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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da Nov 06. 2017

이미지 세계의 모험, 유토피아 없는 유토피아로의 귀환

<옥자>(2017)

  봉준호의 여섯 번째 장편영화 <옥자>(2017)는 만화 같은 세계로 우리를 인도한다.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살아 숨 쉬는듯한 슈퍼돼지 ‘옥자’와 산골 소녀 ‘미자(안서현)’가 사는 세계는 맑은 물과 신선한 공기, 온통 푸른 숲인 비현실적 공간으로 주인공이 발붙이고 살아가는 유일한 세상이다. 이 세계는 옥자를 생산한 다국적 기업의 기획, 즉 소비적 삶을 자명한 논리로 하는 도시적 삶과 전혀 다른 공간에 있다. 봉준호 감독 특유의 ‘엇박자’, ‘삑사리’로 불리던 디테일한 연출은 모순의 지형 사이에서 반복된다.

  <옥자>는 봉준호 감독의 전작들에 비해 밝고 경쾌하다. 미해결 살인사건(<살인의 추억>(2003)), 도심을 덮친 재난과 불안(<괴물>(2006)), 모성의 광기와 폭력(<마더>(2009)>), 디스토피아 배경의 계급투쟁(<설국열차>(2013))과 같이 대표적 장편작품에서 느껴지던 무게와는 사뭇 다르다. 주인공이 모순의 세계로 굴러 들어와 좌충우돌을 겪는다는 이야기는 전작들과 유사하다. 어린 소녀 미자(안서현)는 다국적 기업인 '미란도 코퍼레이션'의 마케팅 계획으로 자신의 식구인 옥자(유전자 변형 슈퍼돼지)와 생이별 한다. 미자는 옥자를 구하려 복잡하고 분주한 서울을 거쳐 뉴욕에 도착하고, 옥자를 비롯한 수많은 슈퍼돼지가 죽음을 기다리는 ‘공장식 도축 시스템’의 뉴저지를 거쳐 산골 집으로 무사 귀환하는 모험을 완수한다. 어린아이의 '모험'에 주목한다면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슈가랜드 특급>(1974)이나 <E.T.>(1982)를 단박에 떠올리게 된다. 거대한 몸집의 짐승을 타고 달리는 아이의 ‘순수’에 주목한다면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모노노케 히메>(1997)의 활기를 추억할 것이다. 한편, <옥자>는 소비하는 삶과 더불어 광범위하게 확산된 육식주의와 식품산업의 비윤리성이라는 심각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동물이 인류의 각종 산업(식용, 임상시험, 의류, 반려동물 등)에 도륙되고 있는 현실은 <지구의 거주자들>(2005) 같은 다큐멘터리의 문제의식과 궤를 함께한다. 특히 거대 식품기업과 농·축산업 종사자들에 지배된 인간의 '(육)식생활'에 관점을 맞춘다면 <푸드 주식회사>(2008)에서 ‘악의 유통과정’인 자본주의를 향한 비판적 시선을 공유한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옥자>가 넷플릭스로 개봉되던 올해 여름, 피프로닐(살충제) 오염 달걀이 논란이 되면서 닭의 ‘공장식 밀집 사육’, 인간의 육류소비를 위한 기형적 생산 시스템이 문제시되기도 했다. <옥자>는 비현실적 주인공들이 현실의 주제를 따라 현실을 모험하는 만화 같은 이야기로 동시대의 세계를 돌아보게 한다.

