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프디 형제
도시에는 비밀이 숨겨져 있다. <네이키드 시티>(1948)가 보여주는 필름 느와르의 도시는 넘쳐나는 욕망으로 복잡하게 얽힌다. 그럼에도 도시의 일상은 멈출 줄 모른다. 대도시 뉴욕은 어떤 인상으로 남아있을까. 뉴욕의 대가라고 할 만한 마틴 스콜세지의 세계는 잔혹함으로 얼룩진 뒷골목의 어둠에 젖어있다(<비열한 거리>(1973), <좋은 친구들>(1990),<성난 황소>(1980) 등). 낭만과 거리가 먼 뉴욕은 정신적 권태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퇴폐의 세계(<비상근무>(1999), <택시 드라이버>(1976))였고, 시드니 루멧의 뉴욕 역시 눅눅한 열기에서 벗어날 수 없는 갑갑한 현실(<형사 서피코>(1973), <뜨거운 오후>(1975))이었다. 아벨페라라의 뉴욕은 타락에서 구원의 가능성을 묻는 극단성으로 몸부림치게 하는 모순의 세계다(<킹 뉴욕>(1990), <악질 형사>(1992)). 범죄와 마약, 섹스와 폭력 속 실존의 위기와 허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우디 앨런의 <맨해튼 살인 사건>(1993)을 떠올리는 건 어떨까. 필름 느와르의 정전이라고 할 만한 <빅 슬립>(1946)의 미로에서 <이중 배상>(1944), <상하이에서 온 여인>(1947), <이창>(1954)의 장면을 거친 도시의 삶이 능청스러운 웃음으로 회복하는 이야기 말이다. 우디 앨런의 뉴욕은 유쾌한 활기로 가득하다. 이 모든 이야기가 가짜 같다면 도시의 일상을 떠올리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특근>(1985)과 <인사이드 르윈>(2013)의 미스터리하고 고단한 하루를 말이다. 뉴욕은 다양한 인물들이 마주하는 사건과 욕망의 세계로 우리를 찾아오곤 했다. 그리고 우리는 멈추지 않는 욕망을 따라 도시의 미로를 헤맨다.
사프디 형제가 비추는 세계에서 천연덕스러운 장난기나 낙관은 옅어진다. 그들이 비추는 뉴욕은 마피아와 갱이 활개를 치던 브루클린의 분위기와도 거리를 둔다. 카메라는 외곽 퀸스나 브롱크스 거리를 비추기도 하며 맨해튼을 무대로 삼을 때조차 현대의 시간으로 흡수되지 않은 거리의 면면을 화면에 담는다. <굿 타임>(2017)의 시작과 함께 등장하는 건물은 철 지난 SF영화 속 구조물(실제로는 브루클린의 티볼리 타워)처럼 서 있고 동네 은행과 보석금 채권 대행사는 시대의 흐름에서 조금 빗겨 난 것처럼 보인다. 백인보다 아시아인들이 많은 쇼핑몰이나 음습한 우범지역의 롱아일랜드 어드벤처 랜드는 대도시가 아닌 주변의 풍경으로 등장한다. 주변부 풍경은 소외된 이들의 무대이다. 마약과 절도, 노숙을 일삼는 <헤븐 노우즈 왓>(2014)의 인물들은 다수의 이민자가 활보하는 무관심한 거리를 소요한다. 맨해튼 중심부를 활보할 때조차 인물은 무리에서 이탈한 개별자로 도시를 떠돈다. <언컷 젬스>(2019)의 인물은 무리에서 이탈한 <검은 풍선>(2012)의 검은 풍선이나 <도난당하는 것의 즐거움>(조쉬 사프디, 2008)에서 도벽으로 자유롭게 유랑하는 소녀처럼 도시 이곳과 저곳을 바쁘게 오가며 갈등을 쌓아간다. 도시의 일부로 기능하지만 도시의 삶에 녹아들지 못하는 <솔리드 골드>(2012)와 <골드 맨 V 실버 맨>(2020)의 거리연기자는 맨해튼 중심부에서 모두와 만나지만 누구와도 관계를 맺지 못하는 외톨이다. <아빠의 천국>(2009)의 이혼한 부부 역시 마찬가지다.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도시를 살아가지만 도시는 이해할 수 없고 적응하기 힘든 일상의 반복이다. 위태로운 면면이 공존하는 도시의 삶은 혼돈의 낯선 세계다. 사프디 형제의 세계가 곤란한 것은 지구 반대편의 삶이 현재 우리의 삶과 다를 바 없는 세계로 다가온다는 것이고 영화가 끝나더라도 지속할 것만 같은 불안이 지배하기 때문이다. 도시라는 미로를 헤매도록 강제하는 감각, 이것이 사프디 형제 작품의 매력인 것 같다.
