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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da Oct 07. 2017

물질과 추상 세계의 공허한 환영

<빅쇼트>와 <퍼스널 쇼퍼>를 중심으로

    금융은 현대 자본주의의 중핵이다. 자족적인 생산 활동을 하는 사람일지라도 금융의 지대를 떠나기는 힘들다. 금융은 너무나 일상의 행위라서 이젠 이질감을 느끼기도 어렵다. 계좌에 예치 된 예금과 카드, 질병과 죽음에 대비한 보험상품, 주거비와 학자금, 사업으로 생긴 대출과 이자, 어떤 형태이건 한날한시도 벗어날 수 없다. 채무가 생긴다면 생은 미래 특정 시점까지 담보 잡 히고 만다. 돈과 금융은 신체에 체화되어 수단과 목적을 가늠하기조차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
    금융위기 충격이 컸던 만큼 영화는 시스템에 의심을 거둔 적이 없었다. 최근 금융은 평범한 삶을 직접 위협하거나(<라스트 홈>(2014)), 주가 조작으로 힘없는 개인을 사기 치고(<머니 몬스 터>(2016)), 삶의 터전을 지키려는 형제의 범행 동기이자 결과(<로스트 인 더스트>(2016))로 그 려진다. 금융은 운명을 결정짓는다. 영화 속 금융시장은 부와 욕망을 들끓게 하는 주된 배경이 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는 금융위기 본질을 집요하게 파헤치는 <인사이드 잡>(2010)이나 <자본주의: 러브 스토리>(2009)의 다큐멘터리를 비롯해, <투 빅 투 페일>(2011)과 <마진 콜: 24시간, 조작된 진실>(2011)의 사실적인 극영화 주제가 되었다.
    월스트리트는 부의 원천이자 파국의 위기가 똬리 틀고 있는 신비한 영역이다. 영화는 부를 위 해 온갖 범죄와 위험에 뛰어드는 월스트리트 주인공을 비추며 돈의 욕망에 끌려가는 인간의 어 리석음을 탓하곤 했다. 마틴 스콜세지는 영화 <좋은 친구들>(1990)이나 <카지노>(1995)에서 탐 욕을 응징하는 교훈을 주는 데 성공했다. 극단적 욕망을 지적하던 문제의식에 변화가 감지된 것 은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2013)에 이르러서였다. 마틴 스콜세지는 월스트리트의 고삐 풀 린 늑대 조던 벨 포트(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성공신화를 바탕으로 금융인의 수많은 범죄(주가 조작, 증권사기, 자금 세탁, 공무 방해, 마약류 투약, 상습 성희롱, 기내 난동 등)와 죽음에 이르 는 자기 파괴의 쾌락을 묘사하는 데 성공했다. 영화는 허랑방탕한 욕망의 단죄를 생략한다. 영 화 말미는 성공을 갈망하는 청중의 눈빛을 비추며 이 우스꽝스러운 드라마가 끝나지 않음을 예 고한다. 자본주의가 부를 안겨준다는 기이한 믿음만큼은 단죄되지 않는다.


    금융에 초점을 맞춘 대다수 영화가 부도덕한 욕망을 위기의 원인으로 지적한다면, 최근 영화는 근본적인 원인을 시스템 자체의 속성에서 찾고자 한다. 금융 위기가 잊히는 최근에 시선을 끈 두 영화 <빅쇼트>(2015)와 <퍼스널 쇼퍼>(2016)를 보고자 한다. 두 영화는 완전히 다른 방 식으로 자본주의 세계를 그린다. <빅쇼트>는 동명 소설의 '실제'인물을 토대로 금융위기를 '구체' 로 서술한다. 인과적으로 잘 짜인 이야기와 여러 집단의 시각을 반영한 시점 및 내레이션은 물 질세계의 모순을 사실로 그린다. 한편, <퍼스널 쇼퍼>는 '허구(영혼)'를 쫓는 한 인물의 '허구'적 이야기로 다른 영화보다 소비 자본주의의 모호한 속성을 정확히 간파한 허상에 관한 영화다. 표 면상 완전히 다른 두 영화는 현대사회를 물질과 추상의 관점에서 고민한다는 점, 현실 세계와 상품 세계를 매개하는 주인공 매개자(거래자)의 소외와 고뇌를 담는다는 점에서 같은 문제의식 을 공유한다.