  <옥자>는 식품산업의 생태계를 장악하는 다국적 기업의 세계와 맞부딪히면서 봉준호 작품 특유의 리듬과 활력으로 전개된다. 미자와 옥자의 여정은 민족국가에서 출발해 전 지구적인 범주로 나아가며, 모순된 집단과 인물의 내용이 세계를 재현한다. 후기 자본주의 체제의 ‘미국적 표준화’와 소비적 삶에서의 갈등은 약자들의 ‘사랑’이란 작고 순수한 관계, 소박한 가족이란 공동체로 전치되고 봉쇄된다. 흥미로운 점은 서울 도심의 모험을 다루는 활기가 뉴욕-뉴저지로 재현되는 미국의 공간에서는 제한적이며 전 지구적인 공간은 폐쇄적인 장면의 이어붙임으로 재현된다는 사실이다. 산골 집으로 귀환했을 때 우리는 전작들과 다른 결말을 마주한다. 유토피아 없는 유토피아로의 귀결, 아무 동요 없이 살던 대로 살아가는 인물들의 무심함. 이 글은 영화의 결말이 내비치는 ‘무심함’의 정서를 질문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미지 세계의 모험과 충돌

  미자는 모순의 세계에서 고군분투한다. 어린 소녀가 맞닥뜨리는 세상은 옥자를 어떤 방식으로든 ‘이용’하려는 전체인 세계다. 슈퍼돼지 옥자는 육류 가공식품의 원재료, 기업 이미지의 마케팅 수단, 진실을 밝힐 통신수단, 생체실험 대상 등 각기 다른 집단의 이해에 둘러싸여 있지만  미자에게는 그저 친구이자 가족일 뿐이다. 10년 넘게 미자와 사는 옥자는 미란도 회사의 새 주인인 루시(틸다 스윈튼)의 계획에 의해 탄생했다. ‘자연과 과학의 경이로운 융합’이란 루시의 계획은 환경파괴를 최소화하고 식량문제를 해결한다는 기업 이미지다. 루시는 노동자를 착취해 생을 쥐어짜던 지난 세대(아버지)의 피 묻은 역사를 낡은 이미지에 가두고 모든 모순을 철폐하는 '모순의 해결자'란 이상적 이미지를 만든다. 기업의 최고 경영자는 '이미지'의 창조자다. 이념을 홍보하는 유쾌한 영상, ‘콘테스트’로 기획된 대규모 페스티발, 반복적으로 연습하는 자신의 날인과 쿨한 스타일, 잘생긴 슈퍼돼지 '이미지'는 '유전자 변형 돼지'의 기형적 본 모습과 대중적 불안을 봉쇄한다. 루시가 두려워하는 것 역시 특정 ‘이미지’다. 앞서 언급했던 낡은 기업인(아버지)의 폭력과 억압에서 온 ‘공포’이미지가 청산할 이미지였다면, 축산농민의 손녀와 옥자를 생이별시킨 ‘극악’한 이미지는 루시를 불안에 떨게 만드는 것이다. 이 이미지의 부정적 파장을 상쇄할 대책 역시 '슈퍼돼지 페스티발'에서 주목받을 옥자와 미자의 ‘감동적 재회’란 이미지다. 미자는 루시의 기획에 등 떠밀려 미국으로 출국한다.

