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부소산성을 찾아
내자의 여름휴가를 맞아 백제의 고도 부여로 가족여행을 떠나기로 한 것은 갑작스러운 결정이었다.
토요일 오전 10시경, 내비게이션을 고란사에 맞추고 기대에 부푼 가슴으로 차에 올랐다. 경부고속도로를 거북이걸음으로 가다가 천안까지 정체구간이라는 정보가 나오자 결국에는 기흥을 지나 국도로 빠져나왔다. 그러나 한동안 잘 달리던 국도가 평택을 지나면서 천안을 통과하기까지 많은 교통신호 때문에 지체될 줄이야. 천안에서 다시 경부고속도로에 들어왔다가 천안 논산 고속도로를 타고 광주 방향으로 달렸다. 시원하게 달리던 차가 톨게이트에서 지체되더니 터널을 통과할 때까지 달릴 줄을 모른다. 천신만고 끝에 부여에 도달하니 시간은 거의 오후 5시 반, 출발부터 도착까지 2시간 반 거리를 7시간 넘게 걸린 것이다.
전부터 방문하고 싶었던 백제의 고도 부여를 마주한 감회에 가슴이 뜨거워진다. 1인당 2천 원씩의 입장료를 지불하고, 내자와 딸과 함께 백제의 역사가 살아 숨 쉬는 부소산성에 오르면서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조금이라도 백제의 옛 향기를 카메라에 담아 가고 싶은 마음에서다. 사진 찍으러 다니냐며 내자가 연신 핀잔을 주지만 아랑곳하지 않는다.
산책코스로도 좋은 부소산성의 길을 따라 오르면서 백제의 세 충신인 계백장군과 좌평 성충, 그리고 흥수를 모신 사당인 三忠祠, 왕이 만조백관들과 더불어 떠오르는 태양을 맞이했다는 迎日樓, 군대 창고자리가 있었던 軍倉地, 半月樓 등을 지나 드디어 3 천궁녀가 절개를 지키기 위해 꽃처럼 떨어져 내렸다는 역사적인 낙화암에 당도했다. 부소산성의 절벽에 위치한 바위 위에서 치마를 감싸 안고 백마강 위로 뛰어내리는 꽃송이 같은 궁녀들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나당연합군에게 짓밟힌 백제의 비운을 슬퍼해본다. 3천 궁녀를 기념하여 정부에서 세운 백화정은 눈길을 사로잡는 절경이다.
낙화암 우측 길로 빠져 백마강 쪽으로 내려가니 고풍스러운 사찰 고란사가 나타난다. 예상보다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다. 극락보전에 참배 후 절벽에 아슬아슬하게 붙어 있는 삼성각에 들렀는데, 삼성각 아래로 백마강의 고요한 물결은 태고의 신비를 갈무리한 체 유유히 흐르고 있다.
극락보전 뒤편으로 가서 내자가 떠서 건네주는 고란사 약수를 한 모금 마셨다. 갈증 난 목에 흘러내리는 청량감은 말 그대로 甘露水였다. 중생의 고통을 씻어내리는 불보살의 가피인양 마시고 또 마셨다. 마시고 나서 눈을 들어보니 곁에 걸려있는 액자에 담긴 약수에 얽힌 이야기. 한잔만 마셔도 삼 년이 젊어진다는 물을 어느 할아버지가 수없이 마시고 아기가 되었고, 할머니는 아기가 된 할아버지를 잘 길러서 마침내 국가의 인재를 길러내었다는 전설. 나도 몇 잔이나 마셨으니 한 삼십 년쯤 젊어진 것은 아닐까? 그 옆에 투명한 플라스틱(?) 항아리가 걸려있는데,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은 조그만 바위와 그 틈새에 자라고 있는 유명한 고란초가 아닌가? 고란사의 약수와 고란초 이야기는 중학교 때인가? 고등학교 때인가? 국어교과서에서 읽었던 기억이 난다.
원래는 고란사 참배를 마치고 고란사 아래에 있는 선착장에서 유람선을 타고 주차되어 있는 정문 쪽으로 내려갈 생각이었으나 고란사에서 시간을 지체하다가 7시 마지막 배를 놓쳐 버렸으니 딸에게 계회성 부족이라는 불평을 한없이 들어야만 했다.
백화정 쪽으로 다시 되돌아와서 올라온 방향과는 반대로 우측으로 내려오니 부소산성을 한 바퀴 일주한 셈이다. 부소산성을 내려와 연꽃으로 유명한 궁남지 연못으로 향했다. 동료교사도 전화로 궁남지를 추천했고, 부소산을 함께 내려온 한 젊은이로부터도 연꽃 축제를 하는 궁남지에 대해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한 5분쯤 달렸을까? 궁남지 무료주차장에 주차하고 궁남지로 들어서니 오후 8시가 넘어 어스름이 내렸다. 연꽃 축제가 얼마 전에 끝나서 아름다운 연꽃을 볼 수 없어 아쉬웠지만 어둠 속에서도 눈앞에 펼쳐지는 드넓은 연지(蓮池)는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푸르게 자라고 있는 넓은 연잎을 바라보며 아름답게 장광을 이루었을 연꽃을 상상으로 채워본다. 구경할 거리는 아직 많이 남아있지만 날은 어두워지고 아직 숙소도 정하지 못한 신세다.
저녁식사 전에 숙소를 구할 생각에서 롯데부여리조트로 차를 몰았다. 방이 있을까? 머리에 떠오르는 의문을 안고 도착한 롯데부여리조트는 일류호텔 못지않게 으리으리했다. 이곳에서 저녁을 보낼 수 있다면... 그러나 프런트에 확인해 본 결과 우리 바로 앞 고객에게 마지막 방이 나가고 빈방이 없다고 한다. 아쉬움을 안고 서울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