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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녹색광선 Jan 24. 2020

당신의 오로라, 나의 북유럽 5

아빠와 함께 한 핀란드, 노르웨이 오로라 여행 일기


여전히 회색의 하늘 위로 낮게 구름이 끼어 있는 겨울의 헬싱키의 한가운데로 우리는 거침없이 발걸음을 옮긴다. 발코니에서 내려다보던 핀란디아 홀 앞 공원을 한 바퀴 크게 산책한 후 바닷가로 향한다. 영화 ‘카모메 식당’에서 주인공이 처음 핀란드에 도착하여 만난 그 바닷가. 갈매기가 무심하게, 때로는 겁 없이 사람들 사이를 지나가며 먹을 것을 낚아채는 바닷가. 그저 지도 위에서 손가락이 짚은 곳으로 대책 없이 떠나 온 작은 동양 여자에게도 무심한 듯 바다 한 켠 햇빛을 내어주는 곳. 그곳이 내겐 핀란드의 첫인상이었다.


수오멘린나 요새로 향하는 작은 유람선이 출발하는 선착장은 바닷가에 면해 있었다. 러시아 풍 붉은 벽돌의 우스펜스키 성당이 보였다. 좀 더 뒤로는 어젯밤보다 뽀얀 빛을 우아하게 발하고 있는 헬싱키 대성당이 고요하게 서 있었다. 바다와 땅이 수평으로 만나는 바다, 먼 나라로 향하는 커다란 유람선이 드나드는 발트해는 넓고 끝이 보이지 않았다. 우리를 태울 작은 유람선은 많지 않은 사람을 태우고 붉은 벽돌 건물이 늘어선 해안을 따라 천천히 움직이더니 이내 수오멘린나 요새에 정박했다. 지금도 해군 사관학교가 있는 이 작은 섬은 본래 스웨덴이 건축했다가 지금은 요새로서는 사용하지 않는, 옛 건물들이 폐허처럼 남아있는 성곽으로 둘러싸여 있다. 천천히 한 바퀴 걸어 산책할 수 있는 요새에는 버려진 대포 한 대만이 쓸쓸히 남아있을 뿐, 시골 마을의 산책로 같다. 기념품 가게를 겸하는 작은 카페에서 진한 코코아를 마시며 나무에 그린 엽서 몇 장을 기념품으로 사고, 바다가 작게 보이는 요새의 벽 사이로 사진을 찍었다. 이파리가 하나도 남지 않은 스산한 나무와 노랗게 마른 들판은 황량했지만, 춥거나 을씨년스럽지는 않은, 따스한 아침 노란빛으로 가득한 산책로였다.    

 

요새에서 돌아온 유람선은 다시 선착장에 우리를 내려놓았다. 한 켠에는 과일과 빵, 먹을거리들과 손으로 짠 크리스마스 트리에 달 수공예품들을 파는 노점들이 늘어서 있었다. 한쪽에는 붉은 벽돌로 지은 실내 시장인 카우파토리 마켓이 있었다. 갈매기들이 떼 지어 모여있는 것으로 보면 먹을 것이 넘쳐나는 곳인 듯했다. 기름진 음식 냄새가 배어 나오는 이 시장으로 자연스럽게 발길이 향했다. 갓 구운 빵과 해산물이 가득한 실내 시장은 질서 정연하고 아늑했다. 번잡하지 않은 깨끗한 노점이 가득 늘어서 있어 무엇을 먹어야 할지 망설였다. 갖가지 향신료로 조리된 연어로만 채워진 곳, 올리브, 해산물, 와인을 파는 곳도 있었다.

시장 가운데에서는 사람들이 샐러드와 빵을 먹으며 와인 잔을 기울였다. 이곳 카페 스토리Story에서 잠시 쉬기로 했다. 향긋한 냄새를 풍기는 갓 구운 빵들도 눈길을 사로잡았지만, 연어를 가득 넣은 크림수프가 이곳의 인기 메뉴. 사람들은 모두 큰 수프 그릇을 테이블 중간에 놓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분홍빛 수프 한 숟가락을 입에 넣자 고소하고 따스한 온기가 마음 깊은 곳까지 가득 찼다. 갓 구운 흰 빵도 담백한 수프에 잘 어울렸다. 바다가 한가득 입안에 들어온 것 같았다.  따스한 곳에서 몸과 마음을 배부르게 하니 이미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아직 오후 세 시밖에 되지 않았지만 잠시 숙소에서 몸을 녹이며 오후의 핀란드인들처럼 시나몬롤을 한 입 베어 물었다.