  ‘레티나 디스플레이’의 투명함에 관심이 많은 미자는 이미지가 지배하는 도시로 미끄러지듯 질주한다. 흙먼지를 일으키던 산길은 끝도 없는 아스팔트 도로로 이어지고, 어느새 도심 지하철에 몸을 싣은 미자는 마찰 없는 매끄러운 타일과 내부가 훤히 보이는 미란도 지사의 자동문 앞에 멈춰선다. 그러나 이 산골 소녀는 도시의 흐름에 익숙지 않아 자주 몸을 부딪치고 마찰을 일으킨다. 지하철 부감쇼트는 일방향의 도시적 흐름에 역행하는 미자를 비춘다. 미자의 붉은 트레이닝 복은 퍼런 도시인 무리를 도드라지게 방해한다. 미자는 몸은 도시와 충돌한다. 자신을 들어가게 해달라는 메시지가 거절당하자 미자는 온 몸을 부딪혀 내부로 진입하려 한다. 유리문의 둔탁한 소리는 번들거리며 빛나는 이미지 세계와 미자의 세계를 가로막는 두께를 반영한다. 옥자의 육중한 무게로 충돌하는 유리문은 지하상가 시퀀스에서 다시 한번 반복된다. 미자-옥자는 미끄덩 자빠지며 지하상가 잡화점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놓는다. 반듯하게 진열된 잡화점 사물은 경쾌한 음악과 함께 옥자의 몸짓에 이리저리 춤을 춘다. 카메라는 반들거리는 액정에 도취한 도시인의 모습을 이따금 비춘다. 주변인에게 옥자 사진을 찍지 말아라 윽박지르면서 정작 자신은 옥자와 셀카를 찍고 있는 문도 삼촌(윤제문), 웃는 얼굴로 셀프 영상을 찍으며 난리 통에 도망가는 돼지 탈 쓴 시민, 돼지가 환히 웃고 있는 족발 가게의 홍보 이미지, ‘대한민국 양돈업의 쾌거’, ‘세계 양돈문화의 발원지’ 따위의 팻말을 들고 미자와 단체사진을 찍으려 카메라 앞에 자세 취하는 중년남성들까지… 하얀 형광등 빛에 차갑게 번들거리는 서울의 도시 공간은 이미지를 반사, 저장, 교환하는 네트워크 그 자체다.

  미자를 제외한 모든 인물이 도시 공간에 사는 이미지의 종사자다. 미자를 돕는 동물해방전선(Animal Liberation Front, 이하 ALF로 표기)은 표면상 조력자로 보이지만 실상 미자와 같은 생각은 아니다. 이들은 도살장에 줄지어 있는 수많은 유전자 조작 돼지들을 해방하기 위해 학대받는 실험실 영상을 얻으려 옥자를 뉴욕에 보낸다. 복면을 쓰고 꽃잎을 흩날리며 나타난 ALF는 ‘절대 해치지 않는다’, '안전이 제일', '안전띠를 매라', '안전할 거다’란 말을 반복한다. 이들은 복면이란 '익명의 이미지' 아래 누구도 해치지 않는다는 ‘비폭력주의’를 강조한다. 비폭력은 ALF의 이념이다. 범지구적인 인류애와 동물 해방 이미지의 종사자들인 ALF는 아이러니한 웃음을 준다. 멤버 실버(데본 보스틱)는 식량 생산 자체가 착취라서 토마토조차 먹지 않는다. ‘지구에 어떠한 해도 끼치는 것이 싫다’라는 숭고한 이념은 중요한 순간에 그를 맥없이 쓰러지게 만든다. 40년의 전통과 신념이 무색하게도 단체의 수장인 제이(폴 다노)는 케이(스티븐 연)를 무자비하게 폭행한다. 케이가 옥자를 통신 수단으로 이용하려 '오역'(‘옥자와 산으로 가겠다.’는 미자의 말을 ‘옥자를 실험실로 보내길 허락’으로 오역)했기 때문이다. 이 오역은 (더 많은) 동물을 해방하려는 단체의 목적과 아무런 모순이 없다. 그런데도 제이는 케이의 통신기기를 빼앗고 마구 폭행한 후 내쫓는다. 이후 슈퍼돼지 콘테스트 무대에서 옥자가 미자를 공격하는 순간, 제이는 인간(미자)을 구하기 위해 동물(옥자)을 공격하는 모순적인 모습을 보이면서 아이러니한 웃음을 준다. ALF는 그들이 공유한 역사와 오랜 전통이라는 이상화된 이미지에 복무함으로써 다른 방향으로 향한 자신(들)의 폭력을 정당화하는 우스꽝스러운 장면을 연출하기 때문이다. 미란도 회사에 소속된 동물학자 조니 박사(제이크 질렌할) 역시 이미지에 복무하는 자신의 업무로 내적 모순에 시달린다. 카메라에 길든 조니 박사는 미자가 사인을 요청하는 순간 가장 즐거워하고(‘미란도 그룹의 얼굴이 되어서 난 항상 준비되어있어야 해.’), 미자가 미란도의 새 얼굴이 될 거라는 루시의 계획에 흥분하며 히스테릭하게 반응한다. 동물을 사랑해서 시작한 일은 동물을 수단으로 삼는 일이 되어 기업의 필요로 동물을 실험하고, 죽이고, 학대하는 일을 수행한다. "난 동물을 사랑해."라며 옥자 몸에서 시식용 표본을 채취할 때 조니 박사는 이 모순된 일을 행하려 술 취한 상태여야만 했다.  

