시장에서 함께 장을 보며 서로 돈을 내겠다고 티격태격 다투었고 대개를 나눠먹으며 소주잔을 기울였다. 호텔방에서 얼굴에 팩을 붙이고 나란히 누워 수다를 떨었고, 누가 코를 골았네 쌕쌕거리며 잘만 자대 하면서 함께 아침을 맞았다.
보통 일이 아닌 1박 2일을 보냈지만, 지나고 보면 보통의 추억, 보통의 행복이었을 동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