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가다가 남의 집 담장에서, 또는 공원에서 장미를 보게 되면 내 마음은 어느새 세월을 거슬러서 옛 교정으로 달려간다. 벌써 십년도 넘은 세월이 흘렀지만 그 시절에 피어난 장미는 조금도 시들지 않고 아직도 마음 속에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있다.
기승을 부리던 무더위가 물러가더니 첫얼음이 얼었다는 보도가 흘러나왔다. 상궤(常軌)를 벗어난 계절이 하루 이틀이 아니지만 이러다가 가을을 건너뛰고 곧바로 겨울이 오는 것은 아닌지.
“어린 왕자님 안녕?”
서늘한 바람을 온몸으로 받으며 교정을 거니는데 영롱한 목소리가 날아든다.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음색으로 보아 누구인지 자명하다.
“장미 안녕?”
댕기머리가 나풀거리며 춤을 추듯 달려오더니 스스럼없이 팔짱을 낀다. 3학년 모반에 있는 k양. 어느 때부터인가 나를 어린왕자라고 부르며 자기를 장미라고 불러달란다. 지천명(知天命)의 나이에 여고생으로부터 어린왕자라는 말을 들으니 간지럽기만하다.
고등학교 3학년 영어독해 교과서에 어린왕자 이야기가 나온다. 프랑스 작가 생텍쥐페리가 조종사 경험을 바탕으로 쓴 이 이야기를 아마 당신도 읽어본 적이 있을 게다. 읽지 않았더라도 금발에 머플러를 나부끼는 어린왕자의 모습을 어디선가 보았을지 모른다. 너무도 유명한 그림이니까.
끝없이 넓은 우주의 한 모퉁이에 ‘B612’라는 어린왕자가 혼자 사는 소혹성이 있다. 소혹성은 너무나 작아서 무릎까지 오는 2개의 화산과 1개의 사화산이 어린 왕자가 가지고 있는 전부다. 어린왕자는 화산의 불로 밥을 하고, 사화산은 의자로 사용한다. 외로울 때는 의자에 앉아 일몰(日沒)을 감상하는데, 너무나 외로울 때는 하루에 43번이나 해가 지는 모습을 구경하기도 한다. 어떻게 43번이나 해지는 모습을 감상할 수 있느냐고? 지구에서 해지는 모습을 보려면 지구의 반대쪽까지 날아가야 하지만, 어린왕자가 사는 별은 매우 작아서 의자를 조금만 뒤로 이동시키면 되기 때문이다.
어느 날 우주에서 날아온 씨앗이 아름다운 장미꽃을 피우면서 어린왕자의 삶은 분주해진다. 연약한 장미에게 물을 주고, 벌레가 덤벼들지 못하도록 고깔을 씌어주고, 비바람을 피하도록 천막 뒤에 장미를 보호해 주며, 한편으로는 바오밥 나무의 싹이 자라서 소혹성을 파괴하지 않도록 매일 바오밥 나무를 뽑는다. 그러나 우주에 장미는 자기 하나 뿐이라며 교만한 장미의 말에 화가 나서 장미를 남겨두고 소혹성을 떠난다. 가식 뒤에 숨어있는 장미의 사랑을 깨닫지 못한 채...
금발에 머플러를 나부끼며 순진하고 용감한 어린왕자는 이렇게 기약없는 여행을 떠난다.
광막한 우주를 여행하며 어린왕자는 다양한 별을 지난다. 한 사람의 신하도 없이 권위에 사로잡혀 있는 왕의 별, 자기를 숭배하고 박수만 쳐주면 좋아하는 허영쟁이의 별, 술 마시는 것이 창피해서 그 창피를 잊기 위해 술을 마신다는 이율배반적인 주정뱅이의 별, 하늘의 별들을 잔뜩 헤아려서 그 숫자를 적어 서랍에 넣고 자물쇠를 채우면 모두 자기의 별이 된다는 욕심쟁이 상인의 별, 1분에 하루가 지나가는 작은 별에서 가로등을 숨가쁘게 켰다 껐다하는 점등인의 별, 책상에 앉아서 탐험가들의 답사 이야기만 듣고 기록한다는 지리학자의 별 등을 거쳐 어린왕자는 마침내 지구의 사하라사막에 도달한다.
