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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르네바 Aug 12. 2023

여행의 시작엔 설렘만 있을 것 같나요

취리히 #1


시작부터 이토록 순조롭지 못한 여행을 해 보긴 처음이다! 두 가지 꽤 굵직한 사건이 시간차는 있지만 일의 순서상 연속적으로 발생했다. 어쨌든 이 글을 쓰는 현재 난 취리히에 있으니 결국은 해피엔딩,이라기보단 세이프엔딩이다. 원체 흥분을 잘 하지 않는 편이라 영상이라도 찍어 놨으면 굉장히 평탄한 여정이었다고 오해할지도 모르겠지만 냉정히 생각하면 기분 좋게 이 글을 쓰고 있는 게 꽤 다행스러운 일이다.







어제 아침부터 일을 돌아보면 이렇다. 출발 전날 말 그대로 풀스케줄을 꽉 채웠다. 오전 9시 김제 과외수업, 정오 해금 레슨, 오후 1시 반 그리고 세시 반에 하나씩 수업 두 번. 짬을 내 여자친구를 만나고 밤 열한시 반 또 한 번의 수업. 마지막 수업을 할 땐 졸린 티 안 내려고 애한테 괜히 잔소리하고 목소리 힘주고 온갖 애를 썼다. 자꾸 미루다 매번 출발 직전에 짐을 싸는 스스로를 너무 잘 알기에 이번엔 미루지 않았다. 마음조차 먹지 않았다! 새벽 한시 반쯤 짐을 싸기 시작했다. 예민증이 돋아 똑같은 걸 세 번 네 번씩 확인하며 마침내 준비를 마치니 세시 이십분. 터미널로 출발할 시간에 딱 맞췄다.



새벽 4시 버스를 타고 인천 공항에 8시쯤 도착했다. 공항 환전소에서 유로를 바꿨는데 환율에 놀라기보단 화가 났다. 스스로를 달래며 수속을 하나씩 밟았는데 갑자기 전화가 걸려왔다. 원래 모르는 번호를 받지 않는데 그러면서 과외 상담을 상당히 많이 놓친 것 같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받았다. 어차피 여행 때문에 성사를 못 시킬 게 뻔하지만 그래도.



이 '그래도'를 통해 얻은 교훈! 망설이다가 혹시 모른다고 안 하던 행동을 하면, 그 혹시는 비관적 예상이었을 경우 역시로 바뀌지만 낙관적 예상이었을 경우 불시의 불행으로 바뀐다. 그러니까 그냥 하던 건 하고 안 하던 건 하지 말아야 한다.



수화기 너머 전해진 소식은 접촉사고였다. 이런 우연이 있을까. 하필이면 오늘? 택시를 탈까 고민했던 게 떠올랐다. 비관적이든 낙관적이든 어떤 예상을 하며 고민하던 건 아니었으니까 내 이론의 반례는 아니다. 그저 사는 동네가 아닌 곳에 주차를 오래 해 두는 게 꺼려져서 잠깐 고민했을 뿐이다. 여행 갈 때마다 주차했던 곳이니 별문제 없겠거니 생각했다. 이런 엉뚱한 일이 터질 확률에 대해선 누가 고민하겠는가.



사고자에게 사진을 받아보니 외관상 작은 문제에 불과했다. 차를 아끼는 사람이라면 몰라도 나는 여기저기 찌그러진 상태로 다니며 사람들이 차 왜 그러냐 묻는 질문이 귀찮게 여겨지는 것 말곤 전혀 거슬리는 게 없기 때문에, 나중에 말 바꾸는 일 없을 거라고, 그냥 넘어가도 된다고,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 아무래도 찝찝한가 보다. 귀국한 날에 전화하자길래 그러자고 했다.



이륙까지 세 시간을 그냥저냥 잘 보냈다. 피로가 심해 몽롱한 상태로 무거운 짐을 이고 왔다 갔다 했다. 무식해서 몸이 고생하는 게 아니다. 생각이 없어서 고생하는 거다. 무식한 것과 생각이 없는 건 다르다. 사람들이 끌고 다니는 카트를 보고도 하나 챙길 생각을 바로 못하다니. 컨디션 때문이겠거니 했다. 기시감이 느껴지는 것도 기분탓이려니 했다. 하여튼 긍정적이다. 몸도 힘들어 죽겠는데 괜히 자책하며 스트레스까지 받을 필요는 없으니까!



탑승하고 이륙을 기다리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엔진에 가속이 붙지 않았다. 가속은커녕 가만히 한 시간을 버티고 있다. 항공로가 혼잡하여 경로를 받지 못하고 있다나. 20분 뒤에 출발한다는 기내 방송이 전달된 것은 이미 예정 출발시각에서 한 시간쯤은 지난 뒤였다. 그러니까 거의 한 시간 반이 지연된 것이다. 재빨리 계산에 들어갔다. 환승까지 여유 시간이 원래 두 시간 정도였다. 한 시간 반 지연에 착륙 후 기체와 건물 복도 연결되는 시간이나 앞의 승객들이 빠져나가는 시간 등등 다 고려하면...... 이러다 환승 못하게 생겼다!



13시간 후, 환승 게이트가 닫히는 시간이 20시 25분인데 20시 10분까지도 아직 기체 안에 있었다. 출발 시각이 45분이니까 25분 넘어 도착하여도 말 잘하면 열어주겠지 싶었다. 승무원에게 물으니 탑승 불가자들은 새로운 노선에 안배를 했는데 나는 거기 들지 않았다고 한다.



자, 달리자. 45분만 안 넘기면 되겠지 뭐. 이거 놓치면 숙박비 날리고 비행기 티켓도 다시 끊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에 참으로 낙관적이고 마음 편하다. 있는 힘껏 달리지도 않았으니 정말 나 자신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큰일 났다!라고 생각은 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뭐 어떻게든 되겠지?' 했다.



파리 드골 공항 구조가 신기했다. 게이트가 옹기종기 모여있는 느낌이었다. 바닥이 빨간 카펫으로 덮여 있어서 와글와글 분주한 마당에도 고급스러웠다. 이런 생각을 하며 게이트 앞에 도착하니 38분이었다. 출발 7분 전! 내 앞에 승객 한 명이 또 있었는데 뭔가 문제가 복잡해 보였다. 승무원이 도중에 날 먼저 들여보내줬다. 이 할머니, 뭐라고 따진 것 같았다. 쟤를 왜 먼저 들여보내주냐! 이런 거였나? 어쨌든 이분도 잘 탑승한 것 같았다. 취리히에 도착하여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지 복도에 가만히 앉아계신 걸 보았다.



차량 접촉사고와 비행 지연, 취리히행 게이트 클로즈런, 그리고 드디어, 취리히 공항 근처 캡슐 호텔에 체크인! 열흘 하고도 이틀 더, 12일이라는 어중간한 기간의 여행이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 와중에 캡슐호텔 퀄리티는 기대 이상이다. 세련되고 깨끗한 실내 디자인은 그다지 편리할 것도 없는 캡슐호텔이 가성비 높은 곳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샤워시설도 널찍하다. 캡슐은 답답하긴 하지만 잠을 제대로 못 잔 지 거의 24시간이 지났으니 기절하듯 잘 것 같다. 아래 캡슐호텔 사진을 몇 장 남겨둔다. 여행일지를 쓸 목적이라도 없었으면 아마 한 장도 찍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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