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와 함께 한 핀란드, 노르웨이 오로라 여행 일기
핀란드 북쪽 설국의 나라를 떠나 비행기는 도시로 향한다. 아직 해가 채 뜨지 않은 이바로 공항에서 이륙한 비행기가 점점 남쪽으로 향하는 사이, 하늘은 진한 파란색에서 녹색으로, 점점 옅은 분홍색으로 물든다.
하얗고 또 새까만 밤의 마을에서 따스한 크리스마스의 기운이 가득한 헬싱키 시내로 들어온다. 소박한 중앙역 근처는 온통 크리스마스가 한창이다. 예쁜 진녹색의 트램이 도심을 지나고, 사람들이 바쁜 걸음을 옮기는 길에는 작은 돌이 깔려있어 반갑다. 하늘에는 온통 크리스마스 전구들이 낮부터 반짝반짝, 마음을 들뜨게 한다.
중앙역에 도착한 공항버스에서 호텔까지는 멀지 않아, 우리는 천천히 돌길을 걸어갔다. 중앙역 바로 앞, 외관이 나무와 유리로 된 거대하고 밝은 건물에 사람들이 바삐 들락날락하고 있다. 도심의 한가운데 가장 핀란드다운 모습으로 서 있는 이 건물은 도서관. 이곳을 방문하려는 사람이든 그렇지 않든, 누구든 자유롭게 드나들며 구경할 수 있어 아이들, 가족들을 비롯한 사람들이 가득하다. 마음먹고 찾아가 조용히 책만 빌려 나와야 하는, 그렇지 않으면 수험서에 얼굴을 박은 학생들이 가득한 도서관이 아니라 언제나 활기차게 돌아가는 도심의 중심, 그곳이 도서관인 것이 정말 부러웠다.
도서관을 지나 예약했던 아파트먼트 호텔에 체크인을 했다. 작은 사무실 같은 로비에서 직원 한 명이 반갑게 맞이해 체크인을 도와주고 키를 준다. 이곳은 집 하나를 오롯이 빌려 쓰는 레지던스형 호텔이라, 집처럼 자유롭게 생활할 수 있었다. 방에 들어서자 마치 오랜만에 우리 집에 돌아온 듯 아늑했다. 넓은 거실엔 익히 들어왔던 브랜드의 북유럽 의자와 테이블이 채워져 있고, 방에는 북유럽의 말끔한 조명이 노란빛을 발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식기세척기, 커피머신, 각종 조미료까지 모두 갖추어져 있는 완벽한 부엌에는 이딸라 그릇이 가득. 며칠간 한식은 제대로 드실 기회가 없었던 아빠에게 이곳에서는 캐리어 가득 가져온 재료들로 한식을 제대로 차려드릴 수 있을 테다. 편안하고 넓은 공간에, 사우나까지 갖춰진 이곳에서 진짜 핀란드를 느낄 수 있을 테지. 북유럽 디자인을 한껏 느끼고 싶은 여행객에겐 이곳이 감상할 전시장이자 직접 생활해 볼 최적의 공간이다. 사방 환한 창문을 열자 넓은 발코니 너머로 은빛 자작나무가 두르고 있는 넓은 호수가 펼쳐진다. 핀란드인 백 명당 하나의 호수를 가지고 있다더니, 과연 도심에도 이렇게 넓은 호수가 자리 잡고 있다. 호수 맞은편에는 자작나무를 닮은 하얀색의 핀란디아 홀이 호수와 어울리게 수평으로 펼쳐져 있다. 알바 알토가 설계하고, 시벨리우스의 ‘핀란디아’에서 이름을 따온 이 홀이 바로 숙소 앞의 풍광을 환하게 밝혀주고 있다. 핀란디아 홀 앞의 넓은 공원에는 유모차를 미는 부부, 느릿느릿 산책하는 노부부와 커플들이 잠깐 나온 햇살을 즐기고 있다. 호수, 하얀 건물, 산책. 이것으로도 오롯이 핀란드다.
호텔에서 센스 있게 마련해 둔 핀란드 로스터리의 커피를 내려 몸을 살짝 데운 후 도심으로 나선다. 중앙역을 지나 도심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면 북유럽 최대라는 스토크만 백화점을 만난다. 붉은 벽돌의 수수한 외관만큼 내부에도 실용적이고 단정한 물건들이 정렬하고 있다. 우리나라 백화점처럼 화려하고 세련되지는 않았지만 위압감 없는, 그저 매일 들르는 동네 마트처럼 친근하게 들를 수 있는 일상의 공간이었다. 주방 식기 매장에서, 식품관의 생선가게 앞에서, 아주머니나 여성들은 물론 남자들도 유심히 물건을 살피며 쇼핑을 한다. 생활을 함께 꾸려나가는 그들의 모습이 진지하고, 또 평범하다.
스토크만 백화점 바로 앞에는 알바 알토가 설계해 유명해진 아카데미아 서점이 있다. 건물 전체가 서점은 아니라 몇 층 에스컬레이터로 올라가면 갑자기 햇살이 환하게 들어오는 천장을 만날 수 있다. 그 아래에는 빛으로 가득 찬 공간에서 조용히 책을 고르는 사람들이 공원처럼 여유 있게 어슬렁거리고 있다. 북구의 하얗고 조용하고 긴 사람들이 서가 사이사이에서 책을 고르고 있는 풍경.
