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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ri Taeeun Kim Jan 22. 2024

뇌피셜 ‘73년생 한동훈’, 당사자에게 득일까

더리포트 독점기고

베스트셀러에 올랐다는 정치평론서 ‘73년생 한동훈’. 한동훈이라는 정치신인이 워낙 스포트라이트를 받고있는데다가, 명문여대 나온 유학파, 미모의 교수라는 저자 심규진의 스타성에 동세대에 쓸만한 여성 정치 논객이 탄생하는가 싶어 기대감에 책을 펼쳤다. ‘국내 최초 한동훈 분석서’라는 요란한 어구를 표지에 단 이 책이 아직 정치적 행보랄 것을 보인 것이 없는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에 대한 적절한 안내서가 될 것인지에 관심이 컸다. 하지만 ‘척 보면 압니다’ 식의 ‘뇌피셜’에, “한동훈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는 것이 이 책이 내세울 수 있는 유일한 팩트다.      


불과 3개월 만에 쓰여졌다는 이 책은 한탕 ‘제목장사’라는 혐의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했다. 고사상태에서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는 출판계의 최신 경향까지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랄까, 출판 전부터 띠지도 아닌 표지에 ‘언론, 유튜브 및 정치 블로그 화제의 도서’라는 희망사항을 사실인 양 인쇄한 책에서 어떤 기대를 바란 것이 어불성설이기는 했다. 졸속기획, 함량미달, 팬덤장사라는 수준 이하의 국내 정치, 정치인 관련 서적의 전철을 그대로 밟고 있었다. 저자가 괴물 같은 필력을 지닌 천재라도 되지 않는 이상, 짧은 기간 한 권의 책을 쓴다는 것은 이런저런 피상적인 이야기들을 모으는 수준에 그칠 수밖에 없다. 통찰이나 서사구축은 기대난망, 뒤로 갈수록 에세이조차 되기 힘든 메모들로 채워졌다. 실명을 밝힐 수도 없는 내가 아는 사람, 내가 만난 사람이 그렇더라(지인피셜)에, 개인적 인상(본인피셜)을 짧게 나열하는데 그쳤다. 사람에 대한 평가도 모두 어설픈 심리학을 동원한 사변적 인상비평에 불과한 것도 크나큰 단점이다.      


쓴 이가 마케팅 전공이라니 많이 팔리기만 한다면 비판여론도 노이즈마케팅이라 반겨할지는 모르겠다. 이런저런 말을 많이 하다 보면 맞는 말도 나오기 마련이니 책 전반에 공감할 만한 얘기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책의 대부분이 알만한 역사적 인물을 끌어다가 끼워맞추기식 비유를 하거나 역사적 사례 하나를 주장의 근거로 침소봉대하는 것 같이, 이미 인터넷 커뮤니티, 유튜브 등을 통해 전문가가 아니라도 할 수 있는 정도의 얘기들의 재생산에 불과했다. 1차원적 대비, 시대적 배경이나 가치관을 고려하지 못한 단순 해석, 이미 일생의 공과가 모두 드러난 인물에 대한 평면적 접근…. 식자의 시대가 지나고, 인터넷과 동영상으로 인해 다시금 도래한 구전의 시대에 걸맞는 수준의 선악대비 구성, 조각조각 난 ‘팬픽’이랄까.      


무엇보다 명예훼손이라해도 무방한 인신공격을 적나라하게 글로 남길 수 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거짓과 마타도어가 난무하는 시끄러운 유튜브채널은 정서상 참고 볼 수 없기에, 온라인 정치판은 이런 식의 아사리판이 된 지 오래인데 나만 트렌드를 못 따라가고 있는 것인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이 책이 작가의 이름 알리기에는 득이 될지언정, 과연 한동훈에게는 도움이 될지조차 의문이다. 사회적·정치적 야심이 없다면 학자적 지성과 양심으로는 쓸 수 없는 책이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실상 한동훈 자체는 이런저런 수식언이 필요없는 독보적 정체성을 갖추고 있다. 자신의 능력을 정치계에서 어떻게 풀어나갈 수 있는지만이 스스로에게 주어진 숙제다. 때문에 이 책에 이러저러하게 이름을 얹고 있는 이들은 다들 자신의 야망에 눈멀어 있다고 밖에 보이지 않는다. 심규진이 멘토로 꼽고 있는 서민 단대 교수는 페미니즘사상에 대한 이해없이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다가 변절하기도 하는 등 표피적, 시류편승적 재미로 사는 사람이다. 추천사를 쓴 오진영 작가는 의붓아들을 키운 이야기를 책으로 내더니, 이제는 ‘노동자 아들’을 내세워 ‘아들 가진 엄마’ 유세를 할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다들 윤석열, 한동훈과 ‘서울대’ 동문이기는 하다. 보수의 스피커 노릇을 하면서 유명세도 누리고 돈도 벌고 권력의 맛도 좀 보고 싶은가보다.      


