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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da Jan 17. 2018

매혹당한 사람들(2017)

1971년도 돈 시겔의 <매혹당한 사람들>의 리메이크작처럼 보이는 소피아코폴라의 <매혹당한 사람들>(2017)은 돈 시겔의 작품과 유사한 플롯으로 전개되지만 정반대의 이야기를 완성했다. 돈 시겔 작품이 존 맥버니(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시각을 중심에 두고 여성들의 부정한 욕망과 남성의 비참한 최후를 완성한다면, 소피아 코폴라의 작품은 남성 중심의 시각에서 조금 비껴난 시점에서 이야기를 새로 쓴다.

  소피아 코폴라의 <매혹당한 사람들>은 중심 인물이 ‘남성 군인’이던 돈 시겔 작품과는 다른 방식으로 시작된다. 영화는 숲에서 버섯을 따는 소녀 에이미(우나 로렌스)와 소녀의 노래로 시작된다. 에이미는 숲에서 우연히 존 맥버니 상병(콜린 패럴)을 발견하고 자신이 사는 ‘마사 판스워드 여자 신학교’로 그를 데려온다. 돈 시겔의 작품이 남북 전쟁의 참상을 사진으로 전시하던 것과는 차이를 보인다. 돈 시겔의 작품에서 전쟁의 비극은 남성의 노래(“입대하지 말아요. 비둘기는 떠나고 까마귀가 올거에요. 죽음이 행진해올 거에요. 북소리에 장단 맞춰. 예쁜 여성들이여 이리 모여요. 햇빛 속에서 걸어요. 그리고 남자들의 손에 총을 쥐게 하지마요.”)로, 남성의 시점에서 출발하며, 12살 에이미에게 키스하며 드러나는 남성의 욕망에서 출발한다. (그는 명백히 ‘개자식’이지만 그가 주인공이기 때문에 군인들에게 발각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하게 된다) 누운 채로 두 다리 사이를 통과하듯 여학교의 대문을 관통한 존 맥버니(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몸을 옮기며 자신을 내려다보는 여자들의 얼굴을 올려다본다. 그는 희미한 의식 중에도 “가장 예쁜 남부 연합군에게 항복한다”는 희롱을 잊지 않는다. 자신을 포로로 받아달라 간청하던 콜린패럴의 존 맥버니와 달리 그는 굳이 항복을 선언한다.



  소피아 코폴라의 여성들은 돈 시겔의 여성들보다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고, 사리에 맞게 행동하며, 흑인 노예(흑인 여성 노예 ‘할리’캐릭터는 삭제된다)가 떠나고 없음에도 공동체를 유지하는 일에 성실히 임하는 모습이다. 이들은 성적 욕망에 눈이 멀어 서로를 경계하며 분열되던 돈 시겔의 여성들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특히 원장 마사(니콜 키드먼) 캐릭터는 돈 시겔의 마사(제럴딘 페이지)가 근친상간의 관계였던 오빠의 부재와 결핍을 메우려 강렬한 성적욕망과 환상을 가졌던 것과는 다르게 제 할일만 한다. 니콜 키드먼이 연기한 마사 원장은 크리스천으로서의 사명과 인도적 차원에서 존 맥버니를 회복시키기 위해 그를 허락했고, 남성의 몸을 닦으며 바지를 내려야하는 순간에도 굳이 자신의 성적 욕망을 꺼내지 않는다. 유혹의 기회일 두 사람의 독대자리에서 존은 마사에게 듣기 좋은 소리를 끊임없이 늘어놓는다. 약간 허탈(?)하게도 마사 원장은 단지 무사귀환을 바란다고 할 뿐 특별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니콜 키드먼이 연기한 마사에는 개인의 과거 이야기가 삭제되어 있다. 그녀는 존 맥버니에게 마음이 끌리는 듯하다가도 이내 마음을 거두고 공동체를 지키는 일에 몰두한다. 마사 원장은 여성들의 욕망을 지배하는 욕구 불만의 어머니가 아닌 공동체를 수호하려는  어머니에 가깝다.
  여성들간의 신경전은 돈 시겔의 작품에 비하면 차라리 귀엽고 사랑스러운 수준에 그친다. 노골적으로 존 맥버니를 유혹하고 위험에 빠지게 만들던 캐롤(조 앤 해리스) 비해 알리시아(엘르 패닝)의 행동은 지루한 일상(지루해하는 연기 귀욥)에서 약간의 재미를 찾은 듯, 성적호기심에 장난을 치는 수준이다. 난삽하게 굴지말라며 캐롤을 때리던 돈 시겔의 에드위나 선생(엘리자베스)은 존과 함께 여학교를 떠나고 싶은 기색이 역력한데 반해, 소피아코폴라의 에드위나(커스틴 던스트)는 시종일관 피곤해보이기만 할 뿐, 존과의 결혼이 유일한 탈출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듯 하다.
  어쨌든 존 맥버니는 캐롤/알리시아와 섹스하다 에드위나 선생에게 발각되고 계단으로 굴러떨어져 더 큰 부상을 당한다. 마사는 다리 부상이 심해 괴사될지도 모르니 다리를 절단하기로 결심한다. 돈 시겔은 톱을 든 마사의 그림자, 피묻은 여성의 얼굴, 뼈를 자르는 끔찍한 소리를 강조하며 다리를 절단하는 장면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한편 소피아코폴라는 이 장면을 생략한다. 돈 시겔의 마사에 근친상간이라는 개인사, 존 맥버니를 향한 성적욕망, 질투에 눈이 먼 광기의 이미지가 들러붙는다면, 소피아코폴라의 마사는 다른 동기 없이 죽을 사람을 살려낸, 자기 할일을 한 멀쩡한 선한 인물로 그려진다. 다리가 절단된 존 맥버니는 절단된 다리를 보고 경악을 금치 못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콜린패럴은 모두 ‘질투에 눈이 멀어 자신의 다리를 잘랐다’고 격분한다. 심지어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자신의 ‘남성성’을 거세당한 것으로 분노를 표출하기도 한다. 그러나 콜린 패럴의 ‘격분’은 조금 우스워보이는 구석이 있다.