카메라는 거리를 향한다. 평범한 일상의 도시는 핸드헬드의 흔들림과 빠른 컷으로 친숙한 사실이 된다. 거리 캐스팅으로 배역을 맡은 비전문 배우의 연기와 이를 담아내는 망원 렌즈는 날 것의 사실성을 전달하려는 노력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사실의 세계는 예상조차 할 수 없는 인물과 사건을 만나며 다른 세계로 미끄러지곤 한다. 분명한 목적이 있던 여정은 예상치 못한 다른 인물을 만나며 새로운 여정으로 변모하거나(<우리는 동물원에 간다>(조쉬 사프디, 2006)), 사소한 감정이 일으킨 물결이 예상치 못한 반향을 일으키며 인물이 밀려나기도 한다(<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없다>(2008)). 사실을 기록한 다큐멘터리적 연출과 설정된 연기를 오가는 실험에서도 한 남자의 평범한 일상은 즐거운 에너지를 준다(<랄프 헨델 이야기>(2006)). 무엇이든 제 것처럼 훔치는 도둑질은 꽤 심각한 것이지만 우리는 긴장과 불안 대신 유희적인 발걸음으로 도시를 구경한다. <도난당하는 것의 즐거움>의 엘레노어(엘레노어 헨드릭스)는 선물을 풀어보는 아이의 설렘으로 훔친 물건을 열어보곤 한다. 평범하고 특이한 것 없는 도시의 일상은 호기심이 이끄는 여정으로 흥미롭다.
도시를 유랑하는 인물들은 기이한 여정을 시작한다. <존스 곤>(2010) 이후로 사프디 형제와 자주 협업해왔으며 <아빠의 천국>에서 레니를 연기한 작가 로날드 브론스타인은 날 것의 도시를 사실적인 악몽으로 그린다. 로날드 브론스타인이 연출한 <프라운랜드>(2007)의 주인공 키스(도어 만)는 가장 가까운 관계일 자살하려는 친구와도, 오만한 뮤지션 룸메이트와도 제대로 소통하지 못하는 방문 쿠폰 판매원이다. 소통 불가능함은 심리적 고통과 불행한 몸짓이란 반응만을 낳는다. 핸드헬드 카메라, 점프 컷, 극단적으로 왜곡된 키스의 클로즈업된 얼굴은 홀로 길을 잃고 분투하는 불안과 긴장을 전달한다. 소통이 힘든 일상 세계는 폐쇄 공간에서 질식할 것만 같은 감각으로 그를 몸부림치게 한다. <프라운랜드>의 말더듬이 주인공은 출구 없는 세계와 마찰하며 혼란을 겪는 사프디 형제의 세계에 자리 잡는다. <존스 곤>의 존(베니 사프디)은 사건 없는 하루를 보내는 한량 같은 인물이라는 점에서 <외로운 존의 지인>(베니 사프디, 2008)의 존과 닮아있지만, 자크 타티 영화 속 ‘윌로씨’의 천연덕스러운 웃음(<윌로씨의 휴가>(1953))보다 고요한 절망에 놓인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이유 없이 선의를 베풀기도 하던 존은 이웃의 조롱과 비웃음에 내쫓기듯 프레임 밖으로 밀려나고 “I'm so Depressed”의 엔딩 곡(Abner Jay)이 빈자리를 대신한다. 이제 일상은 한 치 앞도 예상할 수 없는 비관적 전망의 낯선 세계로 남겨진다.