    영화 <빅쇼트>는 시스템의 모순을 설명한다. 미국발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이처럼 상세 히 그려낸 작품은 없었다. 유명 할리우드 배우가 갑자기 등장해 어려운 경제학 용어를 설명하는 친절한 시퀀스는 의도와 달리 거부감을 줄지 모른다. 무겁고 심각한 문제를 우스갯소리 하듯 조 롱하는 가벼움, 자유연상 기법을 떠올리게 하는 산만함과 빠른 전개는 엄청난 파국의 쇼크 체험 을 반영한 영화적 특징으로 보인다. 월스트리트가 위험 징후에 무신경한 채 돈 잔치를 벌일 때, 펀드매니저 마이클 버리(크리스천 베일)는 상품을 살펴보다가 주택담보 대출에 기반을 둔 CDO(Collateralized Debt Obligation, 금융회사 대출 채권을 유동화시킨 신용파생상품)의 하자 를 발견하고 금융시장 붕괴를 예측한다. 곧 그는 CDO 상품의 보험상품인 CDS(Credit Default Swap, 주택 담보 채권의 신용 부도 스와프)를 만들어 이 상품에 투자한다. 모건스탠리 산하 작 은 펀드 회사 대표인 마크 바움(스티브 카렐)은 재러드 베넷(라이언 고슬링)에게 이 보험상품을 제안받는다. 마크 바움 팀은 마이애미 주택시장의 부실한 현장을 직접 확인한 후 투자한다. 대 부분 은행가와 금융인은 시장 붕괴가 닥치기 직전까지 매달 많은 돈을 내다 버릴 비관 자들(주 인공들)을 비웃는다. 이제 막 주식시장에서 덩치를 키우고 있는 신출내기, 찰리 겔러(존 마가로) 와 제이미 쉬플리(핀 위트록)는 은퇴한 주식 중개인 벤 리커트(브래드 피트)와 함께 CDS에 투 자한다.
    <빅쇼트> 주인공들은 시장이 안정될 것이란 막연한 믿음과 갈등한다. 어떤 행동을 해도 시스 템이 안전할 거란 믿음은 파국을 불러온 중요한 원인이다. 이 믿음의 다른 말은 '신용'이다. 대 출은 악화하는데 서브 프라임 채권의 신용평가는 낮춰지지 않는 시장의 모순, 이 모순 때문에 주인공들은 매달 은행에 막대한 돈을 지급한다. 마크 바움은 신용평가사 S&P(Standard & Poor's)에 이유를 따져 묻는다. 신용평가를 '받는' 회사는 신용평가사의 고객이자 밥줄이다. 일을 놓치기 싫은 신용평가사가 눈치 보는 것은 당연하다. 모든 가치가 의존하던 '신용'은 신용평가사 의 자의적 판단에 의존했다. 신용평가가 제대로 되었더라면 파국을 막을 수 있었을까? 부풀 대 로 부푼 합성 CDO 자체가 폭탄이었다. 메릴린치 CDO를 관리하는 하딩 어드바이저 매니저는 채무불이행이 발생하더라도 합성 CDO 비율이 낮아 걱정할 필요가 없고 자신은 그저 살 사람 이 있으므로 상품을 만들었을 뿐이라고 말한다. 사고파는 중간 과정에서 이 매니저의 존재는 증 발한다. 아무런 손해나 책임이 없다. 신용평가사, 국가 은행 감독관, CDO 매니저, 경제부 기자 등 경제 주체들은 상황에 개입할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순을 외면한다. 어려운 경제학 용 어 뒤에 숨은 금융 주체가 숫자와 합리에 근거해 행동한다는 근거 없는 환상이 벗겨진다. 곤경 에 빠지는 건 시스템을 몰라서가 아니다. 시스템을 확실히 안다는 착각 때문이다(마크 트웨인 어록을 수정 인용). <빅쇼트> 주인공들은 시스템을 믿지 않아 큰돈을 번다.
    마크 바움은 분노한다. CDO를 만든 매니저를 만났을 때 그는 붉으락푸르락 폭발 직전이었 다. 이 분노는 금융인 개인의 부도덕과 무책임만을 향하지는 않는다. 위기의 원인인 CDO는 완 벽한 시뮬라크르(보드리야르)로 자기 파괴의 내적 원리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화폐는 실물과의 교환가치를 나타낸다. 수치화된 화폐가 전자 기술과 결합하면 '교환 수단'이란 기능을 넘어선 시 뮬라크르가 된다. '원본도 사실성도 없는 실재'인 금융자본의 기호는 이익 창출이라는 동일한 운 동 속에 모든 사물을 집어삼켜 추상으로 내뱉는다. 파생상품 CDO는 주택담보 대출, 회사채, 금 융기관 대출 채권 등 빚을 뭉텅이로 모아 새로운 증권으로 만든 완벽한 시뮬라크르다. 이 시뮬 라크르는 여러 채권이 섞인 탓에 원본이 무엇인지 모르고 위험도를 예측하기도 어렵다.