  미자를 제외한 모든 인물이 옥자를 이용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다. 이 세계는 이미지와 이미지가 경합하는 세계, 이미지에 길들어 ‘보는 감각’에만 몰두한 세계, 실재에 닿는 것엔 관심 없는, 이미지의 ‘교환’에만 몰두한 세계다. 미자-옥자는 이 세계의 표면에서 미끌거리며 춤을 춘다.



  완전한 짝이 누비는 전 지구적 모험

  봉준호 감독이 전작에서 만들어낸 기묘한 짝들에 비추어 볼 때 ‘미자-옥자’ 커플은 완전하고 모순 없는 한 쌍이다. 종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통역조차 필요 없는 미자-옥자 관계는 오역을 질책했던 ALF 인간무리들과 비교하면 더욱 완전하다. 미자와 옥자는 서로의 말을 알아듣고 서로를 이해한다. 미자-옥자의 완전함은 전작에서 모순을 생산하던 짝들과 차이를 보인다. <플란다스의 개>(2000)는 적대인 동시에 동지가 되던 작은 세계의 ‘아파트 주민(범죄자)- 아파트 관리직원(목격자)’ 짝의 의미교환을 기반으로 전개된다. 가해자 윤주(이성재)는 애완견 실종을 겪은 피해자의 ‘노란 비옷(노란 후드)’을 입고 잃어버린 순자(개)를 찾는 피해자가 된다. 특별할 이유 없는 가해-피해의 전환은 실소를 자아낸다. 또 숨어지내던 노숙자(김뢰하)가 개를 죽인 가해자로 합의되면서 일상을 되찾은 구성원들의 평화는 씁쓸한 냉소를 남겼다. <살인의 추억>에서 ‘형사-연쇄살인범’은 세 명의 용의자와 여섯 구의 시체를 놓고 의미(연쇄살인범)를 찾으려 했던 형사들의 행동을 돌아보게 한다. 형사들의 무능은 연쇄살인범의 징후들과 마주하면서 억압적 공권력과 연루된 시대의 폭력을 드러낸다. <괴물>의 ‘(강두)가족-괴물’의 쌍에서 가족이 마주하는 괴물은 아무 의미가 없는 텅 빈 기호임과 동시에 1세계의 징후로 나타나 현시대를 사는 소시민적 삶에 불안을 남겼다. <마더>의 ‘어머니-아들’ 짝은 장애우(약자)이자 가해자 남성(강자)인 아들의 의미를 확정 짓는 어머니의 괴물적 모성을 배아 삼아 세계의 불가해함으로 뻗어 나간다. <설국열차>의 ‘꼬리 칸-머리 칸’은 불평등한 체제를 함축하는 두 극으로, 이야기가 펼쳐지는 대립 쌍이다. 봉준호의 이야기는 모순의 씨앗이라고 할만한 맞붙은 짝들의 아이러니한 몸부림으로 자라나며, 이들은 의미가 확정되지 않은 괴물성을 둘러싸고 합법과 불법, 가해와 피해, 지배와 피지배의 경계를 허무는 여러 다발의 가지들로 뒤엉킨, 모순의 거대한 몸통을 형성한다.

