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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Unto the breach May 15. 2016

철든 초딩아들,  철없는 엄마 암스테르담 여행기

 아들과 놀 시간이 줄어들고 있다! 기다리지 말고 같이 놀자!

‘일상’은 버티기였고 ‘여행’은 꿈꾸는 것 저 너머의 것이었다.

‘여행’ 이 꿈일 수밖에 없는 이유, 저 너머의 것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지긋지긋하지만 삶을 이어가게 해주는 일상을 벗어던지지 않으면 이루어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여행은‘시간’과 ‘돈’의 문제였다. 시간을 만들면 돈이 없었고 돈을 만들면 그 긴 시간을 참고 견디어낸 결과물이 ‘짧은 시간에 날아가’기 보단 주변에 든든히 남아서 일상의 한 옆구리를 채울 그 무언가로 바꾸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었다. 그럴 때면 10년 넘게 튼튼해서 좋았던 그 무엇이 삐그덩거리기 마련이었다. 그럼 슬프게도 내 지난한 일상을 꾸리기 위한 짐 하나로 다리에 무거운 추를 달아 지금 자리로 새로운 놈을 여윳돈과 바꿔 붙박이 시켜놓는다. 10년 이상을 쉴 새 없이 돌린 그놈이 삐그덕 대다 주저앉았는데 이미 더 오랜 시간을 버틴 나 자신은 토닥토닥 할여 유도 없이 또 ‘버티기’ 일상에서 머물러 있는다.  다시 여행은 ‘시간’과 ‘돈’의 문제로 돌아갔고, 떼어내려고 풀었던 ‘언젠가는’의 꼬리표는 다시 꼭 묶었다.

40이 넘었다. 인생에서 가장 피곤하게, 힘들게 지나오는 시간을 막 지난 것 같았다. 에너제틱하던 열정으로 모든 걸 해 낼 수 있다고 믿는 시간은 지났다. 누군가는 40대 지나도 청춘이라고 얘기하지만, 지금 까지만큼 앞으로 체력을 유지하는 일도 몸을 예전처럼 열정만 가지고 굴리기엔 무리가 있을 거라며 여러 가지 경고 신호가 몸속에서 딩딩 두드려대고 있었다.

 

한참 인생을 시작하는 아이, 겨우 12살. 이제 겨우 초등학생인 첫째에 대해 주변 어른들에겐 모든 화제가 공부였고, 시험이었고, 학원이었고, 영어, 수학, 미래가 결정되고 틀에 맞춰져야 하는 지금 미리 해둬야 할 모든 공부에 관한 것들만 대화의 중심에 놓였다. 주변 대부분의 걱정이 넘쳐나는 그 대화들에 눌린 아들은 ‘놀아야 한다’는 지론의 엄마와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스스로 걱정을 시작했다. 아이의 반경은 학교 – 집이다. 벌써 루틴에서 벗어나지 않는 틀을 만들고 있었다.

  

아들이 보고 싶다던 만화책을 사서 건넸다.  만화 주인공은 매 권 새로운 세계의 도시를 간다.

"아들, 여행해 보고 싶은 생각 없어?” “ 아니.. 별로. “

가만히 앉아서 책 보고 컴퓨터 보고 오락하는 것이 좋은 아들이다. 그저 눈에 띄지 않는 요즘 아이다.

"얘(만화 주인공)는 벌써 이렇게 많은 도시를 가보고 있는데 이곳은 정말 좋겠다 싶었던 곳도 없어?”

“글쎄, 굳이 그렇다면…. 하링 샌드위치가 있다는 암스테르담 정도?!?!”

 다음날, 점심시간이 막 지나고 봄방학을 앞둔 아들이 기분 좋게 집에 돌아왔을 시간 집으로 전화를 했다.

“아들! 엄마랑 암스테르담 가자! 비행기는 이틀 후 표 지금 샀고, 거기서 한 일주일 정도 있다 오자, 짐 싸 놔!”

“엄마! 난 암스테르담 가겠다고 한 적 없어, 당황스럽게 이게 뭐야!”

