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횡단보도를 건너 자동차들이 달리는 방향과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시린 기운이 뒤쪽에서 머리카락을 헤집고 들어와 볼로 스며들었다. 그녀는 이따금씩 지나가는 차가 빠르다고 느꼈고 그만큼 자신의 걸음은 너무 더딘 것일까 하고 생각했다.
차 속의 사람들은 꼭 도착해야 하는 시점을 향해 재촉하며 달리는 듯 보였다. 하지만 그녀에게 그런 것은 의미가 없었다. 남들이 뛴다고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앞에 놓여 있는 아무 길로나 뛰어들어서는 안 된다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 시간의 재촉에 넘어가면 안 된다고 생각하며 마치 자신이 앞서가는 시간을 잡아 끌어당기고 있는 상상을 했다.
그래도 웅크리게 되는 몸을 생각하면 그녀의 마음은 급했다. 반 시간쯤 지나면 저렇게 졸린 눈을 힘겹게 뜨고 있는 해도 사람들 몰래 슬쩍 산을 넘어갈 것이었다. 그녀에게 무섭게 다가서는 바람을 녹여주는 건 희미하게 남은 햇살 밖에는 없었다. 그녀의 마음은 바람 따라 휘휘 내달렸다.
- 여기 있어. 가져가.
- 난 더 많이 모았는데?
- 어디 봐봐.
멀리서 아이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등껍질 속으로 고개를 집어넣은 바다거북이처럼 외투 속에 얼굴 반쯤을 파묻고 걷던 그녀는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봤다. 서너 명의 아이들이 바닥에 쭈그려 앉아 손에는 무언가를 들고 열심히 이야기하고 있었다. 손안에 든 건 소꿉놀이 그릇이었는데 아이들의 손은 땅바닥과 그릇을 연신 오고 갔다. 아이들은 서로의 그릇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스쳐 지나가려다가 아이들이 바닥에서 긁어모으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갈색 실 같은 것들이 부서져 있었는데 아이들은 이걸 떠서 그릇에 담고 톡톡 두드려 더 잘게 부수고 있었다. 그러면서 내가 많네, 나눠 줄까 하며 사이좋은 말들을 했다.
그녀는 아이들이 갖고 노는지 뭔지 한눈에 알 수가 없었다. 얼마쯤 바라보고 있었을 때 한 아이가 그녀에게로 얼굴을 돌려 이상하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 왜 그러세요?
- 아.. 너희가 뭐 하는 건지 궁금해서 보고 있는 중이야.
그러자 나머지 두 아이도 그녀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 미숫가루 만들고 있어요.
- 미숫가루?
- 네. 여기 기다랗게 생긴 걸 이렇게 담고 두드리면 가루가 돼요.
- 그렇구나.. 그런데 그거 만들어서 뭐 할 건데?
- 미숫가루니까 먹을 거예요. 미숫가루 갈색이잖아요. 아, 그런데 진짜로는 안 먹어요.
- 그렇구나.
아이들 옆에 놓인 큰 그릇, 그러니까 아이들 눈으로 바라봤을 때 쟁반으로 쓰일 것 같은 나무 잎사귀에는 그 ‘미숫가루’가 한 줌 가득 담겨 있었다. 아이들은 말을 마치고는 동시에 자기들이 하던 중요한 일에 다시 몰두하기 시작했다. 갈색 실을 주워 담아 톡톡톡.
그런데 이 갈색 실 같은 것들은 뭐지? 그녀는 궁금했다. 그녀는 아이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가까이에서 그걸 살펴봤다. 길이가 손가락만 한 것도 있었지만 대개 잘게 부서져있었다. 가루처럼 곱게 빻아지기도 했다. 한참을 바라보다가 그녀는 그것들이 솔잎이라는 걸 깨달았다. 짙푸른 초록색으로 들뜬 한여름 열기를 식혀주던 서늘한 잎들이었다. 그렇게 청청하던 것들이 이토록 색이 바랜 상태로 바닥을 뒹굴다가 으스러진 것을 보니 안쓰러웠다.
그녀는 아이들에게 재밌게 놀아, 라고 말하고 일어나 다시 걷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여전히 자기들의 놀이에 빠져있었으므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는 몇 걸음 안 가서 아파트 사이사이에서 구불구불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소나무 정원수를 봤다.
저토록 대쪽같이 푸르른데. 힘 있게 뻗어 바람을 타고 퉁퉁 튕기는 것 같았다. 손가락을 그 끝에 대자 따끔했다. 좀 전에 아이들 앞에서 힘없이 뒹구는 갈색 잎과 같은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이런 게 시간의 힘인가, 인생인가. 그녀는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것, 이를테면 시간이라든가 운명 같은 것에까지 생각이 다다르자 잠시 멍해졌다.
변해가는 모든 것들에서 덧없음과 허무의 그림자를 찾는 자신의 고질적인 면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녀는 이런 생각 덕분에 자신이 감정대로 막 살아오지는 않은 것 또한 알고 있었다. 어쩌면 이런 순간에 문득 날아드는 인생의 메시지를 그렇구나 하고 그저 받아들이면 된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나 또한 빛이 바래고 있겠지. 하지만 갈색 잎이 되어도 누군가의 손에 담겨 사랑스러운 눈길을 받을 수도 있겠지. 그녀는 알 수 없는 곳에 희망이 한 줌 심어지는 걸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