  <마더>와 <설국열차>에 오면 봉준호의 짝에 묘한 변화가 감지된다. 인간이 아닌 ‘괴물’, 비인간적인 ‘연쇄살인범’처럼 바깥에 있는 괴물성은 어머니 내부의 또아리 튼 ‘모성’이 되고(<마더>), 적대로 간주하던 ‘엔진’과 ‘열차’를 떠받치는 기괴한 시스템적 ‘균형’이 된다(<설국열차>). 불가해함을 함축하던 클로즈업의 얼굴들, 즉 <살인의 추억>과 <괴물>에서 과거를 해석하거나 미래를 예측할 능력이 없는 분노와 불안을 품은 송강호의 얼굴, <마더>에서 죄를 잘라버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드러낼 수도 없는, 차라리 죄의 기억을 잊겠다며 자기 허벅지에 침을 놓고 정신없는 음악에 몸을 흔들던, 그 터질듯한 정서를 내면으로 삼키는 김혜자의 표정은 봉준호 영화의 커다란 정서를 형성하던 중심적 여백이었다. 클로즈업의 얼굴은 짝들이 만든 모순된 이야기에 질문을 던졌다. 이 얼굴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해석되어야 했다. 클로즈업의 여백이 사라진 영화의 질문은 서사로 노골화된다. 오인될 여지는 사라지고 관객은 수수께끼를 잃었으며 알레고리도 사라졌다. <설국열차>부터 모순은 짝들이 근거하는 토대 그 자체에 게임의 규칙으로 심겨있으며 카메라는 모순의 토양에서 자라난 짝의 운명을 고민한다. 순수하고 완전한 짝인 ‘미자-옥자’의 씨앗은 자신들이 위치한 자리를 전체의 관점에서 탐색하려 애쓴다.

  <옥자>는 각 칸을 통과하는 하나의 여정, 내적 모순 없는 집단(인물)의 행위라는 점에서 <설국열차>와 유사하다. 그러나 가장 두드러진 유사점은 지역성을 벗어나 전 지구적이고 인류적인 집단과 주제를 탐색한다는 것이다. <설국열차>의 주인공 커티스(크리스 에반스)는 체제의 동력인 ‘엔진’을 탈취하고 ‘칸’이라는 구분을 혁파하고자 한다. ‘꼬리 칸-머리 칸’의 짝은 진보(혁명)와 보수(통치), 혼란과 균형, 예외와 정상의 의미를 오가며 자본주의 시스템을 은유하는 기차의 원리다. <괴물>이 소시민 가족을 방해하고 그들의 비극을 방관하던 국가권력을 조롱했다면, <설국열차>는 인류를 지배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이라는 범지구적 범주를 겨냥한다. 적대는 시스템 전체를 지배하는 규율과 그것을 관리하는 권력자 집단이다. 보편적이고 전 지구적인 범주에 도달한 봉준호 영화는 모호하고 은밀한 지역성에의 호기심을 포기한다. 앞서 언급했던 모호한 여백(클로즈업)의 삭제는 물론이고, 친숙한 공간의 낯선 비밀스러움, 즉 <살인의 추억>의 농촌의 배수로와 터널의 비밀스러운 어둠, <괴물>에서 서울을 관통하는 한강의 어른거림 등의 미궁이 자리 잡은 익숙하고도 낯선 공간이 삭제된다. 국가-지역성 범주에 속한 낯선 공간은 전 지구적인 절대적 시 공간 속으로 흡수되고 삭제된 것일까? 미자가 비행기를 타고 도착한 미국은 각기 다른 지역의 폐쇄적 공간으로 재현되고(지하실험실, 뉴욕의 미란도 본사와 축제의 거리, 뉴저지 생산라인) 인물의 활력과 디테일은 도심을 모험하는 과정에 한정된다. 도심의 새로움과 활력은 강원도 산골 촌생활이라는 전근대의 타자성으로 측정될 수 있던 것인데, 이 기준마저도 아득해진 미국이란 공간은 항구적인 변화와 시간의 가속화를 포함하는 탓에 그 무엇도 변화하지 못하는 정지상태의 폐쇄로 재현된다. <옥자>의 미자가 마주하는 집단은 경계 없이 확산하는 가공식품의 공장주인 ‘미란도 기업’과 인류를 위해 동물을 해방코자 하는 ALF다. 미자가 영어를 배워야 하는 이유(케이가 강으로 뛰어내리기 직전, 영문 자막에서 케이는 ‘미자야 영어를 배워봐, 새로운 문이 열릴 거야.’라고 말한다.)는 지역성을 흡수하고 규정하는 전 지구적 공간과 집단을 마주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우리는 종국에서야 하나의 질문을 만나게 된다. <설국열차>에서 질문은 ‘머리 칸-꼬리 칸을 지배하는 이 시스템을 장악할 것인가, 기차의 ‘문’을 열어젖혀 시스템 자체를 폐기할 것인가?’ 였다. 이 상이한 두 전망 사이에서 커티스는 갈등한다. 미자는 <설국열차>의 커티스가 기차 부품으로 쓰이는 어린아이를 만나기까지의 시간보다 더 빠른 결단을 내리는 것으로 보인다. 실패한 루시 이후 미란도의 새 주인이 된 낸시(틸다 스윈튼)는 옥자가 자신의 ‘재산’이며 우리는 ‘죽은 것’만 팔고 여기(공장) 있는 모든 게 우리가 ‘거래하는 것’ 이라 말한다. 옥자를 살 수 없다던 할아버지 말과는 다르게 미자는 옥자를 산 채로 거래한다. 금 돼지를 던져줌으로써 행해지는 즉각적이고 모순 없는 교환과 갈등 없는 거래. 우리는 낸시와의 거래 속에서 자명한 원리로서의 교환과 죽음의 이율 배반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유토피아 없는 유토피아로의 귀환

