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라라크루 화요일엔 샛길독서 : 어린 왕자 4
( 라라크루에서는 화요일마다 윤병임 작가님이 독서의 샛길을 안내합니다. 함께 읽고 생각하여 글로 남기는 작업입니다.)
그 가련한 속임수 뒤에 애정이 숨어 있는 걸 알아차려야 했어요. 꽃들은 아주 변덕스러워요! 하지만 난 너무 어려서 꽃을 사랑할 줄 몰랐던 거예요.
(어린왕자, 8장)
I ought to have guessed all the affection that lay behind her poor little stratagems(책략, 술수).
원활한 소통을 위해서는 인간 내면의 결핍과 욕망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는데, 인간은 내 안의 결핍과 욕망이 무엇인지도 모를뿐더러 상대의 그것들도 파악하기 힘들다. 대화로 알아보려 애쓰지만, 문제는 언어가 우리의 결핍과 욕망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두 사람이 모두 '사랑'이라는 단어를 말한다 해도 각자 경험하고 생각하여 정의 내린 '사랑'은 다르다. 그러니 소통은 불완전하고 어긋날 수밖에 없다. 언어로는 서로의 욕망을 제대로 전달할 수 없어서 대화는 늘 오해를 낳는다. 사람 사이에 완벽한 소통이라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다.
<어린 왕자>에서 꽃은 '완벽한 아름다움'으로 보였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서 피기 전부터 세심하고 충실한 몸단장을 한다. 꽃에게는 아름다움을 통해 인정받고 보호받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스스로를 온전히 지킬 수 있는 능력이 부족했던 것, 그게 꽃의 결핍이었고 거기에서 욕망이 출발했다. 하지만 꽃의 말과 행동은 결핍과 욕망을 충실히 전달하지 못했다. 까탈스럽고 허영심 가득하며 오만하기 그지없었다. 그런 말과 행동으로 어린 왕자의 관심과 보호를 이끌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어린 왕자는 결국 떠나버리고 말았다.
어린 왕자에게는 어떤 결핍과 욕망이 있었을까. 어린 왕자에게는 꽃의 말에 귀 기울이고 끊임없이 무언가를 주고 싶어 하는 욕망이 있었고 거기에는 '내가 누구를 위해 무엇을 하고 싶은 존재인지를 모른다'는 결핍이 있었다. 어린 왕자는 나름의 방식으로 꽃에게 헌신했지만 꽃의 날카로운 말 뒤에 놓인 꽃의 진정한 욕망을 알아채지는 못했다. 꽃의 욕망을 알아채지 못했으니 자신의 욕망도 제대로 채우지 못했다. 어린 왕자의 눈을 가린 것은 꽃을 향한 기대였다. 소박한 다른 싹들과는 달랐던 그 싹이 새로운 종류의 바오밥나무일지도 모른다는 기대, 어떤 기적 같은 것이 돼줄 것이라는 기대 말이다. 자신의 기대에 못 미치는 꽃을 보며 어린 왕자는 좌절했고 꽃을 떠났다.
별을 여행하던 어린 왕자는 뒤늦은 후회를 한다. 꽃의 말에 귀 기울이지 말걸, 향기와 환한 빛으로 가득했던 꽃을 있는 그대로 받아줄걸. 가련한 꾀 뒤에 애정이 숨어 있다는 것을 눈치챌걸··· 나의 결핍으로 상대에게 너무 많은 기대를 하는 순간, 상대의 욕망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오해만 쌓인다는 것을 어린 왕자는 깨닫는다. 그 깨달음 끝에는 꽃과의 새로운 관계 맺음이 있다. 어린 왕자에게 꽃은 그의 근원적 결핍과 욕망을 깨닫게 해주는 존재가 되었다.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은 "사람들이 대화가 가능한 것은 서로에게 오해가 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오해는 대화의 단절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대화를 이어가게 하는 동력이 된다는 것이다. 오해 안에서 우리는 자신의 욕망을 파악하게 되고 상대의 욕망에 대해 다시 궁금해한다. 이것이 또 다른 질문을 낳고 새로운 관계를 설정하게 된다. 그것이 또 다른 오해를 일으키겠지만, 그게 대화다. 끝없는 오해, 욕망의 발견은 지속적인 대화와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어린 왕자다. 지구별에서 수많은 사람을 만나는 여행자이자 시행착오를 반복하며 스스로가 모순된 존재임을 깨달아가는 구도자다. 때로는 인간관계 때문에 지치고 힘들지만, 나를 깊이 있게 알아가기 위한 불가피한 과정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면 조금은 편안하게 그 여정을 즐길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