“몰라, 아무것도 안 정했어, 엄만 너 기다리다가 아무 데도 못 갈 것 같아. 나이 들어서 엄마랑 안 놀아주기 전에 엄마랑 좀 미리 놀자! 이틀 후야! 짐 싸 놔!”


여행의 짜릿한 순간.. 내가 갈 곳 그 곳을 하늘에서 바라본다. 나는 하늘을 날고 있다. 너무너무 설명할 수 없는 벅참으로 짜릿하다


살면서 아들과 처음 둘이라는 여행이라는 말에 아들은 엄마와 달리 이렇게 대조적이다.  

전화를 끊고 나서 몇 가지 생각이 머리에 돌았다.

숙소는? 가서 뭐하지? 아들이 뭘 좋아할라나? 하링 샌드위치만 먹으면 되나? 잠깐… 하링이면… 청어? 그 비린내 강렬한?!?! 새로운 것을 경험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아들이 감당할 수 있을까? 나도 감당할 자신이 없는데? 아차차… 암스테르담… 대학 때 배낭여행했을 때 악몽의 그곳이잖아.. 다시 갈 일 없을 거라고 어금니 꽉 물었던 곳인데 하필 그곳을 가겠다고? 홍등가를 잘 피해서 돌아다닐 수 있을까? 의도하지 않게 마주친 것들이 불쾌한 곳들이 많았잖아. 초등학생 아들한테 잘 설명할 수 있을까? ….. 마주치면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저지르고 몰려오는 복잡한 심정.. 서점에 가서 보니 네덜란드 여행책자도 없었고 기껏해야 유명한 장소 사진 몇 장, 지도 한 장, 음식점, 숙소 정보의 마뜩잖은 몇십 페이지가 전부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예전에 여행책자 들고 여행할 때 책에 소개한 음식점 숙소는 이용한 적이 없었다. 가 봐야지 해야 할 결심을 하기엔 정보가 너무 애매했다. 어차피 연도가 좀 지난 책자의 정보보단 운 좋으면 어제 업데이트 한 정보를 찾을 수 있는 인터넷 사진과 정보가 훨씬 유효했다.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아이들을 돌봐주시는 친정 엄마의 쩌렁쩌렁

"너는 애 엄마가 뭐 이리 생각이 없어. 뭐 어쩌려고 갑자기 애를 데리고 둘이 어디 가겠다는 거야?!?!? 넌 그 나이에 어째서 아들보다도 철이 아직도 안 드니?"


나이 40이 넘어도 갑자기 이런 식으로 일을 저지르면 철없다는 소리 듣는 거구나..? 40 넘어서 듣는 철없다는 표현, 제대로.......... 괜찮은데? 여행의 제대로 된 시작은 자고로 우려, 걱정, 그리고 철없다는 비난 한 모금...! 고백컨데 이러한 과정들이 제대로 된 여행의 시작 같았다.  


만든 지 5년이 다 되어가도록 깨끗한 아들 여권에 드디어 도장 하나 찍을 생각에 촤르륵 넘기며 마음도 부풀었다.. 여권 유효 만료일을 보기 전까진… 헉. 2016년 6월 만료, 6개월 이상 남아야 할 여권 유효 만료일이 여행 간 2월 기준에 겨우 3개월 좀 넘게 남아있었다. 부랴부랴 네덜란드 주한 대사관을 찾아 전화를 거니 네덜란드 출국 예정일로부터 3개월 이상만 남아있으면 된단다.  운이 좋았다. 정말 운이 좋았다.

이번 여행은 운이 좋을 것으로 믿기로 했다. 그럼 되지 뭐. 가기로 했잖아. 그럼 남은 일은 마음을 비우고, 잘 지내고 오길 바라야지… 그리고 아들과 여행에 싸워서 토라지지 않고 잘 지내기만을 바래야지.

급하게 마련한 것치곤 비수기라 그런지 비행기 표도 저렴이 구했고, 숙소도 부지런히 매일 움직이면 적정하게 무리 없이 잘 지내다 올 수 있을 것 같았고, 여러 상황에 맞물려 모아둔 유로를 모아보니 굳이 환전할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 모자라면 카드 쓰지 뭐, 어떻게든 안 되겠어?