사막의 모래와 바위를 헤매다가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가는 길을 발견한 어린왕자는 어느 정원에서 5000송이나 되는 장미를 발견한다. 어린왕자가 살던 소혹성의 장미는 자기가 우주에서 유일한 장미라고 하면서 뻐기지 않았던가? 그래서 어린왕자는 우주에서 유일한 꽃을 가지고 있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수많은 장미꽃을 보고 실망하여 풀밭에 뒹굴며 운다. 그때 어린왕자 앞에 나타난 여우,
“살아가면서 길을 들이는 일이 중요하단다. 길을 들인다는 것은 관계를 맺는 일이야. 그리고 길들인 것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해. 진실한 아름다움은 눈으로는 보지 못하고 마음으로 본단다.”
어린왕자가 많은 장미를 보고 풀밭에 뒹굴며 울다가 여우와 얘기하는 이 부분이 교과서에 나오는 내용이다. 여우에게서 자기와 무관한 수많은 장미보다 보살펴주고 길을 들인 자기의 장미가 소중하다는 것을 알게 된 어린 왕자는 밤하늘에서 그의 조그만 별을 찾으며 장미를 그리워한다. 그러다가 지구에 온지 1년째 되는 날, 장미가 있는 소혹성으로 돌아가려고 지구에 도착했던 사하라사막으로 간다. 하늘에는 1년 전의 별들이 제자리로 되돌아와 있다. 그러나 머리 위에 보이는 소혹성까지는 무거운 육신을 가지고 가기에는 너무나 먼 거리. 뱀이 허물을 벗듯이 육신을 벗어 두고 가볍게 떠나려는 어린왕자는 사막의 노란 뱀에게 고의로 물려 쓰러진다. 자기가 온 땅으로 보내줄 수 있다는 뱀의 말을 믿으며 조종사가 그려준 양 그림을 가지고...
어린왕자는 자기가 살던 소혹성 B612로 돌아가서 그리워하는 장미를 만났을까?
모 여학생 반에서 어린왕자의 단원이 끝나고 ‘어린왕자가 장미를 만났을까?’라는 주제를 가지고 학생들과 함께 이야기를 이어보았다.
모 학생 왈 “어린 왕자가 별을 떠난 후에 장미는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죽어갑니다. 이때 1년 만에 나타난 어린왕자가 장미에게 키스를 하니, 장미는 아름다운 여인으로 변신하여 행복하게 살아요.” 라며 상상의 나래를 폈고, 이 말을 들은 학생들이 "결혼해요. 결혼해요"라며 합창을 한다.
또 한 학생은 “어린왕자의 보살핌을 받지 못한 장미는 기다림에 지쳐 죽고, 장미의 죽음에 인생무상을 느낀 어린왕자는 불도(佛道)에 귀의합니다.” 라고 철학적인 결론에 도달했으며,
또 다른 학생은 “뱀에게 물려 죽으면 그만이지 어떻게 자기의 별로 돌아갈 수 있어요.” 라며 나름대로의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기도 했다.
이 수업 후에 나는 어린 왕자가 되었고, K양은 장미가 되었지만, 2학기가 되면서 시간표가 변동되는 바람에 더 이상 장미의 반에 들어가지 않게 되었다. 교정에서 장미를 우연히 만날 때마다 장미는 달려와서 왜 자기 반에 들어오지 않느냐며 응석을 부린다. 그러면 나는 말한다. “어린왕자는 소혹성을 떠났노라"고.
그러면 장미는 말한다. “어린 왕자님은 1년 후에 돌아오나요? 1년이 지나면 저는 졸업하고 학교를 떠났을 텐데 교정에 장미가 피어나면 저를 기억해 주세요.”
나는 가끔 밤하늘에서 B612를 찾으며 어린왕자가 아름다운 여인이 된 장미와 춤추는 장면을 연상한다. 그럴때면 밤하늘의 별들이 흔들리며 까르르 웃는다.
‘장미야! 얼마 남지 않은 기간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수능성적을 받기를 바란다... 어린왕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