    마크 바움은 승리하고도 주저앉는다. 그가 발로 뛰며 확인한 사실은 금융의 온전한 영향력 아 래에 놓인, 실재와는 멀어져 제어할 수 없는 '시뮬라시옹인 현실'이다. 현실을 움직이는 금융자 본은 실재하는 모든 것을 추상화한다. 영화 <코스모폴리스>(2012)에서 에릭 패커(로버트 패틴 슨)의 초대형 리무진 공간을 떠올려보자. 이 광포한 부르주아는 추상의 이미지에 둘러싸여 있 다. 리무진 '유리창'은 군중이 소요하는 끔찍한 현실과 부르주아 공간을 분리하는 매체다. 에릭 패커는 전망 자료와 통계치, 컴퓨터 화면, 적외선 카메라 야간투시경이란 '창'에 투사된 이미지 로 세계를 파악한다. 숫자와 이미지가 편재하는 추상 세계에서 돈은 모니터의 수치로, 실체 없 는 가치로, 요정 가루의 푸가지(fugazzi)(<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 마크 한나 대사 중 언급된 용어)로 잠시 머물 뿐이다. 돈은 부피나 무게도 없이 전자적 형태로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만다.
    마크 바움은 깊은 우울로 고뇌한다. 금융자본주의는 죽음과 파괴를 전제로 가치를 축적하는 데, 바로 마크 바움 자신이 돈을 번 방식이기 때문이다. 신용부도스와프(CDS)는 등급하락의 손해를 보상하는 방식으로 주인공들에게 큰돈을 안긴다. 이들은 금융시장 붕괴와 구체적 삶의 죽 음에 돈을 건 것이나 다름없다. 벤은 트리플에이 공매로 기뻐하는 찰리와 제이미에게 "너희는 방금 미국 경제를 공매한 거야. 그 말은 우리가 맞았다면 사람들은 집을 잃고 직장을 잃고 노후 자금을 잃는다. 내가 왜 은행 일을 싫어하는지 알아? 인간을 숫자로 보거든. 1% 실업률이 올라 갈 때마다 4만 명이 죽는다."며 화를 낸다. '실업률 1%'란 숫자는 가난과 죽음의 무게와 고통을 탈각시킨다. 심지어 금융에 발을 들이지 않은 성실한 납세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일까지가 자 본주의 규칙이다. 현실이 파괴될수록 돈의 가치가 커진다면 금융은 붕괴와 말살로 향한다고 말 할 수 있다. 일자리가 사라지고 사람들이 자살하고 도시와 공동체가 해체되는 세계의 파괴, 자 멸로 이익을 만들어내는 역설과 모순의 시스템, 마크 바움은 자본주의의 이 내재적 모순에 짓눌린다.
    <빅쇼트>는 둑이 무너질 때 살아남은 두 부류의 인간 유형을 제시한다. 하나는 세계를 비관 하고 의심하며 강박적으로 자신을 자학하거나(마크 바움은 형이 자살한 일로 행동교정 상담을 받는다), 다른 하나는 어떠한 교류나 공감 없이 자신만의 세계에 고립된 경우다. 후자에 해당하 는 마이클 버리 박사(크리스천 베일)는 기괴한 웃음으로 시선을 붙든다. 마이클 버리의 텅 빈 미소는 배우 크리스천 베일이 자신의 필모그래피에서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아메리칸 사이 코>(2000)의 패트릭을 상기시킨다. 살인을 저지른 패트릭의 얼굴에서 두려움과 희열이 공존하던 광기 어린 미소는 무감각하다는 점에서 소름 끼치게 한다. '아스퍼거 증후군'인 마이클 버리는 외부와 교류하지 않는다. 그는 유리 공간 집무실에서 늘 고막을 때리는 메탈 음악으로 타인과 교감하지 않은 채 일한다. 그는 무감한 표정으로 '시장 오류'라는 문제풀이에만 몰두한다.
