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미숙과 성숙의 콜라보

by 늘봄유정

⭕ 라라크루 바스락의 금요 문장 ( 2025.10.31 )

( 라라크루에서는 금요일마다 바스락 작가님이 추천하는 문장으로 나의 문장을 만들어보는 글쓰기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


[오늘의 문장] ☞ <어린이라는 세계> 김소영

언제나 절망이 더 쉽다.

절망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얻을 수 있고,

무엇을 맡겨도 기꺼이 받아준다.

희망은 그 반대다.

갖기로 마음먹은 순간부터 요구하는 것이 많다.

바라는 게 있으면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고,

외면하면 안 된다고,

심지어 절망할 각오도 해야 한다고 우리를 혼낸다.

희망은 늘 절망보다 가차 없다.

그래서 우리를 걷게 한다.



[나의 문장]

당장은 미숙이 편하다.

미숙은 내 마음이 가는 대로 말하고 행동하도록 놔두고,

그런 나를 나무라지 않는다.

성숙은 불편하다.

입이 근질근질 대고 엉덩이가 들썩이는 때부터 나를 도끼눈으로 쳐다본다.

생각하고 말하라고,

진짜 그렇게 할 거냐고,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냐고 내게 질문한다.

성숙은 언제나 미숙보다 냉정하다.

그래서 나를 살게 한다.


[나의 이야기]

3년 전부터 한 학기에 한 학교씩, 돌봄 교실 교육자원봉사를 하고 있다. 고학년 이상의 학생을 대상으로 토론 교육을 하는 내게 초등 1, 2학년을 대상으로 수업을 해달라는 부탁은 고문에 가까웠다. 한글을 쓰지 못하는 아이도 있고 한마디를 하는데 생각을 정리한다며 침을 열 번 이상 삼키며 뜸을 들이는 아이도 있었다. 고학년 수업에서는 1분 1초가 소중할 만큼 40분 수업이 짧은데 돌봄 교실의 40분은 4시간만큼 길었다. 40분씩 4주를 가야 하는 이 수업이 3시간씩 1년을 했던 수업보다 부담이 되었던 이유다.


그렇게 부담이 되는 데도 3년째 하고 있는 이유는 하나다. 교실 문을 닫고 나오는 순간 나를 감싸고 있던 어둠의 장막 같은 게 걷히면서 '어라? 이게 되네? 나쁘지 않은데?' 하는 긍정 회로가 가동하는 것이다. 난감했던 순간을 극복할 방법을 모색하다 보니 회를 거듭할수록 새로운 교안이 떠오르는 것도 또 다른 재미다. 최근에 있었던 수업에서는 한없이 미성숙해진 나를 발견하는, 부끄럽지만 즐거운 기억도 더해졌다.



보통의 돌봄 교실에는 열 명에서 스무 명 정도의 학생들이 있다. 방과 후 수업에 가는 학생들 때문에 변동이 있기는 하지만 팀을 나누어 토론 수업을 진행하는 데 큰 무리가 없다. 그런데 최근에 갔던 학교는 달랑 세 명이 전부였다. 홀수라서 팀을 나누는 일도 어려웠지만 소수라서 한 명 한 명의 요구사항이 더 크게 느껴지는 것도 문제였다.


토론을 하기 전에 하는 활동이 있다. 주어진 질문에 이유를 들어 자기 생각을 표현하는 활동이다. 여러 개의 질문지 중에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 간단하게 글을 쓰고 발표하는 것인데, 질문지의 색깔이 문제였다. 내 딴에는 저학년이니 흰색 A4 용지보다 색지에 출력해 가는 게 어울린다고 생각한 것인데, 그게 문제의 발단이 된 것이다. "키우고 싶은 반려동물은 무엇인가요? 이유와 함께 이야기해 주세요."라는 질문을 두 명의 학생이 동시에 원했다. 질문만 같은 것을 원한 게 아니라 질문지의 색상도 똑같이 하늘색을 원했다. 가위바위보로 이긴 사람이 가져가는 것으로 정했지만, 진 학생의 상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갑자기 시무룩해지더니 쥐고 있던 연필을 놓고 고개를 푹 숙이는 것이 아닌가.


"왜 그래요? 하늘색 종이가 아니어서 그래요? 여기 다른 색상의 종이에다 하면 안 될까요? 질문은 똑같은데?"

아이는 슬픈 표정으로 나를 보며 힘없이 말했다.

"하늘색이 저한테 얼마나 1순위인지 모르셔서 그래요. 전 하늘색만 좋아한다구요."


'제일 좋아하는'이라는 말보다 '1순위'라는 표현이 더 강하고 명확하게 다가왔다.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될 수 없다는 말이 아닌가.