  미자-옥자는 숨겨 데려온 새끼 슈퍼돼지 한 마리와 함께 집으로 돌아온다. 미자는 먹을 것을 신경 쓰는 할아버지와 작은 밥상에 마주 앉아 말없이 식사한다. 전작들에서 ‘먹고 먹이는 관계’가 반복된다. 이 소박한 밥상이 미자-옥자 짝이 도달한 도착지다. 집으로 돌아온 둘의 태도는 험난한 여정을 통과하기 전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가족은 여전히 함께 살며 둘은 미세한 숨결만으로도 서로의 마음을 아는 듯하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옥자는 뼈와 살로 발라질 운명의 생존자, 슈퍼돼지 집단수용소에서 구해온 작은 새끼돼지보다 조금 점잖아 보인다는 점이다. 옥자의 활력은 아무것도 모른 채 뛰노는 새끼돼지로 대체되었다. 모두 살던 대로 살아가고 먹던 방식대로 먹는다. 미자와 할아버지가 닭 우는 소리 나는 ‘외부’로 시선을 돌리던 영화의 끝 장면과 함께 불안과 두려움은 사라졌다.

  동시대를 사는 우리는 <옥자>의 여정으로 세계를 어렴풋이 스케치할 수 있게 되었다. 루시 미란도가 그토록 혐오하던 아버지와 언니 낸시는 사실 자신과 같은 존재들로 현실에 동일한 영향을 낳는다. 아무리 새로움을 강조한다 하더라도 루시는 낸시와 같은 세계를 생산하는 두 개의 다른 가면에 불과하다. 다국적 기업이 만들어 낸 유전자 변형 슈퍼돼지는 국가의 경계를 넘어 대도시 대형마트와 편의점에서부터 시골 촌 뜨락 슈퍼마켓까지 세계 곳곳에 유통될 것이다. 우리는 ‘옥자’의 혈육을 뜯어먹고 살 가까운 미래를 예상한다. 이 상품의 편재에서 벗어날 길은 힘겨운 걸음으로만 당도할 수밖에 없는 첩첩산중 산골짜기에 고립해 자급자족으로 먹고사는 방법뿐이다. 그러나 이 고립은 안온한 것이기보다는 모든 부정적 감정이 사라진 무심함에 가깝다. 미자가 경험한 실재는 이미지 이면의 세계, 즉 옥자의 엄마가 ‘칠레’에 있고, 옥자의 태생은 미국 애리조나의 아름다운 목장이라는 기업의 ‘거짓’과 액정화면에 가려져 있던 ‘현실’이다. 옥자를 도살될 운명(Fate)으로부터 벗어나게 한 모순 없는 교환은 단순한 상품 교환이 아니라 M–C–M'(화폐-상품-자본, 마르크스, <자본론> 1권)에서 M'라는 잉여자본의 증대를 목표로 하는 단 하나의 단일한 운동이다. 미자는 옥자의 생사를 앞두고 단 하나의 선택을 하도록 강요당했다. 제3의 선택지를 상상하지 못하게 하는 사유의 감금. 무언가를 더 추구했다가는 모든 것을 다 잃을 것이라는 불안이 미자를 자유 시장경제의 소비(선택)로 등 떠밀었다. ‘소비’란 보편적 삶의 양식인 전 세계적 ‘미국적 표준화’는 산골 집이 있는 민족국가를 안온히 내버려 두지 않는다. 