    추상 세계의 불확실함을 견디는 방법은 쾌락과 고통의 과잉된 감각에 의존하는 것이다. 가죽 피가 찢겨나갈 듯 내려치는 드럼은 드럼 연주라기보다 차라리 신체를 가학적 소음에 가두고 감 각을 마비시키는 행위에 가깝다. 헤비메탈 소음은 모든 주변인의 목소리를 차단한다. 고통과 쾌 락이 거하는 육체의 감각이 아니고서는 추상의 바다 아래로 닻을 내릴 방법이 전무한 상태다. 금융인은 하나같이 코카인류 마약을 즐겨 찾는다. 마약은 감각의 과잉을 유지해 쾌락에 몰두하 도록 도와줘 외부와 소통을 차단한다. 환영처럼 머물다 사라지는 이익에 집착할수록 쾌감은 더 욱 강한 반응으로 환영을 떠받쳐야 한다. 약물이 주는 감각 과잉은 실제 삶과의 간격을 끝없이 늘어뜨린다. 배우 크리스천 베일의 '미소'는 타인과 교감할 능력을 잃은 신자유주의적 인격의 일 면이다. 타인과 의사소통이 힘든 마이클 버리의 독단적 결정이 생존의 출구를 만들어낸 것이다. 우리는 금융위기를 개인의 부패와 탐욕, 네트워크의 초월적 신비, 이성의 도구화 같은 문제로 한정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경제 주체가 범죄에 책임을 지더라도 사회-경제적 ‘조건’에 아무 런 변화가 없다면 둑은 또다시 무너질 것이기 때문이다(When the Levee Breaks, Led Zeppelin IV).




    <빅쇼트>가 세계를 추상하는 물질세계의 모순을 구체로써 풀어냈다면, <퍼스널 쇼퍼>는 추상 세계에 갇힌 현대인의 상황을 비유와 허구의 '추상'으로 제시하기에 성공한 작품이다. 영화를 사 유한 영화인 <이마 베프>(1996)처럼 올리비에 아사야스는 가상과 영화의 언어를 탐구하기를 멈 추지 않았다. <퍼스널 쇼퍼>는 그의 전작인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2014)에서 묘연히 사 라진 비서 발렌틴(크리스틴 스튜어트)에 렌즈를 가져다 댄 듯하다. 실제로 <퍼스널 쇼퍼> 모린 (크리스틴 스튜어트)은 '유럽 여배우에게 고용된 미국인 비서'란 설정에서 발렌틴과 비교되곤 했 다.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에서 크리스틴 스튜어트는 원본을 모사하는 그림자로, 어디서까 지가 허구이고 실제 욕망인지를 가늠하기 어려운 미장 아빔(mise en abyme)의 이야기 속에서 주인공을 홀리고 사라진 허깨비였다면, <퍼스널 쇼퍼>에서 크리스틴 스튜어트는 네트워크 매개 자로 피로와 불안에 시달리는 주인공이다. 모린은 완전히 동떨어진 두 이야기를 하나로 녹여낸 다. 하나는 죽은 이란성 쌍둥이 루이스 영혼을 기다리는 '영매'로 텅 빈 저택에서 영혼을 접한 다. 다른 하나는 유명인 키라(노라 본 발드스타텐)의 '퍼스널 쇼퍼'로 부띠끄를 분주하게 오가며 상품을 고른다. 서로 다른 두 이야기는 두 세계의 매개자인 모린을 중심으로 뒤엉킨다. 남자인 지 여자인지조차 모호하고 기괴하지만, 분명한 공포로서 실재하는 '유령(영혼)'과 욕망을 자극하 며 다가온 unknown의 '메시지'는 삶과 죽음, 실재와 허구 사이에서 온 불안의 원천이다. 모린은 살인 사건에 관여되지도, 루이스의 영혼을 만나지도 않는다. 그저 자기 자신을 인지하는 순간 영화는 끝나고 만다.