   

잠시 낮잠을 주무시는 아빠를 숙소에 남겨두고 이른 저녁 산책을 나섰다. 스토크만 백화점에서 시내 반대편으로 걸어가면 화려한 불빛이 가득한 시내 중심가와는 다른, 조금은 어둑한 골목으로 접어든다. 이곳을 찾은 이유는 안도라Andora 바를 만나기 위해서다. 핀란드 감독 아키 카우리스마키Aki Kaurismaki가 운영하는 바와 극장이 이곳에 있다. 그의 영화처럼 원색의 차가운 공간에서 무표정하지만 마음은 뜨거운 사람들이 술 한잔을 앞에 두고 묵묵히 앉아 있을 것 같은 바 안도라가 이 헬싱키 골목 어딘가에 있다고 했다(이곳은 2019년 겨울까지만 운영하고 이전할 예정이라고 한다). 이미 철거 중인 어둡고 질척이는 골목을 돌자 어스름한 불빛 사이로 금요일 밤을 즐기는 사람들의 왁자지껄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바 안도라. 불 꺼진 네온사인 아래 나무문을 조심스레 밀자, 휑한 바깥의 풍경과 달리 사람들로 가득 찬 바에 서서 병맥주를 마시는 사람들의 말소리, 음악 소리, 당구공 부딪히는 청명한 소리가 들린다. 그들 사이에 껴서 이방인스러운 무표정함을 두르고 보드카를 한 잔 하고 싶은 마음을 애써 누르고 바 한 켠의 좁은 계단을 조심조심 내려간다.


카우리스마키가 운영하는 영화관 두브로브니크다. 그의 영화 <어둠은 걷히고drifting clouds>에서 따온 이름이다. 영화 속 그대로 빨갛고 초록빛의 네온사인이 반짝이고, 벽에 걸린 윌로 씨와 사무라이가 반기는 흡연실, 낡은 빨간 소파들이 극장 로비의 의자들과 이어져 있다. 80년대의 공기, 그리고 곧 사라질 곳의 그리운 공기가 가득하다. 문득 사라진 극장들의 기억이 밀려왔다. 낡은 의자들, 항상 앉았던 자리의 좌석번호, 다시 켜지지 않을 불 꺼진 스크린의 뒤편, 삐걱대는 마루, 이제는 더 이상 함께 할 사람이 없는 옥상의 풍경들. 사라졌지만 아직 남아있는 나의, 우리의 극장의 기억이 이 먼 곳, 카우리스마키의 극장에서 떠올랐다. 나의 이십 대가 진정으로 시작된 곳은 극장이었다. 곧 사라져 버릴, 오래된 이 작은 극장의 로비에서 나는 내 과거를 다시 소환해 내는 중이었다. 아직 생생하게 불빛을 깜빡이는 기억들을.      


호텔 근처 마트에서 간식거리를 사서 재빨리 돌아왔다. 헬싱키의 밤은 빨리 찾아왔다.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뜨개질하는 시간들. 시내로 짧은 산책을 나와 북유럽의 일식당에서 아빠와 함께 초밥을 먹었다. 조금 아까 서 있던 낯선 공간이 문득 겹쳐진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 <희망의 건너편The other side of hope>에서 말도 안 되는 주인공들이 만들던 말도 안 되는 초밥을 먹고 있는 듯 비현실적인 기분이다. 낮에는 환한 눈빛 북구의 도시. 밤에는 크리스마스 빛 가득한 환상의 도시. 하지만 여름엔 새벽까지 햇빛이 이어지고, 겨울엔 낮에 달과 별이 뜨는 곳. 낮이지만 밤인, 밤이지만 낮인 이 나라에선, 카우리스마키의 아이러니와 멜랑콜리는 어쩌면 당연한 정서일지도 모른다.   

  



겨울 북유럽 여행자를 위한 소소한 여행 팁 5.

부모님과 함께 하는 여행에서는 아무래도 음식 걱정이 가장 크다. 혼자라면 삼시 세 끼 빵만 먹을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아버지와의 여행이다 보니 신경이 많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최대한 인스턴트와 캠핑 음식을 챙겼다. 햇반, 라면은 기본이고, 누룽지. 캔 김치, 통조림 반찬들, 커피, 차, 그리고 무엇보다 따듯한 국이 필수다. 동결 건조되어 가볍고 따듯한 물만 부으면 바로 국이 되기 때문에 오로라 투어를 하고 와서 추운 밤에 속을 든든히 채우고 잠자리에 들기에 딱 좋다. 인스턴트로 나온 순두부찌개, 김치찌개 등도 괜찮지만 아무래도 액상 상태이다 보니 이동과 보관에 짐이 되므로 많이 챙기지는 않았다.

특히 유용했던 것은 미니 인덕션. 햇반 하나 데우려고 해도 호텔에 전자레인지도 없고 매번 주방에 부탁하기도 어려웠는데, 캠핑용으로 나온 미니 인덕션이 큰 힘이 되었다. 햇반 두 개 정도 들어가는 코펠에 가벼운 미니 인덕션이 세트로 되어 있어 어디서나 밥, 국을 해 먹기에 좋았다. 가볍고 부피도 많이 차지하지 않는 덕에 짐 한 구석에 챙겨 넣었더니, 매일 한 끼 한식을 책임지는 든든한 필수템이 되었다.

저녁을 숙소에서 해 먹는 날에는 점심에는 그 나라의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는 요리를 먹는데, 북유럽이 신선한 생선이 넘쳐나기 때문에 어느 식당에서도 생선 요리를 주문하면 후회하지 않는다. 간이 우리나라보다는 짜니 참고할 것. 일식집이나 중식집도 많고, 헬싱키나 오슬로 등 대도시에는 한식집도 한두 곳 정도는 있기 때문에 일정에 따라 적절히 조절하면 음식 때문에 부모님이 많이 힘들어하시지는 않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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