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와 함께 한 핀란드, 노르웨이 오로라 여행
토요일인 어제저녁 비행기로 헬싱키에서 노르웨이의 북쪽 도시 트롬쇠로 이동했다. 헬싱키에서 트롬쇠로 가려면 보통은 오슬로를 경유해야 하지만, 핀에어에서는 겨울 동안 헬싱키에서 트롬쇠로 가는 직항을 일주일에 한 번 운항한다. 가이드 책에서는 트롬쇠가 북극의 파리라고도 불리는 아름다운 도시라고 했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는 하늘 아래 풍경은 점점 거칠어졌다. 노르웨이의 피오르드와 가파른 산, 눈 덮인 호수만이 하얗게 빛났다. 차가운 바람이 한껏 밀려드는 듯해 나도 모르게 숨을 훅, 들이마셨다.
평지와 숲의 나라 핀란드가 섬세하고 아기자기하다면, 노르웨이는 장대하고 웅장했다. 설산과 바다의 나라인 이곳 사람들은 장엄한 바다를 항해하는 바이킹의 민족인 탓인지 장대하고 날 선 이목구비로 이방인을 잔뜩 움츠러들게 했다 핀란드의 섬세하고 체구가 작은 사람들과는 옆 나라인데도 사뭇 달랐다 하지만 하늘에서 본 풍광과는 달리 트롬쇠는 말 그대로 동화 속 크리스마스 마을처럼 아름다웠다. 공항에서 채 30분도 걸리지 않는 시내로 들어서자 온갖 크리스마스 장식이 거리를 반짝반짝 메우고 있었다. 이미 어두운 밤이었고, 우리는 호텔 근처 중국인이 운영하는, 일식인지 중식인지 동남아풍인지 알 수 없는 아시아 식당에서 저녁을 먹은 후 이내 긴긴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날, 잠시 동안만 비치는 햇빛이 반가워 서둘러 항구 맞은편에 보이는 산으로 가기 위해 길을 나섰다. 항구에는 러시아나 핀란드로 향하는 거대한 유람선과, 근처 바다로 나가는 작은 요트와 배들이 정박해 있었다. 항구에 늘어선 식당과 호텔들은 벌써 어스름한 노란 불빛을 항구 쪽으로 비추고 있었다. 반대편에는 고래등처럼 납작하게 엎드린 산이 눈을 뒤집어쓴 채 조용히 웅크리고 있었다. 트롬쇠 섬과 내륙을 잇는 긴 다리를 하나 건너면, 반대편에는 삼각형 모양의 단순하고 아름다운 건축으로 유명한 북극교회와 아름다운 트롬쇠 시내를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 편의점에서 버스 티켓을 사고 버스로 이십 분 정도 이동했다.
버스에서 내리자 전망대로 향하는 오솔길이 나 있다. 산으로 통하는 길에는 눈이 쌓여 있어 모두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긴다. 스키를 타며 지나가는 동네 주민은 살짝 미소 지으며 관광객들에게 인사를 건넨다. 작은 케이블카를 타고 고래등으로 올라가자 너른 눈밭 아래로 노란 불빛 반짝이는 트롬쇠가 한눈에 펼쳐진다. 하얀 눈빛과 노란 전구 불빛이 섞여 따스한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낸다. 북극의 파리라지만, 파리보다 훨씬 소박하고 아늑해서 마음에 쏙 들었다.
곧 달이 뜨는 시간이다. 길은 눈으로 얼어붙고, 이미 해가 져 깜깜한 오후 세 시가 가까웠다. 거리는 각자의 개성대로 예쁘게 꾸민 집들이 내뿜는 환한 조명으로 가득 찼다. 낯 모를 이들의 아늑한 집 창가에는 별 모양 조명, 촛불, 커튼 장식이 주인의 미적 감각을 뽐내며 따스한 온기를 내뿜고 있었다. 일찌감치 일을 마치고 들어와 섬세하게 집안을 장식하는 시간, 강아지와 산책하고 따스한 커피를 만드는 시간. 오후 세 시는 이들에게 오롯이 자신만의 시간, 가족을 위한 시간을 준비하며 따스한 수프 냄새를 풍기는 시간, 단골 가게에서 저녁 시간에 곁들일 빵을 사 가는 시간, 오랜만의 수다를 위해 친구들이 모인 식당으로 총총 걸음을 재촉하는 시간이다.