이틀의 시간은 휙 날아갔다. 짐은… 대충 다 뺐다. 사람 사는 곳이니 없으면 그곳 마트에서 사면되고, 매일 숙소를 옮겨야 하는데 무겁게 혼자 들고 다닐 순 없었다. 아들도 한 손으로 챙겨야 한다. 혼자 한 시간 이상 들고 다닐 것이 무리가 될 것 같은데 그 짐을 다 챙길 순 없다. 샴푸, 치약, 뭐 그런 건 거기서 사람들이 쓰는 거 같이 써보지 뭐!  힘들면 주변에 도와달라고 하자! 그렇게 해 보자!

그래도 Holland Pass라는 것을 미리 끊었다. 1 day 기차표도 끊었다. 기차 타고 하루 정도는 돌아다녀 보자. 그 정도였다.


 

네덜란드 도착, 암스테르담으로 출발

유럽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촤라락~ 포스트 잍에 정리를 시작했다.

비행기 일정 – 예약번호, 항공편명, 각 시간 일정

여권 정보 – 카피 본과 여유 여권 사진은 따로 챙겨 여권과 따로 깊숙이 넣어뒀다

숙소 정보 – 매일을 한 장씩 따로 정리 day 1, 호텔명, 거리 주소, 전화번호

그리고 매일 해야 할 일 딱 한 가지씩만 정하기…

“아들 , 암스테르담 가면 뭐하고 싶어?”

“음 글쎄… 미술관? 박물관? 그리고 시장? 엄마는 뭐할 건데?”

“엄마는 암스테르담은 가봐서 큰 욕심 없고,,, 예전엔 암스테르담 만 가봤는데 다른 도시에 가서 보고 싶어.. 엄마는 좋은 도서관 가보고 싶고, 로테르담이라는 곳에 가면 특별하게 생긴 건물들이 있대.. 구경해 보고 싶어. “

“ 그래 가자. 그래..  우리 잘 지내보자!”

 대낮에 인천을 떠난 우리는 이스탄불을 경유, 밤 10시가 넘어서 암스테르담 스키폴 공항에 도착했다. 시차 적응이 필요한 도시에 갈 때는 저녁에 도착하는 것을 선호한다. 더더군다나 시차적 응이라는 걸 처음 시작해야 하는 아이가 동반자일 땐 더욱 그렇다. 공항에서 걸어서 도착할 수 있는 위치의 숙소에서 잠을 자고 개운하게 여행을 시작해야 한다. 난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다.

그런데 역시 이런 네덜란드. 공항 근처 저렴하게 하룻밤만 자려고 했던 호텔 방은 문으로 막은 화장실 공간도 없고 투명 샤워부스만 떨렁 있는 묘한 공간. 게다가 무인 공간. 다른 방으로 바꿀 수 있냐고 물어볼 수도 없다. 덜컹한 엄마의 심정과는 달리 아들은 입구에서 컴퓨터로 자율 체크인하고 방 키도 스스로 만들어 쓰고, 방에 있는 시설을 배치된 아이패드로 조절하는 것이 마냥 신기해서 싱글벙글하였다.

아들은 각종 스위치 조작에 집중해있다.
난생 처음 보는 이 난감한 풍경에서 아들과 첫날밤.. 이런 네덜란드 같으니라고

  엄마와 아들은 그렇게 보는 시선도 다르고 걱정도 다르고, 받아들인 마지막 기억도 다르다.

 다음날, 구글 맵을 켜고! 암스테르담 시내로 입성.

 교통체계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우리 모자는 혼돈의 연속. 길을 물어 공항의 바쁜 누군가가 자세하고 길게 설명해줬는데, 이해가 되는 말이 없었다.  그래서 대충 여기서 버스를 타고 암스테르담 시내로 들어가서 갈아타라는 말은 알겠는데… 어디서 내리고, 갈아탈 수 있는지, 얼마를 내야 하는지 자세하게 물을 수 없었다.

