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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ri Taeeun Kim Jan 04. 2024

“손, 아이들, 양육” 인간과 동물 경계 사라지나

더리포트 독점기고

다년간의 기사 생산 종사자로서 매번 뉴스를 들으면서 머릿속은 무의식중 ‘데스킹’(기사 검토)을 하고 있다. 요즘 동물 관련 뉴스를 보다 보면 걸리적거리는 게 한둘이 아니다.      


3일 방송된 SBS뉴스는 “맏이 푸바오에 이어 두 번째 육아에 나선 엄마 아이바도오 능숙하게 아이들을 돌보고 있습니다”고 리포팅한다. 판다 열풍이 인기 뉴스거리이긴 한데 ‘육아’까지는 그럭저럭 넘어가도 ‘아이들’이라는 용어를 쓰는 것은 낯설다. 어린 짐승은 ‘새끼‘라고 쓰는 것이 올바른 국어 사용법으로 알고 있다.      

앞서 지난달 26일 KBS뉴스는 “야무진 손으로 대나무 잎을 모아 먹는 푸바오 아빠 러바오까지, 에버랜드에서 사육 중인 세계 멸종취약종 자이언트 판다 가족입니다”고 보도했다. 인간만 ‘손’을 가지고 있기에 네발 달린 동물들에게는 ‘앞발’을 쓰는 게 역시 사전적 정의다. 요즘 기자들에게 그런 규범은 중요하지 않나 보다. 너무나 인간적 분류인 ‘가족’이란 말까지는 허용해도 동물에게는 낮추어 ‘아비, 어미’라고 쓰기 마련이었는데, ‘아빠’라는 단어가 나왔다.  

    

다음날 KBS뉴스는 또 “4년간 키운 반려동물을 하루아침에 잃은 양육자는 해당 미용사를 경찰에 고소했습니다”며 ‘견주’를 ‘양육자’라 칭했다. 올해 들어 동물병원 진료비 관련 보도를 하면서도 모두 ‘양육자’라는 표현을 썼다. ‘양육’의 뜻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아이를 보살펴서 자라게 함’이라고 하는데, 새끼를 ‘어린 사람’에게 써온 아이라고 표현하는 마당에 ‘양육’이 안될 건 없다.     

 

‘동물권’의 시대다. 인류는 오랫동안 인간만이 권리를 가졌다고 여겨왔지만, 이젠 종의 경계를 넘어 차별 없이 동물도 인권과 같은 생명권을 가지고 있다는 동물해방에 대한 인식이 널리 펴지고 있다. 짐승이 인간보다 열등하다는 관념 자체를 뒤엎고 동물도 인간에 비견하는 지각과 감각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2000년대 들어 ‘애완동물(pet)’대신 ‘반려동물(companion animal)’이라는 용어를 쓰자는 운동이 국내에서도 일어났고, 2010년대 반려인 1000만 시대를 맞았다. 개나 고양이 등을 집안에서 기르고 이들과 교감하며 자연스럽게 가족과 같은 감정을 느끼게 됐다. 우리보다 앞서 서구적 반려동물문화를 받아들인 일본인이 가족 소개를 하며 ‘마지막 1/2은 개’라며 반려견을 포함하는 모습이 신기했던 것이 1990년대였다. 그나마 개를 사람의 반 몫으로 친 것이다.      


가축이라 부려지던 동물이 ‘우리집 막내’나 ‘아기’라고 불리며 인간무리의 일원으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암컷, 수컷으로 나누던 동물을 딸, 아들로 부르자, 분양하는 펫숍에서도 고객의 니즈에 맞춰 ‘여아’, ‘남아’라고 지칭하는 것이 일반화됐다. 1인가구와 자녀를 낳지 않는 부부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며 아이 대신 반려동물을 키우며, 아이에게 갖는 애정을 퍼붓는 일도 드물지 않다. ‘강아지 친자설’이라며 자식보다 개가 자신을 닮았다고 우기는 글들이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도 호응을 얻는 일이 다반사다.      


나 역시 집에서는 키우는 개를 “이쁜 우리 애기야”라고 부르고, 펫로스증후군에 펑펑 우는 반려인이다. 하지만 새로운 반려견을 들여 슬픔을 극복할 수 있냐는 질문에 “49재도 안 지난 지금은 애도기간인데 그럴 수 있느냐”, “‘새 개’나 ‘개값’이라는 단어를 쓰다니 사이코패스 아니냐”는 질타를 받고는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다. “사지 말고 입양하세요”라는 슬로건은 잘 알고 있지만 ‘입양’이라는 단어에서 아직까지는 사람 아이를 들인다는 연상이 먼저 된다.   

   

독자들의 수요에 맞춰 각 언론들은 ‘동물복지전문기자’, ‘동물문화전문기자’ 같은 특화된 분야를 취재하는 배정도 하고 있다. 반려동물 전문매체도 폭발적 증가추세다. 여전히 중립적 단어를 쓰고 국립국어원에서 지정한 대로의 표기를 따르는 훈련을 받은 신문기자들과 달리, 인터넷매체들에서는 성견까지 ‘강아지’로 쓰는 등 일반에 통용되는 말들을 그냥 갖다 쓰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이런 가운데 방송기자들이 동물 관련 표현들에 인간의 언어를 단 것은 실수이건, 고의이건 의식의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 지면보다는 동영상이나 인터넷매체의 접근성이 훨씬 높아지며 일방적 보도를 떠나 시청자들과의 상호작용이 빈번해진 시대다. 자신들의 정서에 반하면 득달같이 달려드는 악플세례를 받자니 네티즌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그래도 인간보다는 낮춤말을 동물에게 사용하도록 배워온 기성세대에게는 이런 세태가 놀랍기만 하다.      

언어는 사용자들의 선택에 따라 생물처럼 신조, 진화, 사멸을 거친다. 동물에게, 아니 인간의 사랑과 주목을 받는 일부 종들에게 인간과 동등한 언어를 쓰는 것이 대세가 되면 사전도 바뀔 것이다. 저출생으로 완구산업이 위축되고 있는데 반해 반려동물 관련 사업은 더욱 성황이다. 수명이 인간보다 훨씬 짧기에 이들 장례산업은 블루오션으로 각광받고 있다. 동물학대나 유기도 비례해 늘어나고, 죄책감을 돈으로 메워주는 파양사업까지 등장했다. ‘큰 돈’이 오가는 일들이 반려동물에게 좋은 일인지, 주인의 욕구에 더 충실한 일인지 따지려 들다가는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르겠다. 글을 다뤄 먹고 사는 사람으로서 태세 전환이 더욱 빨라야 하는 것인지가 가장 큰 고민이다.
 

김태은 작가 (erikim021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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