이곳 사람들은 눈 쌓인 길을 걷는 데 익숙하다.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유모차가 아닌 썰매에 타고 있고, 부모들은 마치 놀이처럼 아이들의 썰매를 끈다. 스키를 맨 모습도 흔하다. 거리에는 머플러를 잔뜩 둘러맨 사람들이 길을 걷고 있지만, 춥고 어두운 분위기는 아니다. 오히려 가게들과 식당,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온기에 온화해지는 풍경이다
거리 한 켠 작은 광장에서는 크리스마스 장터가 거의 끝나 가는 듯 빵과 간식거리를 정리하는 사람들이 있다. 회전목마에선 아이들이 내리기 싫다는 듯 아쉬워하고 있다 작은 광장의 뒤켠에는 누구라도 지나칠 수 없는, 이 마을에서 가장 환한 건물이 있다. 마을의 한복판에서 가장 눈에 띄는 이 건물은 도서관이다. 전체가 유리로 되어 안이 훤히 보이는 이 건물에 잠시 발을 들여놓아 보았다. 조용하고, 아늑한 온기에는 낯선 여행자라도 반겨주는 훈훈함이 있다. 누구라도 지나가다 발을 쉴 수 있고, 책 한 권을 뒤적일 수 있는 열린 곳이 마을의 한복판에, 투명하게 서 있다.
저녁이 되고 잠깐의 산책으로 얼어버린 몸을 데운다. 호텔에서 간식으로 마련해 주는 와플을 하나씩 따끈하게 구워 커피와 함께 먹으며 오후 시간을 보낸다. 트롬쇠의 겨울밤은 일찍 시작되고, 긴긴 겨울밤 동안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기다리기, 생각하기, 멍하니 보내기 뿐이다. 복잡했던 마음은 점점 비워진다.
하지만 아빠와 함께 하는 시간에는 준비하고 생각할 것들이 많다. 한동안의 양식 식단에 물린 아빠를 위해 한식으로 저녁거리를 마련해야 하고, 저녁에는 오로라 투어를 나서야 한다. 오늘은 좀 더 멀리까지, 어쩌면 핀란드와 접한 국경까지도 나가야 하는 긴 여정이 될 수 있어 단단히 채비를 해야 한다. 지친 아빠가 잠시 휴식을 취하는 동안 나는 옷과 담요, 따듯한 물과 간식거리를 준비하고 점검한다. 한 사람을 신경 쓰며 보살피는 일은 때로는 자신을 소모하는 일일 수도 있다. 나의 즐거움은 묻어두고 타인의 감정을 읽는 일에 온 신경을 기울여야 하는 일은 때로는 쉽지 않다. 내 즐거움을 앞세우지 않고, 즐거움도 힘듬도 잠시 숨겨야 할지도 모른다. 그제야 문득 깨달았다. 이것은 부모의 일이라는 것을. 나는 잠시 뒤로 물러나고 누군가를 보살피는, 엄마와 아빠가 수십 년 동안 해 왔던 일이라는 것을. 여행이라는 비일상적인 시간 동안 잠시 역할을 바꾼 나는 낮잠에 빠진 아빠를 보고 먹먹해졌다. 누군가는 오랜 시간을 나를 위해 묵묵히 해 왔던 일을, 나는 잠시나마 귀찮은 듯 시간을 뺏기는 일인 듯 생각한 것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저녁 여섯 시에, 약속대로 오로라 투어 차량이 호텔 앞으로 우리를 데리러 왔다. 오늘도 역시 눈만 보이게 잔뜩 껴입은 우리를 보고 사진가 겸 가이드인 니콜라는 엄지를 척 치켜들었다. 더 챙겨 입을 필요가 없이 완벽하다는 뜻이다. 아랍에서 온 대가족이 우리와 함께했다. 차는 트롬쇠 거리의 불빛을 지나 금세 근처 샌드비카sandvika 해변가에 이르렀다. 트롬쇠 시내에서는 간간이 눈발이 날리고 있었는데, 한 시간 여를 달려왔을 즈음에는 구름마저 사라진 후였다. 니콜라는 모닥불을 태울 나무와 간식, 카메라와 삼각대를 잔뜩 메고 호숫가로 우리를 안내했다. 얼음이 얇게 언 넓은 호숫가에 자리를 잡고 모닥불을 피웠다. 모닥불 가에 모여 오로라를 기다리는 우리 모습은 마치 주술을 외우는 원시 부족 같기도 했다. 날이 어두워진 지는 한참이 되었고, 더운 아랍 나라에서 온 대가족은 연신 춥다며 투덜댔다. 하늘 위는 가끔 희끄무레한 빛이 보일 뿐이었다. 기다림은 길어질 것 같았고 아랍 가족은 돌아가자며 웅성댔다. 니콜라는 어쩔 줄 몰라했다.