갈아타야 하는 곳에서 내렸다. 지도 앱이 내 위치를 못 찾길래 가장 가까운 다른 정류장으로 이동해서 트램을 탔다. 아이를 먼저 태우고 낑낑 내 짐과 정신을 겨우 붙잡고 타고 보니 지도 앱은 아직도 혼돈! 그러더니 반대방향으로 움직이는 내 위치가 보였다. 차장 아저씨께 보여드리니 내리란다. 반대로 타라고. 먼저 내린 정류장으로 다시 한 정거장을 짐을 들고 원점으로 낑낑 걸어와 막 도착한 트램을 탔다.  이번엔 실수하지 않으리라 길을 운전자분께 여쭸다. 친절히 들여다보고 다음 정류장에서 내리란다. 긴장모드로 아들 손과 짐을 양손으로 꼭 잡고 문 앞에서 있다가 정류장에서 내리다가 ‘잠깐! 아저씨 저 돈 내야 하는데~” 했더니.. 그냥 가란다. 짐 내리고 아들 챙기고 정신없는 엄마의 상황을 헤아려주신 아저씨가 고마웠다.

 ‘엄마, 네덜란드 좋은 곳인 것 같아. 우릴 다 기다려줘! ‘

 그랬다. 생각해보니. 내가 사는 서울에서는 내가 지금 든 여행 가방, 트렁크를 들고 시내버스를 이용할 생각은 할 수도 없다. 들고뛸 수도 없고 들고 타서도 버스 안에서 잘 버틸 자신도 없다.

서울에서는 내가 가진 커다란 무거운 짐으로 다른 사람의 공간을 방해하지 않는 것이 배려였고, 그곳에서는 커다랗고 무거운 짐을 가진 누군가를 위한 공간을 미리 만들어서 같이 이용하도록 만든 것이 배려였다.

하다 못해 자전거 천국인 암스테르담은 자주 있는 경우는 아니지만 자전거랑 같이 트램에 오를 수도 있다. 아이에게 있어서도 공공장소에서 재촉받지 않았다는 것은 새로운 경험인 듯했다. 더군다나 길을 물어보는 엄마를 위해 트램 운전사가 잠시 멈추고 들여다 봐 주었다. 설명을 해 주었다.

 물론 이후엔 다시는 운전사 분께 묻지 않았다. 돈을 내지 않는 일도 없었다.

 아이는 감동을 받았지만 나는 죄책감을 느꼈다.  혼란스러워하는 나를 위해 최선을 다해준 분께 그들의 월급을 만들고 공공시설과 시스템을 운영하는 기본적인 상호과정을 내가 낯선 도시에서 무너뜨린 것이었다. 확대 해석할 일은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아이에게 설명하고 지나가야 할 일이었으므로 저녁 시간 둘이 마주 앉아 엄마의 잘못을 아들에게 고해했다.

공항애서 버스를 타면 암스테르담은 20분 정도만 달리면 들어간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았으면 반드시 감사해야 하는 것이고 그것은 어떤 식으로든 반드시 표현해야 하는 과정에 엄마가 실수를 한 것이었다고, 그러니 여행 중에라도 혹시 또 엄마가 실수하는 것을 보거든 엄마가 잘못하지 않도록 알려달라고. 아들은 고맙게 고개를 끄떡여주었다.

 숙소에 짐을 내리고 아들과 본격적인 ‘탐구 생활’을 시작했다.

자전거와 보행자의 길은 명확히 구분되어 있고 그 신호도 정확하다. 자동차 자전거 사람 모두 조화롭게 잘 움직인다.

 시장부 터가기로 했다. 어차피 암스테르담에 온 시작점은 ‘먹어보자’ 정도의 것이었으니 어떤 먹거리들이 있는지 보는 걸로 시작하는 것이었다.

 숙소에서 시장까지 걸어가면서, 암스테르담의 운하를 자연스럽게 보고 빽빽하게 붙어있는 집을 보고, 자전거 길을 익히고, 횡단보도 건너는 방법을 알게 되고 (암스테르담의 모든 횡단보도는 버튼을 누르고 기다려야 보행 신호가 떨어진다), 자전거 신호 , 보행 신호를 구분하고, 뚜렷한 보행 신호 없는 곳에서는 사람이 먼저 지나갈 때까지 차가 지나간다는 것을 익혔다. 그러나 서울에서 나고자란 우리 모자는 횡단보도에서 차와 마주칠 즈음 무의식적으로 쭈뼛거리며 멈췄고, 차는 끝까지 우리가 건너갈 때까지 조용히 기다렸다. 그렇게 걸으면서 얘기하면서, 암스테르담이라는 곳에서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바라볼 수 있었다.

