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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산별곡 Nov 14. 2024

그날의 수채화

우정은 아지랑이 같은 것

고향 친구 아들 결혼식에 하객으로 갔다가 임소장과 전사장을 만나 홍천으로 떠나게 된 것은 전격적인 결정이었다. 식사를 막 마쳤을 무렵 휴대폰이 울렸다. 강원도 홍천에서 배추와 무 사업을 하는 조사장이 부조를 전달해주기를 부탁하면서 시간 나면 홍천에 놀러오라고 인사치레로 덧붙였는데, 옆에 있던 전사장이 곧장 주소를 물었다. 그리고 나의 애마 흑풍(검은색이고 바람처럼 시원하게 달린다는 의미에서 흑풍이라 지음)이 경춘고속도로를 달리게 되었으니 그야말로 농가성진(弄假成眞)이 된 것이다.


붐비는 차량 때문에 두 시간이면 닿을 거리를 네 시간이나 걸려 강원도 홍천군 내면 방내보건진료소 인근에 있는 무밭 앞에 차를 세운 것은 태양이 서산으로 넘어가고 있는 오후 5시 무렵이었다. 햇볕에 그을은 구릿빛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지으며 무밭에서 나오는 사람은 바로 농장주인 조사장.


   "농담으로 말했는데 진짜 왔네."

   "우리는 온다카면 온다카이"


전사장이 맞받아쳤다.


   "잘 왔네. 올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찾아 주어서 고마워"

   "갑자기 와야지 계획 세우면 못온다카이"


전사장의 말이 일리가 있었다. 계획을 세우면 이런 저런 사정 때문에 실천에 옮기기가 쉽지 않은 까닭이다.


조사장의 넓고 푸른 고랭지 무밭이 보는 눈을 시원하게 만든다. 3,4명의 외국인 노동자들의 부지런한 손놀림에 뽑혀져 나온 무가 미인경연 대회에 나온 미녀들처럼 푸른 머리에 늘씬하고 하얀 나신을 자랑하며 이랑을 따라 일열로 누웠다. 풍만하고 탐스러웠다. 가끔 트럭이 와서 무를 포장한 박스를 가득 싣고 어디론가 떠나곤 했다. 무 뿐만아니라 호미를 들면 무를 뽑아낸 자리에 알토란 같은 감자가 딸려 나오니 땅을 얼마나 경제적으로 활용을 하는지 알 수가 있었다.


조사장은 한 해 농사에 수십억이 왔다갔다하는 대규모 기업농이지만 별로 힘들이지 않고 수월하게 전화로 농사를 짓는단다. 농부들이 1개월 정도 농사지은 무를 밭떼기로 사서, 시기에 맞춰 전화하면 전문 업체에서 사람이 나와 약을 치고, 또 다른 업체에서 사람이 나와 비료를 준다. 이렇게 2,3개월 정도 관리한 후 전화해서 판매처로 실어보내면 그만이다. 손가락만 까딱하면 대규모 농사가 지어지니 참 편리한 세상임에 틀림없다. 농작물은 작황에 따라 손익이 많이 달라지는데 올해는 무값이 좋아서 수익이 많을 것이라는 예상이다.


조사장이 내 차 트렁크에 선물로 무 3박스를 실었다. 임소장과 전사장의 무박스를 집까지 운반해주는 것은 나의 몫이다. 부인과 함께 설악산 산행을 마치고 우리보다 먼저 무밭에 도착한 조샘은 부인이 운전하는 차에 무 박스를 실어 이미 집으로 보낸 뒤였다. 친구가 직접 가꾸어 정으로 선물한 무로 깍두기를 담그면 더욱 맛이 있으리라.


강원도 산골에 땅거미가 내리고 우리는 조사장을 따라 시내에 있는 한우집으로 갔다. 건배하며 먹는 고소한 등심은 감치는 맛을 자아냈다.


   "진짜 올 줄 몰랐네. 나는 그저 인사치레로 말했는데 "

   "우리는 온다카면 온다카이"


똑같은 대화가 이어졌다. 조사장은 아직도 우리가 찾아온 것이 믿어지지 않는 모양이다.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유자원방래 불역낙호)

벗이 있어 멀리서 찾아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논어에 나오는 공자의 인생삼락 중 하나이다. 친구들이 멀리에서 찾아와 반갑다며 거듭 소회를 밝히는 조사장의 심경이기도 했다.


  "정말 반갑네. 앞으로 제주도든 고창이든 대관령이든 내가 가는 사업장 어디나 찾아와 주게. 이렇게 생각지도 않게 친구들을 만나 한잔 마시며 얘기하니 행복하네."

   "산골 생활이 불편하지는 않는가?"

   "무슨 소리~ 나는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고 여유롭게 즐기는 자유로운 삶이 너무나 좋아."


편리한 도시의 삶을 마다하고 전원에서 낭만적인 삶을 살아가는 조사장이 부러웠다. 벼슬 생활을 청산하고 전원으로 떠나는 중국 동진의 시인 도연명이 노래한 것처럼 나도 언제나 귀거래사를 읊을 수 있을까? 연신 잔을 부딪치며 이어지는 정담은 산골의 고한 저녁을 퍼져 나갔다.