사프디 형제의 작품은 쉬이 드러나지 않는 인물의 내면, 차단당하는 시야, 당혹스러운 음악으로 몰입을 방해한다. 그러나 이미지는 끊임없는 해석을 요구하는 탓에 우리는 불안의 감각을 놓지 못한다. 동시적으로 일어나는 사건과 겹치는 목소리는 어떤 메시지에도 머물 수 없게 한다. 미처 앎이 끼어들 시간적 여유가 없는 현실의 반영이기도 하다. 앰비언스나 드론 사운드로 웅성대는 전자음악은 인물의 감정과 서사의 기능 주변을 맴도는 대신 불안정하게 흩어져 몰입과 예지적 능력을 방해한다. 감정 이입이 힘든 캐릭터 탓일까. <언컷 젬스>의 도박중독자 하워드(아담 샌들러), <굿 타임>에서 거짓과 범죄행각만을 일삼는 코니(로버트 패틴슨), <헤븐 노우즈 왓>의 마약중독자 할리(아리엘 홈즈), <아빠의 천국>의 무책임하고 어리숙한 어른들, <도난당하는 것의 즐거움>의 소매치기 소녀까지, 남을 속이거나 제 욕망에만 충실한 인물의 부도덕함 때문은 아닐까. 그러나 인물의 행위는 순간을 대처하는 찰나의 반응일 뿐 내면의 동기나 정체성으로 환원되지 않기에 오히려 믿을 수 없는 것이 된다. 동의할 수 없는 행위에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주의를 기울여 관찰하고 불안한 운명에 동참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섣부른 결론보다는 조심스러운 관찰이 도움이 될 것 같다. <헤븐 노우즈 왓>은 어떤 부분들에서 시작한다. 카메라는 타들어 가는 꽁초가 들린 손과 엉킨 머리카락, 키스하는 입술과 어루만지는 새카만 손이란 흔들리는 부분들을 비춘다. 시간이 흐르면 부분들의 뒤엉킴이 길바닥에서 나누는 사랑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의미는 울음소리가 중첩되면서 낙관하기 힘든 것이 된다. 다음 쇼트에서 사랑과 울음소리의 주인공인 할리가 도움을 요청하며 힘겹게 흐느낄 때 우리는 사랑과 슬픔의 양가적 감정의 불안정함에 의문을 품는다. <굿 타임>의 첫 쇼트는 전체에 관한 것이지만 영화는 부분에서 시작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도시 전체에서 건물의 창으로, 전체에서 부분으로 좁혀지는 부감 쇼트 이후 우리는 (두 쇼트를 중계하는 어떠한 쇼트도 없이 곧장)한 남자의 눈을 클로즈업하는 쇼트와 맞닥뜨린다. 문장해석을 요구하는 상담가의 목소리와 남자의 무표정, 긴 노출 시간은 얼굴이 놓인 프레임 바깥의 상황을 질문하게 한다. 이 남자가 ‘닉(베니 사프디)’이란 인물이며 지적장애가 있는 내담자임을 알 때쯤 시종일관 변화 없던 얼굴은 ‘프라이팬’, ‘소금과 물’, ‘해변’이라는 단어와 결합하며 소금기 머금은 얼굴로 바뀐다. 그가 겪었을 복잡한 사건과 감정변화에 의문이 들 때, 눈물 흘리던 얼굴은 심문처럼 변한 상담내용으로 붉어져 우르르 떨린다. 우리는 갑작스럽게 출현한 부분으로 배제된 전체를 조심스럽게 예상하지만, 이 예상은 중첩된 소리나 갑작스러운 감정의 출현으로 수정될 것을 요구받는다. <언컷 젬스>의 시작은 <굿 타임>과 유사하다. 에티오피아 웰로 광산을 비추던 카메라는 전체에서 부분으로, 특정 사건과 훼손된 신체를 회피하듯 빠져나간 두 광부를 따라 빛을 발하는 광물, 광물 내부를 관통한 후 유동하는 세포와 반짝이는 점액질의 물컹한 장기를 지나 대장내시경 화면을 출력하는 모니터로 빠져나온다. 에티오피아 광산과 오팔, 광물 내부와 신체 내부는 전체에서 부분으로, 원자적 부분이 우주적 전체의 이미지와 조응하는 운동으로 연장되며 최종적으로 하워드라는 인물에 도달한다. 이후 카메라는 이 물질의 운동과는 전혀 무관한 것으로 보이는 인물의 운동을 비춘다. 끊임없이 떠들어대며 이동하는 하워드는 방향을 잃은 듯 이곳 저곳과 충돌하며 돌아다닌다. 문과 문 사이를 관통하는 주인공의 운동이 원자 세계나 몸의 세포처럼 움직이는 전체의 운동과 연결된다는 인식은 운동이 정지한 후 사후적으로 찾아온다. 우리는 어떠한 앎에 도달할지 알 수 없는 이행 속에서 운동의 속도와 사소한 변화에 집중한다. “전진하는 파고점의 앞쪽에 산다.”는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의 말처럼, 우리는 거대한 동요로만 세계를 경험한다. 전체에서 이탈한 얼굴이라는 표면은 직접적인 경험의 장을 펼치며 변화하는 현재의 긴장에 머물도록 한다.