어차피 정치적 성향이라는 것이 나고 자란 배경과 완전히 동떨어질 수는 없다. 작가가 말하는 ‘능력주의’는 ‘출신적 한계’를 지닌 소수자는 얼씬도 하지 말라는 것인데, 스스로를 ‘명예 귀족남성’ 정도로 여기고 있는걸까. 그가 말하는 능력주의는 ‘조선시대 과거시험에 기반한 관료제’라는 것인데, 극소수 양반, 그것도 남자에게만 가능했던 제도인데다가 음서제가 문벌을 만들었다는 건 상식의 문제 아닌가. 흙수저들, 개인적 성장사에서 결핍을 지닌 대다수의 사람들까지 단체로 모독하고 있다. 대중적 확장성이 사랑받는 정치인의 전제조건인데,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식의 설득력 없는 장황하고 편파적인 갖다붙이기, 계급나누기식 이중잣대를 초장부터 들이대는 것 본인의 차별주의적 인식의 발현일 뿐이다. 이런 식이라면 한동훈에게 막연한 호감을 지녔던 이들까지 본격 시작도 전에 등을 돌릴 판이다.      


가장 악랄했던 지점은 가수 김윤아에 대한 비난이다. 쇼를 업으로하는 연예인이 자기가 보기에 허황된 콘서트 좀 벌였다고 해서, 권위적이고 폭력적인 너의 아버지를 닮았다고 인신공격하는 것은 도를 지나쳤다. TV에 나와 아버지의 폭력과 학대를 고백한 것을 근거로 삼아 이런 식의 사이비적 심리분석을 하는 것은 “부모는 들먹이지 말자”는 모든 인간관계에서 최소한의 룰도 안 지키겠다는 반칙이다. 인간적 약점과 개인적 고통을 작품으로 승화시키며 수많은 팬들에게 감동과 재미를 주는 이들을 우리는 예술가라고 존중한다. 기자들은 대개 정치판이 연예판과 비슷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파악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정치인과 연예인의 역할과 위상을 동일선상에 놓지는 않는다. 서태지 세대의 퇴행과 진화라며 ‘74년생 김윤아’와 ‘73년생 한동훈’을 나란히 놓고 비교한 것은, 외려 한동훈이 기분 나쁠 일 아닌가 싶다. 작가 혼자 스스로를 한동훈과 같은 편이라고 상정하고, 상처하나 없는 순결한 영혼이라 위인화하고픈 것 같다. 서태지를 코드로 문화적 취향을 밝힌 한동훈을 잘못 짚어도 한참 잘못 짚은 것이다.      


제발 작가가 저널리즘을 팔지만은 말았으면 좋겠다. 포털사이트 다음이 뉴스로 유입되는 이용자들을 잡기 위해 몇 해간 ‘미디어다음’을 꾸려 대응에 나섰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언론사로 인식될 만한 것은 아니었다고 기억한다. 누구나 공개적 글을 쓸 수 있는 시대에 언론이 뭐 대단한 것도 아니지만, 최소 이런 식으로 글을 쓰도록 훈련받지는 않는다. 주류 엘리트가 되기 위해 용쓰는 삶을 살았지만 양식과 소견의 부족으로 그런 대접을 받기는 좀 어려울 것 같다. 진중권, 강준만 정도로 죽기 살기로 글만 쓰고 정치적 특혜는 보지 않겠다는 결기 정도는 있어야 ‘논객’이다. 그리고 ‘똘아이’가 아니라 ‘또라이’가 표준어다. ‘에니메이션’ ‘메니지먼트’가 아니라 ‘애니메이션’ ‘매니지먼트’, ‘샐럽’이 아니라 ‘셀럽’이 외래어표기법에 맞는다.      

     

김태은 작가 erikim021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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