시장 입구에 도착 . 바람이 생각보다 많이 분다
치즈는 그런 건가? 곰팡이 가득한 치즈가 진열애 위에 잔뜩이다. 이게 치즈인가보지

 아들은 그중에 가게에서 파는 오렌지 주스에 폭 빠졌다. 매일 저녁 슈퍼마켓에 들러 즉석에서 짜는 오렌지 주스를 제일 큰 통에 꽉꽉 채워 숙소에 돌아왔다. 한국에서도 아마 제일 그리워하는 것 중 하나가 싸고 양 많고 신선한 그 오렌지 주스 일 것이다. 시장을 들어가니 각종 치즈. 과일, 꽃 등 북적북적 대는 곳이 좋았다.

 “아들, 암스테르담에 오면 뭐가 먹고 싶었어? 여기서 찾아볼까?”

“ 음 우선, 하링 샌드위치, 스트룹 와플, 파타 같은 것들? 어! 엄마 저기 스트룹 와플!!”

즉석이서 만들어주는 스트룹 와플 가게

먹은 것들에 대해서 고백하자면,

스트룹 와플은 단 것을 좋아하지 않는 우리 모자에게는 버거운 음식이었고, 파타는 두꺼운 프렌치 프라이였으며 더더군다나 소스를 그냥 케첩으로 할 거였으면 정말 그냥 두꺼운 감자튀김이었다. 하링샌드위치는…. 옆을 지나친 냄새만으로… 시도할 수 없었다. 먹어보질 않았으니 어떻다고 얘기할 수 없다. 시도는 해 봤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후회를 하더라도 제대로 하는 거 아닌가. 시도 도안해 보고는 후회할 자격도 없으니, 하링 샌드위치를 평가할 자격도 없는 우리에게 하링은 암스테르담과 맞물린 기억이 아니다.

나중에 설명을 보니 스트룹 와플은 머그컵에 차나 커피를 담고 뚜껑처럼 머그 컵 위에 올려놓고 그 증기로 말랑말랑하게 만들어 음료와 그 단맛을 중화시켜 먹는 것이 제 맛이라고 한다. 아들은 음식거리들을 낯선 언어들 안에서 빠르게 훑어내리고 있었고 내 머리 속은 진한 커피나 박카스 생각이 간절했다. 그렇지만 암스테르담에서 아들과 걸으며 커피는 금기어였다. 암스테르담에서 커피숍은 커피를 파는 곳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일부 마약이 합법인 암스테르담에서 커피숍은 대마 같은 곳을 합법적으로 피우는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아직 마약과 매춘이 합법인 암스테르담에서 12살 아들에게 적절하게 설명할 요령이 없는 무식한 엄마는 그런 화제를 적당히 피하려고만 고심했다. 그래서 커피 한 잔 없이 다크 서클을 쭉쭉 내리며 도시를 헤맸다. 다른 문화에 들어가 있으면서 그 문화를 이해하고 설명하지 못한 채로 도시를 헤매고 있으니 생긴 벌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암스테르담에서의 커피샵은 단순히 디자인이 독특한 공간이 아니다. 전혀 다른 의미의 공간이다.

 시장을 지나 걷다가 램브란트 광장에 도착했다. 램브란트의 야경꾼이 동상으로 만들어져 있는 곳에 한 눈에 봐도 관광객들이 모여있었다. 아들은 야경꾼 앞에 박혀 있는 부서진 기둥 모양의 큰 돌에 관심을 가졌다. 들고 간 여행 책자를 들여다보고 검색엔진에서 검색해봐도 그 돌의 정체는 알 수가 없었다. 큰 의미가 있는지 아니면 그냥 암스테르담에서만 의미가 있는 흔적인지는 알 수가 없었으나 궁금한 채로 돌아오는 건 좀 서운한 일이었다. 짤막짤막 유명한 곳에 대한 설명서들이 다시 불만스러워지는 순간이었다.