의문스러운 것은 날 것의 현실이 사실에서 거리가 먼 낯선 세계에 도달한다는 점이다. 연기가 아닌 배우의 실제 일상을 촬영한 듯 흔들리는 얼굴은 불안의 감각을 직접적으로 전달하지만, 이 경험은 결코 그들의 현실이나 사실들을 보충하지 않는다. 인물들의 연기는 무엇을 겨냥하는 걸까. <헤븐 노우즈 왓>에서 할리를 연기한 실제 홈리스 약물중독자 아리엘 홈즈는 자신의 삶을 카메라 앞에서 연기한다. 그녀가 연기하는 캐릭터 할리는 배우의 실제 삶과 아리엘 홈즈가 쓴 미출간 자서전을 배경으로 한 <헤븐 노우즈 왓>의 각본 사이 어딘가를 부유한다. 할리의 얼굴은 단순히 약에 취한 상태만을 드러내지 않으며 영화의 서사를 끌어가기 위한 감정의 수단이 되는 것 또한 거부한다. 그녀의 얼굴은 사랑하는 이의 무시나 냉대를 견디거나 가벼운 유희와 권태, 오해가 불러온 긴장과 불쾌, 함께 도둑질 하고 약에 취하는 즐거움, 이별과 비탄이란 자발적이고 수동적인 감정이 교차하는 흐름이자 변화가 겹겹이 쌓이는 표면이다. 영화는 먼발치에서 할리의 행위를 지켜보며 사실을 압도하는 클로즈업된 얼굴로 감정을 전달한다. 화염에 휩싸인 일리야(칼렙 랜드리 존스)의 얼굴과 할리의 잠든 얼굴이 겹치는 찰나, 할리의 얼굴은 객관적 세계나 주관적 심상에 머물지 않는 새로운 표면과 관계한다. 도움을 호소하는 절절한 외침과 흐느낌은 일리야가 사라진 상실과 관계하며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사람과 홀로 눈물 흘리는 이의 슬픔, 한 치의 변화도 허락하지 않는 세계의 잔인함과 그 세계로 되돌아가는 방법 외에 다른 도리가 없는 암담함으로 확장된다. 할리의 얼굴은 ‘아무도 모르는(Heaven knows what)’ 사랑이 있었던 현실과 그 사랑이 사라진 허구의 세계를 오가는 혼란을 품는다.
