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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녹색광선 Jan 22. 2020

당신의 오로라, 나의 북유럽 3

아빠와 함께 한 핀란드, 노르웨이 오로라 여행 일기

눈밭 한가운데 오두막에서의 시간은 언제 얼마큼 흘렀는지 모를 정도로 천천히, 때로는 훌쩍 흘러갔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식당 겸 로비로 사용하는 큰 오두막 안 벽난로에는 불꽃이 타닥 하고 솟구치고, 엷고 단 라즈베리 주스가 주물 주전자에서 끓고 있다. 시나몬과 치즈 향이 가득한 빵을 모닥불에 구워 하나 베어 물고 조용히 시간이 지나가는 것을 바라보며 흐르는 시간 속에 느긋하게 머무른다.      


어제는 밤늦게까지 오로라 투어를 하느라 무리했기에, 오전 시간은 캐빈에서 느긋하게 보냈다. 오후에는 순록을 타고 설원을 한 바퀴 돌아보기로 했다. 산타가 타고 온다는, 바로 그 루돌프다. 루돌프는 생각보다 크고, 가까이 가면 거칠어질 수도 있다고 해서 겁이 났다. 조용히 가이드 말에 따라 순록에 맨 썰매에 올라 담요를 뒤집어썼다. 순록은 오래전부터 순록을 기르며 몰던 민족만이 몰 수 있다고 했다. 순록들의 말을 귀 기울여 듣는 듯, 오랜 친구 같은 여자 목동 둘이 순록 떼를 몰아 숲 사이로 이끌었다. 순록의 발자국은 깊게 쌓인 눈밭 위를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이어졌다. 썰매는 그 소리를 따라 소나무 숲 사이를 미끄러지듯 지나갔다. 천천히, 조용히 시간은 흘러갔다. 하늘은 하얗고 시리도록 파랬고, 때로는 나무에서 후드득 하고 쌓인 눈이 떨어지기도 했다. 나프나프, 순록의 발자국 소리와 나의 하얀 입김, 눈 위로 지나가는 썰매의 쉭쉭 소리. 하늘과 눈 밖에는 아무것도 없지만, 온통 마음이 가득 찬 충만한 시간이었다.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 오후 두 시가 되었다. 순록의 시간은 그렇게 빨리 사라졌다. 하루 종일 핑크빛이었던 하늘은 어느새 점점 더 붉게 물들며 오랫동안 자리에 머물렀다. 금빛으로 불타오르던 화려한 태양이 마지막으로 사라지고 나자 푸른빛의 어둠엔 샛별이 하나 둘 그리고 이내 무수히 깃들었다.  어둠 속에 얼음 같은 눈꽃을 피워 하얗게 빛을 발하고 있는 나무들과 쏟아지는 별들. 시간이 멈춘 수천 년 풍경 속에 지나간 시간을 얼려 놓는다. 하얀 나무의 그림자와 어둠의 고운 결 속에는 좋은 것이었던 나쁜 것이었던, 모든 것을 묻어놓을 수 있을 것만 같다.        

순록의 시간이 가고 총총 별들의 시간이 오자 아빠와 나는 핀란드 보드카를 한 잔씩 따르며 따스한 오두막에서의 마지막 밤을 조용히 보냈다. 아빠는 평소에는 그리 말수가 없는 평범한 아버지였지만, 멀리 떠나온 이곳에서는 어느 순간 수다쟁이처럼 끝없는 이야기를 펼치고 계셨다. 내가 모르는, 내가 태어나기 전의, 나보다 어린 아빠의 시간들, 나는 기억나지 않는 나의 이야기들. 그저 저 깊은 눈 속에 켜켜이 묻혔을 이야기들이 오늘은 눈 녹듯 흘러나왔다. 우리는 열렬한 신자는 아니었지만, 어릴 때 엄마는 나에게 ‘이 세상에 소중한 것은 믿음 소망 사랑, 그중 제일 중요한 것은 사랑이라’는 말을 자주 가르쳤던 것 같다. 기억이 가물가물한 내 모습이지만, 아빠는 그런 내 모습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사랑이라. 종교를 떠나, 그 말을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는 것은, 그리고 그 말을 뜻도 잘 모르면서 따라 했을 내 어린 모습을 아빠가 기억하고 있는 것은, 그 말의 힘 때문이겠지. 사랑, 가장 오랫동안 남는 것은 사랑이라는, 아주 단순한 말이 너무나 생경하게 지금 이 눈밭 한가운데서 떠오른 것은, 이 순수하고 아름다운 풍경 때문이겠지. 우리는 잠깐 먹먹해졌고, 말을 한동안 잇지 못했다. 사라질 기억들이 저 먼 곳의 별처럼 잠깐 반짝, 하고 환한 빛을 내는 순간, 그 기억들 덕분에 우리는 살아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겨울 북유럽 여행자를 위한 소소한 여행 팁 3.

핀란드에는 ‘평생 한 번은 묵어보고 싶은 호텔’에 자주 선정되는 유리 이글루 숙소들이 여럿 있다. 가격은 일반 호텔에 비해 상당히 비싸지만, 오로라 아래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특별한 체험을 할 수 있다. 가장 유명한 곳은 칵슬라우타넨 Kakslauttanen 리조트인데, 각 방이 개별 이글루로 되어 있고, 전체가 유리로 되어 있어 북구의 하늘을 가장 잘 볼 수 있다. 하지만 캐빈 안에 욕실이 없어 씻으려면 캐빈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치명적인 단점 때문에, 우리는 비교적 최근에 생긴 ‘노던 라이츠 빌리지northern lights village’에 머물렀다. 사리셀카 이바로 근처에 있고, 최근 레비Levi에도 두 번째 리조트가 생겼다. 각 캐빈 안에 욕실이 완비되어 있어 식사나 투어 시간 외에는 나올 필요가 없다는 장점이 있다. 천장 반쪽만 유리로 되어 있지만 침대 쪽이라서 누워 있으면 하늘의 오로라를 만끽하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숙소에서 조, 석식을 제공하며, 오로라 투어, 순록 투어, 허스키 투어 등 여러 가지 투어도 자체적으로 진행하기 때문에 사실상 머무르는 동안에는 리조트 밖으로 나갈 일이 거의 없다. 투어는 사리셀카 마을의 다른 업체를 이용해도 되지만 마을까지 나갔다가 투어가 끝나면 돌아와야 하는 단점이 있어, 조금 비용은 비싸더라도 리조트에서 운영하는 투어를 운영하는 것이 편하다. 아이들과 함께라면 조금 스피드 있는 허스키 투어나 스키 투어를, 어른들과 함께라면 잔잔하고 조용한 순록 썰매 투어도 즐길거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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