그때, 해변가 산 너머로 푸르스름한 빛이 퍼져오기 시작했다. 굴뚝에서 올라오는 연기처럼 조용히 시작된 오로라는 이내 바다 위를 가득 퍼져 오며 바다를 초록빛으로 적셨다. 핀란드에 이어 신기하게도 그리 어렵게 만나지 않게 된, 두 번째 오로라였다. 바다 위를 헤엄치듯 적셔오는 오로라는 핀란드의 오로라보다 훨씬 광대했고, 그 움직임은 부드러운 춤처럼 이어졌다. 우아하고, 고요했다. 시끌벅적했던 아랍 가족도 오로라의 황홀함에 이내 조용해졌다.
산 너머로 한참이나 나타났다 사라지는 녹색 빛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이탈리아에서 독일을 거쳐 먼 곳에 신비로운 사진을 찍으러 정착했다는 사진가 겸 가이드 니콜라는 여러 점의 멋진 사진을 남겨주었다. 다루기 어려운 일행 때문에 진땀을 흘리며 여기저기 뛰어다니던 그가 어둠 속에서 조용히 녹색 빛이 밝아져 오는 때를 기다리다 'really nice place'라며 안경 너머 모범생 같고 장난기 가득한 갈색 눈동자를 찡긋 하며 사진을 찍는 순간도 좋았다. 매일같이 만나는 풍경일텐데도, 그렇게 새롭고 마법 같을까. 파도 소리가 퍼져나가는 해변의 조개와 마른 산호와 눈처럼 부드러운 모래 위에 사그라져가는 모닥불 주위에서, 우리는 산 너머에서 피어오르는 오로라를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니콜라는 태양과 플라스마의 활동이나 오로라를 일으키는 자기장에 대해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주었지만, 나는 요정의 춤이라는 이야기가 그저 제일 좋았다.
낮과 밤이 뒤섞이고, 6월의 여름날에 눈이 내리고, 녹색의 빛이 검은 밤하늘에 회오리치고, 눈 덮인 산만이 어둠 속에서 희미한 빛을 내는 이곳에서라면, 어떤 일이 일어나도 그저 운명처럼, 기적처럼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저 조용히 시간이 지나가는 일생을 받아들이고, 쌓이는 눈이 밤의 침묵을 토닥토닥 잠재우는 시간을 흘려보내며, 그렇게 조용히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문득 이곳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밤의 긴긴 시간에 묻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서라면, 영영 아무 데도 돌아가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겨울 북유럽 여행자를 위한 소소한 여행 팁 7.
북유럽 겨울 여행에서 가장 걱정되는 것은 날씨였다. 하지만 우리나라 한겨울보다 그다지 춥지 않았다. 헬싱키, 오슬로, 트롬쇠는 12월 기준 영하 5도~0도, 제일 추운 사리셀카도 영하 10도 정도였다. 우리나라 추운 겨울날 정도를 생각하고 준비하면 부족하지 않다. 상의는 발열내의에 울 니트, 구스다운 등 세 겹 정도 껴입고, 하의는 레깅스나 발열내의에 방한 방풍 바지를 입으면 적당하다. 신발은 가벼운 패딩 부츠(눈에 완전히 젖는 일은 거의 없으므로 스키장에서 신는 패딩 부츠면 충분하다)에 등산용 양말 정도면 된다. 이 정도 껴입고 나가니 오로라 투어에서 대여해 주는 방한복(아래위 일체로 된 무거운 방한복)을 껴입으면 더울 정도였다.
다만 실외에서 몇 시간씩 있어야 하는 투어 참가 시에는 핫팩은 필수. 등에 2-3개, 배에 1-2개, 다리 팔, 양쪽 발에도 촘촘히 핫팩을 붙이고 손난로까지 챙기니 전혀 춥지 않았다. 북유럽의 숙소는 우리나라처럼 후끈후끈한 경우는 거의 없어서, 추운 밖에 있다 들어와 으슬으슬할 때 핫팩 두어 개를 깔고 그 위에 담요를 깔고 누우면 따듯하게 자리에 누울 수 있어 부모님에게 꽤 도움이 된다. 핫팩은 충분히 가져가야 한다. 접거나 말 수 있는 얇은 담요도 챙기면 외부에 오래 있는 투어 때 덮거나 침대에 깔 수도 있어 유용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