  다리가 절단되는 사고가 있기 전, 존 맥버니(콜린 패럴)은 여학교에서 남고싶어 했다. 자신을 소개하는 대사에서도 밝히듯 ‘자신은 신념때문에 참전한 것이 아니라 ‘돈’을 벌기 위해 참전’한 군인이며, 부상당한 다리가 회복되면 떠나지 않고 여학교에 남아서 일을 하고 살고싶다는 의사를 피력한다. 여자들만 있는 여학교에 정원 일을 도맡아 하는 남자가 필요하지 않겠냐고(마사는 ‘전쟁 중에 모든 걸 하고 살순 없다’고 딱잘라 선긋는다). 소피아코폴라는 존 맥버니가 정원 일 하는 장면을 성의 있게 보여준다. 그는 땀흘려 일하고 남성의 힘을 과시한다. 정원일이라는건 남성의 성적매력을 뽐내는 클리셰같은 장면인데, 존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이 장면은 그의 섹시미를 돋보이게 하기보다는 궁핍하게 만든다. 그는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여학교의 노예를 자처하는 입장(회복되면 떠나라는 마사 원장에게 ‘전쟁이 끝나면 전 어디로 가야하죠’라고 묻는다)이고, 자신의 성적매력으로나마 여성들에게 잘 보이고자 안간힘을 쓰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콜린 패럴의 분노는 여성의 질투로 희생된 남성성이 아니라 남성만이 할 수 있던 ‘일’, 힘쓰는 능력조차도 여성에게 빼앗겨버린 현실에 대한 남성의 분노는 아니었을까. 존 맥버니는 노동 수단인 다리 한 짝을 훼손당한 것이고, 결국 성적 매력에도 실패해 몸뚱아리만 남아버렸다. 그에게 다리절단은 어마어마한 재산손실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술에 취해 미쳐날뛰는 남자로부터 마사 원장은 공동체를 지켜야했고 독버섯을 먹여 존을 죽인다. 식구를 지키기 위해 못할 것이 없는 어머니 마사원장은 돈 시겔의 마사처럼 존의 눈을 피하거나 고개 숙이지 않는다. 그녀가 공동체로부터 불청객이라는 이물질을 처리하는 모습은 당연하고 당당하다.
  나는 소피아코폴라가 남북전쟁이라는 역사적 맥락, 노예 ‘할리’ 캐릭터를 지운 의도가 여전히 궁금하다. <매혹당한 사람들>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남성들이 모두 전장에 나간 부재 속에 홀로 가정에 남겨진 고상하게 살아온 부인들의 심리적 충격과 변화들일텐데, 이 역사적 조건이 생략된 여학교에서의 백인여성승리?의 이야기가 무슨 교훈을 주는지 잘 모르겠다. 역사적 조건이 사라져야 고립된 무릉도원이 완성되고 여성은 그 조건 속에서야 강인해질 수 있다는 판타지인가? ‘ㅅ’ 아무튼 두 작품을 비교해서 볼 때, 소피아 코폴라의 <매혹당한 사람들>은 아름답고 흥미로운 영화였다. 여성의 관점에서 다시 이야기한다는 점은 재미있었지만 궁극적인 영화의 메시지는 여전히 생각할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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