실제 아리엘 홈즈와 거리에서 어울렸고, <헤븐 노우즈 왓>에서 마이크로 등장했던 버디 듀레스는 <굿 타임>에서 범죄자 레이를 연기한다. 버디 듀레스 역시 실제 마약 범죄로 라이커스 섬 교도소(Rikers Island)에 수감된 경험이 있다. 흥미로운 것은 코니의 운동에 레이가 개입하면서 운동의 방향이 변화한다는 점이다. <굿 타임>에서 코니의 얼굴은 상황에 맞는 가면을 갈아 끼우는 표면이다. 닉과 단둘이 있을 때는 둘도 없는 형, 여자친구 코리(제니퍼 제이슨 리)에게는 동생을 돕는 착한 남자친구인 코니는 낯선 사람 애니(글래디스 매턴)에게는 무능력하지만 친절한 청년이 되고, 손녀 크리스탈(탈리아 웹스터)에게는 성적 환상과 무료함을 채워줄 남자로, 경찰 앞에서는 놀이공원 경비로 자신의 얼굴을 바꾼다. 코니의 얼굴은 은행을 털 때 썼던 흑인 노동자 가면과 다를 바 없다. 반면 닉의 얼굴은 변화를 거부한다. 얼굴에 씌워진 가면 벗기를 힘겨워하는 닉은 얼굴에 분사된 붉은 페인트나 최루액을 스스로 닦아내지 못한다. 고통을 벗어던지지 못하는 얼굴은 고통에 오래 머무르며 통각이란 감각을 고스란히 전달한다. 닉의 부동의 얼굴은 모든 변화에 재빨리 반응하는 코니의 유동성을 더욱 강조한다. 코니의 얼굴은 진짜 얼굴을 가늠할 수 없는 변화 자체임으로 쫓기는 신세지만 제약 없이 자유롭다. 다이 팩(dye pack) 염료나 네온사인 빛으로 물든 코니의 얼굴에서 자아의 고유한 특질은 희미해진다. 빛을 흡수하는 유령, 코니가 닉에 준거해서만 행동하고 생각하며 움직이는 이유다. 가령 코니가 병원 복도에서 병실로 몸을 숨길 때 병실 주인인 할머니는 ‘누구세요’라고 질문하지만 코니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든 될 수 있는 그는 그 누구도 아니기 때문에 대답이 없다(그러나 할머니를 대하던 습관을 반영하듯 그는 조용히 음료를 따서 먼저 먹인다). 크리스탈은 어드벤처 랜드의 경비원이 된 코니를 얼빠진 눈빛으로 바라본다. 코니와 시간을 보냈지만 어떤 인물인지 모르기에 그녀는 말을 잇지 못한다. 심지어 코니는 경비의 애완견마저 속인다. 세상을 관통하며 모두를 곤란하게 만들던 코니의 얼굴은 레이를 만나며 자신의 경로를 벗어난다. 코니는 자신과 비슷한 날을 보낸 레이의 삶에 빨려 들어가듯 레이가 숨겨둔 약을 찾고, 그 약을 팔아서 돈을 챙기려 한다. 레이의 여정을 따르는 코니의 여정에 닉은 사라지고 없다. 성공적이던 허구적 인물의 여정은 경찰에 붙잡혔던 레이의 과거를 자신의 현재로 마주하며 실패로 끝난다. 빛을 흡수하는 유령은 세계를 자유롭게 통과하지만, 그 자신이 유령이기에 저항할 수 없다. 레이의 추락을 뒤로한 코니의 표정은 끝내 자신이 속한 세계를 알 수 없었던 고백과도 같다. 클로즈업된 코니의 얼굴에서 현실의 창살은 끝내 사라지지 않는다. 영화는 실제와 허구로 교란된 단단한 세계에 코니를 구속한다.