천천히 거리를 걷다 늦은 점심을 먹기로 한다. 레스토랑에서는 낯선 재료들이 메뉴판에 가득하다. 이럴 때는 안전하게 생선과 고기. 북유럽의 생선은 어떻게 요리해도 맛있다. 그냥 구워도, 소스를 잔뜩 뿌려도 그 고소한 맛이 살아있다. 핀란드에서 유명하다는 순록 고기를 시켰지만, 아무래도 루돌프를 먹는다는 것이 내키지 않아서일까. 그다지 새로운 맛은 느껴지지 않았다. 막 이른 저녁을 시작한 레스토랑엔 사람이 많지 않았다. 뭔가가 필요했던 아빠는 갑자기 큰 소리로 직원을 불렀다. 아빠! 여기선 그러면 안 된다니까! 나는 깜짝 놀라 아빠의 손을 잡았다. 푸근한 인상의 아주머니 직원이 다가왔고 나는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했지만, 오히려 아주머니는 괜찮다며 오히려 나를 다독이며 따스한 미소를 지었다. 낯선 외국의 관습이 익숙하지 않은 아빠에게 큰 소리를 내다니. 괜히 호들갑을 떤 내게 미안한 표정을 짓는 아빠 빠에게 미안했다. 아무 일도 아니지만 여행을 챙기는 동안 바쁘고 조금은 피곤해진 탓일까 마음이 조급해졌나 보다. 행복하고 아름다운 시간들이어야 할 여행에 흠집을 낸 것 같아 계속 마음이 무거웠다. 하지만 체구가 크고 무뚝뚝해 보이던 아주머니의 다정한 미소와 괜찮다는 잠깐의 손길에 마음이 녹았다. 마음이 따듯한 사람들의 온기가 전해졌다. 아무 일도 아니라던 핀란드 아주머니의 여유가 잠시 내게선 사라졌었나 보다. 내 미안한 마음도 아빠에게 조금은 전해졌을까.
마리메꼬와 이딸라, 아라비아 핀란드 등 유명한 북유럽 브랜드들이 가득한 거리를 지나, 눈을 뗄 수 없는 북유럽 소품들이 가득한 가게들이 늘어서 있는 디자인 디스트릭트를 느린 발걸음으로 걸었다. 거리가 갑자기 북적였다. 메인 거리에 사람들이 길을 중심을 양쪽으로 끝없이 늘어섰다. 겨울의 퍼레이드, 루시아Lucia 퍼레이드가 펼쳐지려는 참이었다. 화려한 전구와 꽃들로 장식한 차와 마차들이 끝없이 지나갔다. 악대는 활기차게 악기를 연주하고, 아이들은 노래를 부르며 치장한 사람들이 늘어선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퍼레이드의 중심에는 여왕처럼 차려입은 소녀가 수줍은 든 손을 흔들며 지나갔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었다.
어느덧 거리의 끝에서 하얀 헬싱키 대성당이 눈에 들어왔다. 해는 이미 저물었고 대성당 앞 광장에는 크리스마스 쿠키와 빵, 따듯하게 데운 와인과 수공예품들을 파는 노점들이 노란빛을 밝히고 있었다. 뒤쪽 조금 올라간 언덕에는 검은 밤하늘에서도 여전히 하얀 눈처럼 빛나는 헬싱키 대성당이 눈과 겨울의 나라에 온 모든 이들을 환영하고 있었다. 둥그런 지붕에서 부드러운 흰 빛을 발하는 헬싱키 대성당을 만나자, 먼 곳에서 눈의 나라로 날아온 것이 새삼 느껴졌다. 추운 겨울의 나라에서 또 다른 겨울의 나라로 왔지만, 이곳은 따스함이 함께 하는, 동화 속의 겨울 나라였다. 아주 먼, 또 다른 겨울로 들어선 것이 실감이 났고, 이상하게 마음은 따스해지고 있었다.
겨울 북유럽 여행자를 위한 소소한 여행 팁 4.
디자인의 도시인 헬싱키에는 작고 예쁜, 저렴한 숙소들이 많다. 주로 중앙역 근처에 깔끔하고 예쁜 부티크 호텔들이 많다. 시내까지 이동도 편하고, 즐길거리도 많다.
우리는 중앙역에서 도보 10분 정도 떨어진, 핀란디아 홀을 마주 보고 있는 ‘알론코티 아파트먼트 호텔Apartment Hotel Aallonkoti에 머물렀다. 핀에어 공항 리무진 버스가 중앙역에 바로 정차하기 때문에 숙소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아파트먼트라 체크인을 걱정했는데 1층에 체크인 사무실이 있어서 편하고, 미리 메일로 체크인/아웃 시간을 어레인지하고 찾아가면 이용에 전혀 어려움이 없다. 시내 숙소보다 그리 비싸지 않으면서도 오롯이 내 집처럼 욕실, 침실, 주방, 거실이 풀옵션으로 되어있는 약 20평 정도의 아파트먼트여서 대만족했다. 중앙역에서 바로 보일 정도로 가깝고, 발코니에는 핀란디아 홀과 호수를 낀 공원이 펼쳐진다. 침실은 분리되어 있고, 주방은 식기세척기에 커피메이커, 조미료에 핀란드 커피까지 준비되어 있고, 식기는 심지어 모두 이딸라 제품이어서 행복하게 보낼 수 있었다(인테리어를 채우는 핀란드 브랜드는 일정 기간에 따라 바뀐다고 한다). 욕실도 넓고 따뜻하고, 세탁기에 빨래도 할 수 있어 집보다 편하게 보낼 수 있었다. 근처 마트에 장을 봐서 연어스테이크도 해 먹고, 요거트와 과일, 빵으로 여유로운 브런치를 만들어 먹으며 핀란드인의 생활을 잠시나마 체험해 볼 수 있다. 호텔 건물에는 예약하면 이용할 수 있는 미니 사우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