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라라크루 바스락의 금요 문장 ( 2025.12.05 )
( 라라크루에서는 금요일마다 바스락 작가님이 추천하는 문장으로 나의 문장을 만들어보는 글쓰기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
[오늘의 문장] ☞ <생에 감사해> 김혜자
낙타들이 짐을 싣기 위해 일렬로 무릎을 꿇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주인이 짐을 하나씩 다 실어줍니다 낙타는 무겁다. 힘들다 불평하지 않습니다 주인이 나에게 적당한 짐을 실어준다는 것을 믿습니다 나는 신이 나에게 시련을 주실 때도 있지만, 나에게 꼭 필요한 것을 주신다고 믿습니다 간혹 내가 너무 느슨하게 있으면 내 정신을 깨우는 일을 주십니다.
[나의 문장]
차량들이 다리를 건너기 위해 숨죽인 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한 시간 동안 1m도 움직이지 못했지만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습니다. 오늘 안에는 집에 갈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믿음만 있었습니다. 살다 보면 말도 안 되는 것들이 길을 막을 때도 있지만, 이 또한 쓸모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너무나도 당연했던 것들이 실은 굉장한 일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나의 이야기]
폭설은 충분히 예측 가능한 일이었다. 며칠 전부터 호들갑에 가까운 예보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나는 당당하게 차를 끌고 길을 나섰다. 대중교통으로 오가는 길이 길고 번거로울뿐더러, 예보에 맞춰 모든 방지책이 마련되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정을 마치고 차에 시동을 걸었을 때까지만 해도, 내비게이션이 예상하는 도착 시간이 평소보다 30여 분정도 더 걸린다고 알려줬을 때만 해도, 청담대교를 몇백 미터 앞에 두고 수백 대의 차량이 멈춰있는 장면을 봤을 때까지도, 내비게이션이 여전히 분당수서로를 고집하고 있을 때만 해도, 믿었다. 이 길 위에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집에 갈 수 있다고 말이다.
같은 자리에서 한 시간을 기다린 끝에 교통정보센터의 CCTV를 확인했다. 지도 위에서 길을 따라 설치된 CCTV 화면을 하나하나 열여 가며 따라가다 보니, 얼어붙은 노면 앞에서 차량을 통제하는 교통경찰, 제설 차량, 그 뒤로 대기 중인 차량들이 보였다. 제설이 언제 어느 지점까지 이어질지, 오늘 밤 안으로 가능하기는 할지를 예측할 수 없었다. 내비게이션은커녕 그 앞에 서 있는 사람들도 알 수 없을 것 같았다.
결정을 내려야 했다. 그저 지금 있는 여기가 최선이라 믿으며 기다려야 할지, 미끄러운 도로에서 겹겹이 쌓인 차들을 해치고 1차선에서 5차선으로 넘어가 무작정 다른 길로 들어서야 할지. 나는 후자를 택했다. 서 있기보다는 움직이기를, 기다리기보다는 찾아 나서기를 선택했다. 다행히 나처럼 이탈하는 차들이 더러 있어 차선 변경이 불가능하지 않았고, 차를 움직이자 내비게이션도 대안 경로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제설이 제대로 되어있지 않았고 심지어 얼어붙어 미끄럽기까지 한 낯선 도로를 따라갔다. 그냥 서 있는 게 나았으려나 싶을 만큼 아슬아슬하고 위태로운 운행이었다. 그럼에도, 점점 줄어드는 도착시간이 희망이었고 옆에서 함께 엉금거리는 이들이 위안이었다.
평소 한 시간 걸릴 거리를 세 시간 걸려 새벽 한 시가 되어서야 집에 도착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정도면 꽤 성공적인 귀가였다. 버스에 갇힌 채 아홉 시간 만에 귀가했다는 사람, 도로 위에 차를 버리고 걸어서 귀가했다는 사람, 결국 집에 가지 못했다는 사람 등 전쟁 같은 밤을 보낸 이들의 성토가 이어졌다. 폭설 앞에서 실종된 행정력은 시민들의 귀갓길을 책임져주지 못했다. '안전한' 귀갓길이 아니라 그저 '귀가'조차 불가능한 일이 될 뻔한 것이다.
평범한 귀가 같은 일상을 너무 당연하게 누리고 살았다. 중요한 강의를 앞두고는 플랜 B, C까지 준비해야 안심하고 길을 나서는데, 매일 일어나는 일들에는 별다른 대비를 하지 않았다. 불확실성, 예측불가능이 기본값인 오늘을 살면서 모든 일에 확신을 갖고 살아온 것은 아닌지, 굉장한 일을 별거 아닌 일로 치부했던 건 아닌지 되돌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