네덜란드의 설명책자를 아무리 들여다 봐도 야경꾼 동상 앞의 돌은 왜 저기에 저렇게 있는지 알 수가 없다.
관광객이 꽤 많았는데 시간이 되니 일시에 사라졌다.

다리가 아프도록 걸어서 담광장까지 도착하고 보니 비가 오기 시작하더니 점점 거세어졌다. 근처 백화점에서 비를 피했다가 안네 프랑크 하우스 쪽으로 발길을 옮기니 거세던 비가 점점 약해졌다. 지도에서 보면 안네 프랑크 하우스는 200미터가 남았는데 긴 줄이 보였다. 물어보니 안네 프랑크 하우스 입장 줄이란다. ‘앞으로 2시간 대기’ 표지판.  나는 20년 전에 가본 곳이라 미련은 없었지만 아들은 한 번 가봐야 할 곳이었기에 잠시 고민을 했다. 2시간을 기다릴 것인가 돌아갔다 가다 시 시도할 것인가. 선뜻 결정할 수가 없어 아들에게 의견을 물으니 오늘은 말고 다음에 시도하자고 한다. 그리하여 일찍 모든 일정을 접고, 마트에서 이것저것 먹을 것을 사들고 숙소로 돌아와 뜨거운 물로 번갈아 목욕을 하고 잘 쉬었다. 여행은 중간중간 잘 쉬어야 잘 돌아다닐 수 있는 것이라고 믿으므로.

하루 종일 수없이 많은 운하를 마주치며 걷고 또 걸었다.

다음 날 목표는 반 고흐 박물관이었다. Holland Pass 가 빛을 발한 날. 암스테르담의 최고 명소 중 하나인 반 고흐 박물관은 아침부터 일찍 서둘렀어도 줄이 길었다. 그러나 뮤지엄 패스 등등의 특별 패스 들은 줄이 따로 있다. 특별히 빠르고 특별히 짧은 줄이.. 그러나 안에 들어가서 짐을 맡기고 찾는 줄은 엄청 길었다. 그러니 가실 분들은 배낭, 겉옷 등등을 잘 생각해 보시길 바란다. 박물관을 보기로 결심한 날은 특별히 작은 짐과 맡기지 않을 겉옷들이 좋을 것 같다.

반 고흐 박물관에서 또 하나 중요한 점. 우리가 알고 있는 반 고흐는 수없이 많은 명작을 그려낸 불행한 삶을 산, 그 시대에 인정받지 못한 천재 화가로 알고 있다. 미술에 아무리 문외한이라도 알고 있는 작품이 있을만한, 설명이 필요 없는 정말 유명한 화가이다. 그래서 반 고흐를 TV에서, 달력에서, 엽서에서, 미술책에서 곳곳에서 수없이 마주친 적이 있다면, 그렇게 유명한 반 고흐의 그림 몇 가지를 알고 있다면 이 미술관에서는 아주 많이 실망할지도 모르겠다. 그리하여 반 고흐 박물관을 간 것이 그렇게 유명한 그림의 실체를 마주하고자 했던 것이라면 말이다.  

반 고흐의 유명한 작품들은 이미 전 세계의 비싸고 유명한 미술관 박물관에서 반짝거리고 있다. 암스테르담의 반 고흐 박물관은 유명한 그의 작품을 마주하는 곳이 아니다. 반 고흐를 마주하는 곳이다. 그를 유명하게 만든 작품이 아니라, 그의 삶을 채운 흔적을 마주하는 곳이다. 여행의 목적이 유명한 것들을 마주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마주친 유명하지 않은 흔적들에 실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진에서만 보던 유명한 것들을 직접 마주치는 것이 여행의 목적이 아니었다면, 과거의 흔적과 박물관 밖으로 나서면 마주칠 현실을 공기를 마시고 부딪히면서 생각하는 것이 그 여행의 목적이 었다면 기꺼이 기뻐하시라. 반 고흐의 내면을 변화를 서서히 천천히 더 많이 마주하기엔 더없이 좋은 곳이니 말이다.  

반고흐 박물관, 네덜란드의 날씨는 내내 흐렸고 네널란드 사람들은 비오는 날씨들 속에도 그대로의 일상이 있다. 박물관 옆 잔디 , 아이들이  운동복을 입고 비를 맞고 잔디밭을 뛴다.