"아직도 35분이나 남았는데 아무것도 안 하고 있을 거예요?"라는 내 질문에 아이는 고개를 힘없이 끄덕였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았다.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나. 35분 동안 이 아이를 방치할 수는 없었다. 다행히, 만일을 위해 준비한 다른 활동이 있었다. 시간이 남거나 오늘과 같은 돌발 상황을 대비해 어떤 수업에서든 플랜 B는 필수다.

"우리 이 활동은 다음 주에 다시 합시다. 선생님이 다음 주에 원하는 색으로 프린트해 와서 다시 하는 걸로 해요. 오늘은 다 같이 할 수 있는 다른 활동을 해요."


여기까지만 말해야 했다. 그런데 갑자기 내 안의 작디작은 내가 고개를 내밀며 한마디를 거들었다.

"선생님이 잘못했네. 그냥 모든 종이를 흰색 종이로 준비해야 했는데 괜히 예쁘게 한다고 색지에 출력해 온 내 잘못이네."

말하면서도 얼마나 유치한지 알았지만, 기어이 말해야 속이 시원해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준비한 대로 진행하지 못하게 되어서 섭섭했다는 말은 너무 세련되다. '흥!칫!뿡! 그깟 하늘색이 뭐라고?'라는 쪼잔한 마음이 진짜다.


이후로도 나의 유치함은 이어졌다. 빼빼로 데이는 외국에서 만든 날이니 가래떡 데이를 더 챙겨야 한다는 아이의 말에, "아니에요. 빼빼로 데이도 우리나라에서 만든 거예요."라며 냉정하게 반박했다. 마음속에서는 '아니거든~ 그거 우리나라에서 만든 거거든? 알지도 못하면서~, 싫은데~ 아닌데~ 얼마 줄 건데~'같은 말이 둥둥 떠다녔다.


따로 준비했던 활동을 마치고 교실 문을 나서며, 부끄러움은 온전히 내 몫이 되어 나를 덮쳤다. 유치하기 이를 데 없고 한없이 쩨쩨했던 40분을 인생에서 도려내고 싶었다.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더 몸서리쳤다. 함께 있었던 돌봄 선생님이 어떤 생각을 하셨을지, 아이들에게는 어떻게 비쳤을지를 생각하느라 집에 어떻게 왔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만회하는 길은 다음 수업을 더 즐겁고 인상적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이슈는 이슈로 덮으라고 했던가. 안 좋은 기억은 훨씬 더 좋은 기억으로 덮어버려야 했다. 그 기억이 공통의 것이든 나만의 것이든 상관없었다. 내 머릿속에 남은 유치하고 미숙한 나에 대한 기억은 훨씬 성숙하고 겸손한 나만이 몰아낼 수 있었다.


아이들이 원했던 색상으로 질문지를 잔뜩 뽑았다. 일주일 동안 머리를 쉼 없이 돌려 토론을 게임으로 즐길 방법을 고안해 냈다. 돌봄 수업에는 PPT를 준비한 적이 없었는데 노트북으로 보여줄 PPT까지 만들었다. 교구부터 노트북까지 빠짐없이 챙겼는지를 여러 번 확인한 후, 심호흡을 내쉬며 교실에 들어갔다.


"선생님~~~~~"

아이들이 밝은 얼굴로 내게 달려왔다.

"아직 수업 시작 전까지 5분이나 남았는데 아이들이 선생님 언제 오시냐며 엄청 기다리네요~"

돌봄 선생님이 환하게 반겨주셨다. 지난 시간의 수치스러웠던 기억은 나만의 것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용히 안도했다.


'1순위'였던 하늘색 질문지를 받아 든 아이는 "'쿼'는 어떻게 써요?", "'푹'은 어떻게 써요?"라고 물어가며 서툰 한글로 자기 생각을 가득 써 내려갔다. 이어진 게임 활동에서 아이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주어진 40분이 끝나자 "벌써요? 아, 왜요~~~"하며, 마지막 남은 다음 주 수업을 기대하며 돌아갔다. 플랜 B를 꺼낼 필요 없이 즐겁고 알찼던 40분으로 기억을 채웠다.


'돌봄 수업은 올해만 하고 끝내야지, 저학년 대상으로 토론은 안 되겠어'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고 다녔다. 그런 생각으로 수업을 하는 내 마음에는 유치하고 미숙한 것들이 자라나고 있었다. 미처 그것을 헤아리지 못하다가 클 대로 커버려 수면 위로 드러난 내 무의식은 참 볼품없고 창피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나는 나의 그런 모습마저 껴안기로 했다. 미숙한 나도 나고, 그런 나를 응시하고 용서하고 더 나은 모습으로 채워주는 성숙한 나도 나였다.


* 덧 : 하늘색 질문지를 받은 아이가 말했다. "이 하늘색은 지난주에 보여주셨던 하늘색보다 쪼끔 더 진한 색인데요?"

미숙한 나는 거짓말을 했다. "지난주에 준 거는 오래된 거라 색이 발해서 그랬나 보다."



#라라크루

#라이트라이팅

#금요문장공부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달려라! 낭만 봉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