    모린은 피로하다. 엉겨 붙은 머리카락과 반쯤 열린 눈꺼풀, 떨리는 손에서 일상의 피로와 불 안을 짐작한다. 모린은 루이스의 영혼을 만나기 위한 목적으로 파리에 왔지만 실제는 쇼핑 업무 로 쉴 틈이 없다. 퍼스널 쇼퍼는 유명인의 상품 구매를 위해 고용된 사람이다. 유사 선택의 반 복인 쇼핑은 아무런 실질적인 변화를 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피곤하고 지루하다. 다르덴 형제 영 화 <내일을 위한 시간>(2014)은 지루한 '선택'의 '반복'에 갇힌 산드라(마리옹 꼬띠아르)를 통해 피로와 죽음이 밀접하게 맞닿은 상태를 보여준다. 산드라를 죽음으로 내몬 원인은 '보너스'와 '복 직' 간 제로섬 게임(zero sum game)의 반복되는 질문이고, 질문 끝에는 모멸감으로 인한 피로 만이 남는다. <퍼스널 쇼퍼>가 모린의 노동만을 비춘다면 똑같은 행위로 채워진 시퀀스의 병렬 에서 어떤 미세한 차이와 의미를 찾길 갈구할지 모른다. 타인의 상품을 고르는 "쓸데없는 짓, 재미없는 일"의 반복, 이것이 모린이 피로한 첫 번째 원인이다. 두 번째 원인은 두 세계를 매개 하는 모린 자신의 경계성에 기인한다. 모린은 힐마 아프 클린트 추상화가 두 세계를 매개하듯 영혼이 출몰하는 경계(열린 문을 스케치한 그림)를 보고 느끼는 영매(medium)다. 키라를 대리 하는 퍼스널 쇼퍼란 점에서 모린은 상품을 고르고 결제한 후 반납하는 중간 과정의 매개자다.
    어쩌면 이 피로는 중간자(매개자)로서 피하기 힘든 필연적 상태일지 모른다. 매개자는 신호의 세계 속에서 유령처럼 희미해지는 자신을 목격한다. 상품은 자신을 지우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 다. 오간자 실크로 만들어진 검은 '시스루 드레스'와 화려하게 번쩍이는 '거울 드레스'는 육체를 투명하게 드러내거나 완벽하게 가림으로써 신체를 물화(reification) 한다. 금기인 키라 구두를 착용한 최초의 순간에 손은 가죽의 감촉을 음미한다. 빡빡한 구두 안으로 발을 욱여넣고 걷는 순간 걸음걸이는 달라진다. 상품에 매혹된 모린의 상태는 '달라진다'. 달아오른 욕망은 자위나 셀피(selfie)의 자기만족에 그친다. 정성일 평론가는 '한밤중 텅 빈 집에서 누군가를 찾는 모린 시퀀스'를 숏/반대 숏(shot/reverse shot)이 아닌 모린만을 찍은 장면을 두고 '모린이 모린을 바 라보는 상황, 자기가 자기를 찾는 중'인 의미로 해석했다. ("나를 해치려는 자가 누구야?... 나뿐 이야? 쿵.", 씨네 21, 1094호) 카메라는 누군가를 보는 나의 시선과 나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 간 교차를 담는다. 시선을 마주치는 일이 불가능한 유령의 응시가 나의 것이었다면? 시뮬라크르 세계 속에서 이미지와 기호로 부유하는 '나'는 의미를 고정하기 힘든 탓에 한없이 피로하다.
    우리는 다른 누구도 아닌 모린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살인 사건에 구체적 알리바이가 없는 모린을 의심하던 형사의 눈초리로 말이다. 어떤 결과나 생산물도 남기지 않으면서 쪽지나 전화, 메시지로만 소통하는 노동이 실물 세계에 남긴 흔적은 미미하다. 불명확한 출처로 불안감을 자 아내는 unknown의 메시지와 저장되지 않아 unknown 이란 이름으로 걸려온 키라의 전화는 모 두 '메시지'다. 영혼의 '신호', 힐마 아프 클린트 추상화와 관련된 도록과 사진, 동영상의 '이미지', 키라의 '음성 전화'와 '메모', 오만(Oman)에 간 남자친구 개리의 '화상 전화'는 모린을 신호의 세 계에 가둔다. 네트워크 내부에 숨어 발신자와 수신자를 연결하는 전화교환원처럼 모린은 자신의 구체성을 상실한다. 살인 사건 경위나 유령의 존재 모두 규명되지 않는다. 흥미로운 사실은 미 스터리 한 도시에서 벗어나 오만에 당도했을 때조차도 실제 개리가 아닌 개리의 '쪽지(메시지)' 만을 발견한다는 사실이다. 영화의 디제시스 상에서 남자친구 개리의 실존 여부는 상당히 의심 스럽다. 그가 직접 등장하지 않는 탓도 있지만, 영상통화는 실시간 교류가 아닌 과거 저장된 동 영상이 재생되는 듯한 의심을 주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첫 영상통화 장면에서 '되감기, 일시 정지, 빨리 감기' 기호가 영상통화 화면에 잠깐 비친다)