 

우리는 박물관을 나서 델프트와 로테르담으로 가기 위해 기차역으로 갔다. 나의 목적지인 델프트 공대 도서관과  로테르담 도서관을 가기로 했다. 네덜란드는 기차 이동이 매우 용이하다. 이건 뭐 경인선 수준 아니야? 싶을 정도로 기차가 자주 오기도 했고 노선도 심플해서 이해하기 좋았다.

기차를 타고 헤이그 역을 지났다. 우리 역사의 마음아픈 흔적이 남은 곳이다.

 델프트 역에서 내려서 델프트 공대를 보고, 거기서 다시 15분을 기차 타고 가면 로테르담이다. 델프트 역에 내리니 바람이 매서웠다. 날아가나 싶었다. 길을 걷는데 옆에서 자전거는 우수수 쓰러졌고 무언가 들이 회오리치며 날아다녔고 온 몸의 옷을 움켜쥐고 간신히 걷다 방향을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들어 정면을 보면 사람들도 바람에 기울어져 걷고 있었다.  겨우 도서관에 도착, 바깥은 가만히 있는 모든 것들이 서로 부딪쳐 시끄러운 소리를 내고 있는데 멋지게 책이 쌓여있는 도서관 내부는 정말 환상적인 공간이었다. 날씨가 좋으면 기울어진 도서관 벽에 깔린 잔디 위에서 누워서 책을 볼 수 있는 멋진 곳이었다. 내심은 과학자가 되고 싶다 말하는 아들이 멋진 도서관이 있는 곳에서 공부했으면 하는 흑심이 있었기 때문에 멋진 도서관이 많은 외국의 대학교를 가보는 코스를 살짝 툭 무심한 것처럼 아무것도 아닌 듯 집어넣은 것이었다. 물론 지금은 델프트 공대하면서 무시무시한 태풍 바람이라고 기억하지만, 도서관도 확실히 기억하는 듯하다.

 한눈에 반한 델프트 공대 도서관 내부
이런 도서관을 옆에 두고 공부하지 않는 것은 죄악이다.  보면 정말 그런 생각이 든다

‘엄마 거긴.. 지금 우리 학교보다 100배는 넘게 큰 곳이었어’라고 이야기한다.

‘그곳은, 해 보고 싶은 공부가 있다면 고민해 보고 시도해 볼 수 있도록 많은 것들이 준비되어 있는 공간이야. 하나만 해보기보단 100가지를 해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랄까”라는 근거 없는 궤변으로 대답했다. 근거라면 단 하나 그렇게 책이 많은 도서관이라면, 도서관에 그렇게 신경 쓰는 곳이라면 그 정도가 아닐까 라고 제멋대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뜬금없는 맹신은 로테르담에서도 여전해서, 로테르담 시립 도서관 같은 곳이 있는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모두 멋지고 여유 있는, 배울 점 많은 뭔가 우수한 사고방식의 사람들이 어울려 사는 곳일 거야 라는 제멋대로의 환상을 아이에게 주입했다. 나의 이 환상은 현실에서 멈췄다. 로테르담 도서관은 인터넷에서 본 사진으로 끝이었다. 일주일에 단 하루 도서관이 쉬는 그 시간 동안만 로테르담에 있었기 때문이다.  여전히 비 오고 바람 부는 로테르담의 큐브 하우스에서 머문 하루는 우리 아들에게 겉으로 보는 것만큼 속도 좋을 수 없다는 교훈만 확실히 남긴 듯했다.

로테르담의 독툭한 건축물들을 상징하는 큐브 하우스는 숙소로 사용된다. 안은 좀 춥고 불편했다.
아이들에게도 멋지다는 이 도서관을 겉에서만 봤다. 책도 도서관도 겉이 아닌 안을 봐야 하는 것인데 말이다.