슈퍼돼지를 각 나라의 전통적 방식으로 키우게 했던 루시의 기획처럼 ‘전통’과 ‘자연’은 후기 자본주의의 세계체제 속에 자율적으로 통합된다. 자연이라는 고립만이 물질과 상품의 편재로부터 잠깐이나마 피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유일한 환상이자 유토피아다. 그러나 이 고립은 새로운 외부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위태롭다.

  <옥자>는 실재를 확인하고도 무심한 듯 사는 일상, 유토피아 없는 유토피아 공간으로의 귀환하면서 유쾌하지 않은 결론에 닿는다. 우리는 추상 없는 직접적 관계, 수익으로 계산되지 않는 미래(시간), 상품 없이도 살 수 있는 유유자적의 삶을 꿈꾼다. 산골(자연) 속의 미자는 다른 세계로 시선 돌림으로써 이 소망을 가로막는다. 자연적 삶이라는 유토피아는 언제든 억압적이고 권위적인 디스토피아로 변질될 가능성과 함께 공존한다. 소박하고 완전한 미자-옥자 간 사랑과 아름다운 자연적 삶에 닥칠 운명은 무엇일까? 유토피아는 도로와 산길을 타고 건너온 외부의 존재가 드러나기 전까지만 유지될 것이다. 우리는 상황을 전체로부터 조망해야 한다. ‘나(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외부와 연결되어 있는가’, ‘진입로와 대피로는 어디인가’, ‘궁극적으로 현재 나의 위치는 어디인가’ 하는 질문과 함께. 미자와 옥자를 반복적으로 비추는 부감 쇼트의 시선은 이 세계를 위로부터 조망하고자 하는 충동에 다름없다. 모순을 조망하고 전체에서 맥락화하려는 노력은 현실의 사건과 초시간적인 시간의 양립 불가능성 속에서 무심함으로 귀결된다. 경계에서의 무심함, 이것은 재현 너머로 나아갈 수 없는 사유의 한계이자 경계에 대한 징후적 표현이다.

   상상 불가능한 유토피아의 세계를 상상하려는 충동으로 <옥자>의 결말을 다시 보자. 집단의 한계와 모순의 내용으로 지도 그리기, 우리의 소망을 가로막는 현실원칙과 갈등이 흡수되는 과정, 이 모든 상황을 전경 화하면서 마주하는 한계지점. 이 한계 앞에서 봉준호 감독은 어떤 미래를 상상할 것인가? 전 지구(The global)와 지역(The local)의 대립이란 재현에서 벗어나 다원적 집단의 공존과 관계 속에서 상상 불가능한 것을 상상할 수 있는 공간이 확보되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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