    유령이 출몰하는 경계를 고민할 때 우리는 상품 세계의 신비에서 답을 구해야 할 것이다. 퇴 폐적 욕망의 페티시스트는 키라 물건에서 즐거움을 얻는다. 욕망의 대상이 옷이든 '까르띠에(브 랜드명)' 장신구이든 종류는 상관없다. 주인(금기)과 연결된 '기호'의 수명이 허락하는 한 상품이 주는 쾌락은 쇼핑의 무한한 대용물로 얼마든지 대체 가능하다. 한 인간의 시간과 노동력, 기억 을 보존한 물건이 시장으로 나가는 순간 사물은 허울에 지나지 않으며 "감각적인 동시에 초감각 적(사회적) 물건"으로 탈바꿈한다(마르크스). 자본 시장의 물건은 태어나자마자 다른 물건과 상상적 관계 속에서 운명이 결정된다. 올리비에 아사야스는 영화 <여름의 조각들>(2008)에서 현 대사회의 사물의 여정을 보여준 바 있었다. 할머니 헬렌의 유산을 놓고 갈등하는 자식들의 대립 속에서 사물은 모더니스트 예술작품으로 남을 수도, 평생을 함께한 가족의 추억이 담긴 물건이 될 수도, 천문학적 값어치의 상품이 될 수도 있다. 교환가치가 사용가치를 잠식하고 마법에 걸 린 물건이 되면서 상품은 마법의 시선만이 허용되는 박물관에 전시된다. 사용되는 물건인 동시 에 스스로 가치 운반체가 되는, 자산이라는 비물질로 추상되는 상품의 신비한 여정. 모린은 이 축적과 교환의 연쇄에서 신체마저 이미지로 추상하는 세계의 공허만을 목격한다.



    소진된 육체, 소외된 정신을 사는 현대인은 유령이 된다. 자본의 교환 과정은 사물의 아우라를 박탈하고 상품을 비물질 자산으로 취급한다. 금융자본은 실물 영역의 노동과 상품의 모든 가 치를 기호로 대체하며 압도적인 양으로 세계를 포섭한다. 모든 것은 기호의 보편적 형태를 띤 다. 물질세계는 현대인에게 신용과 차입, 대출의 끝없는 사슬 어디쯤에서 돈을 취하도록 요구한 다. 인간은 생산과 이윤이 무한히 유예된 순환 고리 속에서 발신자와 수신자가 지연된 중간 과 정에 고립되고 소외된다. 올리비에 아사야스는 한 인터뷰에서 현대는 "팽창하는 물질주의와 그 것을 해독(解毒)하려는 정신성 사이의 긴장"이며, 삶은 "리얼한 물질세계와 우리가 상상으로 살 아가는 추상 세계로 이뤄져 있다"고 지적했다. ("우리는 애도하고 위로받을 장소를 상실하고 있 다”, 씨네 21, 1057호) 모린은 현대의 물질과 추상 세계의 매트릭스에 갇혀 희미해지고 모호해 지는 인물이며 그녀가 붙잡으려는 대상은 붙잡는 순간 자꾸만 미끄러져 빠져나간다. 상품 세계 (패션 산업)는 욕망을 충족시키지 않는 방식으로 모린을 매혹하면서 소외시킨다. 모린이 매혹된 대상은 눈에 보이고 느끼는 실재이지만 '부재하는 실재'로, 결코 소유할 수 없이 계속해서 찾게 되는 '오드라덱'(카프카, <가장의 근심>)이다. 텅 빈 대상은 추측과 인상으로만 서술되며 실체는 규명되지 않는다. 바로 유령처럼 말이다. 대상의 존재 방식을 질문하면 할수록 서술자인 '나'의 상태가 드러나듯이 우리는 허상들을 질문하면서 우리 자신의 공허와 불안만을 목격한다. 비로소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목적을 잠식한 수단, 수단마저 집어삼킨 물신적 신비가 한 인간을 장소도 없고 현재하지도 않는, 투명하고 공허한 환영으로 만들었다고 말이다. 소비 자본 주의를 사는 우리는 시뮬라크르의 추상 세계를 벗어나 외부로 나갈 수 없다. 이것은 곧 죽음이다.
    이제 영화는 새로운 질문을 던져야 한다. 탈출구 없는 상황에서 무엇이 유효한 상상인지를 말이다. 관객은 복잡한 마음으로 영화가 던질 질문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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