기분좋은 포만감을 안고 우리는 식당을 나와 밤거리를 걸었다. 시골의 상쾌한 공기가 뺨을 스쳤다.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은 무슨 밀어를 속삭이고 있을까? 원래 서울로 돌아갈 생각이었으나 시간이 늦었고, 더구나 조사장이 하룻밤 자고 내일 송이버섯과 풍천장어를 먹고 가라고 부추긴다.

  "에라~  이왕 늦은 김에 하루 더 놀다 가자."

누구에게서 먼저 나온 말인지 모르겠다. 아니, 우리 모두의 공통된 심경일 것이다.


우리는 차로 약 10여분 산길을 달린 후에 숙소인 '하얀집'에 도착했다. 조사장이 어느새 이 멋진 펜션을 예약해 놓았을까? 은은한 가로등 불빛 속에 드러난 펜션은 아담하면서도 정겨운 산골의 운치를 발산하고 있었고, 방 천정에 드러난 서까래와 황토흙벽이 꾸밈없는 수수함을 느끼게 했다. 참으로 마음에 와 안기는 집이었다. 세심한 조사장 부인은 음식과 주류는 물론 세면도구까지 마음을 기울여 감동을 주었다. 조사장 부인이 집으로 돌아간 후에 우리는 포도와 마른 안주로 또다시 잔을 기울이며 미진한 대화를 이었다. 고요한 산골 운치있는 펜션에서 친구들과 함께 밝히는 밤은 얼마나 멋진가? 12시 가까이 되었을 무렵 조사장과 전사장은 옆방으로 건너가고, 나와 임소장 그리고 조샘만 남았다. 방 하나만 해도 좁지는 않지만, 편하게 자기 위해 방을 두 개 예약했던 것이다.


신선한 밤공기가 그리워서 대화를 나누는 임소장과 조샘을 남겨 두고 혼자 밖으로 나왔다. 펜션 인근의 숲에서 이름모를 풀벌레가 연주하는 애잔한 음률, 펜션을 지키듯이 마당에 서서 고적한 밤을 밝히는 은은한 가로등, 그리고 서울에서는 보기 힘든 찬란한 별빛이 가슴에 안기며 낭만적인 동화를 들려 주었다. 어디 그 뿐인가. 방에서 도란도란 들려오는 두 친구의 대화는 또한 따뜻한 정감을 불러 일으켰다. 힐링이었다. 세속의 응어리가 정화되는 카타르시스의 순간이었다.

  

펜션의 아름다운 밤은 속절없이 흘러 어스름 속에 새벽이 밝아왔다. 아직 꿈나라를 헤매는 친구들이 깨지 않도록 조용히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상쾌하다 못해 달콤한 공기. 약 100m 떨어진 도로 입구까지 나오니 건너편 산 언저리에 엷은 단풍이 수줍은듯이 살포시 내려 앉았다. 벌써 화려하게 단장할 산을 꾸밀 준비를 하나 보다. 뒤돌아서니 길 좌우의 예쁜 꽃과 나무들을 배경으로 서있는 펜션은 한폭의 그림이었다. 언젠가 여기에 다시 와보고 싶은 마음은 욕심일까?


세수를 하고 일행은 흑풍에 올라 아침식사하러 조사장 부부가 거처하는 집으로 향했는데, 도중에 너른 무밭이 나타날 때마다 조사장이 모두 자신의 무밭이라고 담담하게 소개를 했다. 아마 홍천에서 그의 무밭이 가장 넓을 것이다. 5,6분쯤 달렸을 때 조사장 부부가 거처하는 아담한 농가가 나타났다. 조사장 부인이 조촐하면서도 맛난 아침식사를 준비했고 우리는 식사를 한 후에 밖으로 나왔다.


홍천에는 잣나무가 많다. 산 곳곳에 잣나무의 군락이 보인다. 옷깃을 적시는 가랑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친구들과 잣 구경도 하고 몇 송이 기념으로 소장하고 싶어 도로에 인접한 산으로 갔다. 잣은 한 그루에 서너 방울씩, 그것도 나무 꼭대기에 달려 있어서 따기가 쉽지 않았다. 조사장이 날렵하게 나무에 올라 가지를 흔들어 겨우 네댓송이 딸 수 있었다. 고소한 잣을 먹어보기는 했지만 수확하기가 쉽지 않고, 또한 힘들게 딴 잣방울에서 잣 알갱이를 뽑아내는 공정을 거쳐야 하니 수고로움이 뒤따른다는 것을 알게 되어 소중한 체험을 한 셈이다. 장갑을 끼었음에도 잣방울의 진액이 손에 묻어 끈적 끈적했다.


점심시간에 조사장 지인이 고창에서 풍천장어를 가져와 맛난 풍천장어를 포식할 수 있었다.

사회 친구들과 달리 고향 친구들은 체면 차릴 일도 없고 언제 만나도 스스럼이 없다.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는 법, 회자정리 거자필반은 진리이거늘 어쩔 수 있으랴. 

점심식사를 마친 후 재회를 약속하며 흔드는 이별의 손길은 아쉽기만 하다. 조사장의 얼굴에 영롱한아지랑이가 아롱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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