 아들과의 기차 여정은 풍차 마을에서 멈췄다. 풍차 마을 가보고 싶다는 아들의 의견을 따라 가봤던 옛~날의 기억을 더듬어 도착했더니 생각보다 좋았다. 또다시 잔뜩 걷고 조금 헤맸지만, 또다시 착한 사람들의 길 안내를 받고 맛있는 치즈를 먹었고, 핫도그 아저씨의 네덜란드의 차갑고 사나운 날씨에 상처받지 말라고 해주신 위로도 듣고, 아저씨의 따뜻한 핫도그를 아들이 맛나게 먹어주어서 고마웠다.

풍차 마을에 풍차가 많이 남아있지는 않다. 그러나 끊임없이 가꾸고 손질하고 노력하는 마을 사람들의 노력이 곳곳에 보였다. 그래서 이쁘고 무척 좋은 기억이 남는 곳이다.

암스테르담에 돌아와 잘 쉬고 다음 날, 안네 프랑크 하우스로 아침 일찍 갔고 여전히 줄은 ‘앞으로 2시간 표지판’ 옆이었다. 비도 바람도 거셌다. 20년 전에 갔던 안네 프랑크 하우스랑은 달랐다. 예전엔 이렇게 좁고 불편한 곳에서 살았구나 싶었지만 20살 때는 생각보다 좋다고 생각한 부분도 솔직히 있었다. 생각보다 아주 끔찍할 정도는 아니었구나 싶었다. 부엌도 있고 침대도 있고 생각보다 생활을 영위할 것들이 많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 가보니 관람객을 배려한 것인지 공간에 가구 하나 없이 깔끔하게 다 치워져 있었고 벽에 사진들만 남겨져 있어 그마저 아주 좁다는 느낌도 별로 없었다. 나를 돌아보자면 20살의 나는, 그래 전쟁은 그렇게 끔찍한 것이었지. 한 번도 이 명제에 어긋난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반복되는 인사처럼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전달이 된 적이 없었다.  사진에서의 한계, 글에 서의한 계라는 경계선에 놓여 있었다. 안네의 흔적을 따라가면서 20년 전의 기억을 더듬었고 비교하느라 바빴다.  그러다 전시관 마지막에 빠져나와서야 머리를 휙 내려치는 그 기분이 갑자기 덮쳐 눈물이 터졌다. 겨우 우리 아들 또래였던 그 아이. 하루 종일 발소리를 죽이고 큰 소리로 웃지도 못하고, 친구들과 깔깔거리지도 못하고, 가족 이외의 사람들 앞에선 잘못도 없이 사라져야 할 대상이었기에 이해하지도 못하는 상태로 주변을 웃으면서 둘러보지도 못하는 겁을 먹은 채로 살아야 했던, 그리고 그렇게 그 공간에서 바깥으로 한 발자국 떼지 못했던. 겨우 10여분 남짓 스치듯 지나가며 경험한 것으로는 이해하지 못했던 20살의 나는 40살이 되어서야 또래의 아들을 데리고 가서야 그 공간을 조금 더 이해했다.

모두에게 소중한 아이들. 이 아이들은 소중하게 잘 지켜져야 한다.
안네프랑크 하우스 방명록에 아이가 뭐라고 적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이 기억이 나중에 또 한 번 아이에게 언젠가 무언가 되짚어볼 수 있기를 바란다.

아들과 Rijks Museum에서도 여러 가지 좋은 경험을 했지만, 사실 아들이 가장 행복해했던 곳은 박물관 앞 광장 비눗방울 아저씨 앞에서였다. 비눗방울을 따라다니면서 참 깔깔대며 행복해했다. 아들은 주머니에 있는 돈을 탈탈 털어가며 비눗방울 아저씨 앞의 동전 통을 채우며 재밌다고 행복하다고 했다.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사람들과 나눠야 하는 정당한 가치를 한 번 더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아들이 여행 중 가장 행복해 한 순간이었다. 아이의 행복한 모습이 나에겐 가장 뭉클했다.

여행을 마치는 그 순간까지 우리는 크게 부딪히는 것 없이 잘 지냈다.

아이는 다른 사람들의 노력에 보상하는 법을 자연스럽게 익혔고, 그 어떤 것도 모를 수 있다는 것도 알았고, 질문을 하는 방법도 알았고, 도움의 감사함도 알았다.


그 정도면 됐다. 아들과 엄마는 이번 여행 동안 아주 충분히 많이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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