<언컷 젬스>에서 실제와 가상이 상호 교란하는 방식은 전작들보다 직접적이고 노골적이다. 주인공 하워드는 실제의 삶에 둘러싸인 캐릭터이다.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인 케빈 가넷(케빈 가넷)이나 가수 더 위켄드(더 위켄드)뿐 아니라 실제 맨해튼 다이아몬드 거리의 큰 보석상 아들인 조나단 아란바예프는 하워드의 아들을, 실제 40년을 거리에서 일해 온 마샬 그린버그와 로날드 그린버그 역시 셀틱스 챔피언쉽 링을 받고 대출해주는 보석상으로, 로날드 그린버그의 실제 여자친구인 안드레아 린스키는 하워드의 비서 조아니로 등장하며 현실 속 자신의 삶을 연기한다. 하워드란 캐릭터는 다를까. 그는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제 욕망에 충실한 인물이지만 배우 아담 샌들러를 혐오하기란 쉽지 않다. 온몸으로 부를 자랑하는 하워드의 외관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인조 치아다. 아담 샌들러의 얼굴을 억지로 입 벌려 만들어낸 듯한 하워드의 미소에는 치아를 내보이면서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려는 억지스러움이 묻어난다. 이 미소는 <웨딩 싱어>(1998), <빅대디>(1999), <클릭>(2006) 등의 코미디 영화에서 다혈질의 미성숙한 남성 주인공을 연기했던 아담 샌들러가 부정적 감정을 미소로 억누르던 순간을 상기시킨다. 미소는 <펀치 드렁크 러브>(2002)나 <레인 오버 미>(2007)에서 폭력적이고 기이한 방식으로 표출되던 불안한 내면을 슬쩍 가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자신이 유대인임을 숨기지 않았던 스탠드업 코미디언 아담 샌들러(‘Chanukah Song’)의 이력을 반영하듯 하워드 역시 모두에게 선망받는 유대인이 되려고 한다. 그는 유월절 가족 행사에 참석해 47번가의 성공한 유대인처럼 보이고 싶어 하거나, 유대인의 스포츠로서 농구를 좋아한다. 허구 캐릭터인 하워드의 멍청한 미소(아내의 대사)는 거북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 얼굴을 아담 샌들러의 친숙한 미소로 받아들이기에 타인을 속일지언정 관객을 속이지 않는 하워드의 심정을 어느 정도 이해하려고 한다. 대책 없는 거짓말쟁이 캐릭터는 배우의 실제 삶의 내용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인다.
허구의 인물 하워드가 실제 배우인 아담 샌들러를 참조하며 현실과 영화 사이 어딘가에 캐릭터를 머물게 하듯이 영화의 현실은 실제와 허구를 오가는 대상으로 교란된다. 욕망의 대상인 오팔 원석의 내용은 무엇인가. 누구도 실제 가치를 확인한 바 없는 잿빛 돌덩이는 히스토리 채널의 다큐멘터리와 인터넷 자료의 피상적 이야기에서 출발해 100만 달러 가치를 지닌 값진 보석이란 하워드의 환상, 신비한 힘이란 케빈 가넷의 환상으로 모습을 바꾸며 육중한 무게를 갖는다. 그것의 존재감은 진열대 유리를 깨뜨릴 정도이니 말이다. 스포츠 도박이라는 취미 역시 환상이다. 뉴욕 닉스(New York Knicks) 골수팬이지만 보스턴 셀틱스(Boston Celtics)를 응원하는 이유는 단순히 수익금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하워드는 농구라는 스포츠 자체가 아니라 복잡한 베팅내용으로 요약된 자신의 예측과 승패를 오가는 환상에 깊이 빠져들길 원한다. 하워드의 환상은 케빈 가넷이라는 환상과 만나며 허구의 표면을 뚫고 나올 듯 강력해진다. 원석에서 출발한 욕망은 실제 농구선수 케빈 가넷과 보석에 미친 영화 캐릭터 케빈 가넷, 하워드의 환상 속 케빈 가넷으로 복수화된 타자의 욕망을 만나며 케빈 가넷 찾기, 오팔 찾기, 오팔을 현금화하기, 현금의 기대로 다시 케빈 가넷을 향하는 미로에 갇힌다. 그를 미쳐 날뛰게 한 것은 오팔을 빌린 케빈 가넷이지만 그를 진정으로 흥분하게 만드는 것은 오팔을 구매한 중계화면의 케빈 가넷이다. 아르노 일당이 유리문에 갇혀 강제로 보게 되는 이 중계화면은 실제 케빈 가넷이 2012년에 경기한 셀틱스 대 필라델피아(Philadelphia 76ers) 기록 영상이다. 실제 기록 영상이 허구의 이야기 속 환상의 내용을 완성하는 셈이다. 하워드는 환상으로 격리된 현실 속에서 자신의 기념비적인 작품인 다이아몬드 퍼비(Furby)처럼 잔뜩 흥분해 눈을 부라린다. 눈을 돌릴 수 없을 정도로 실제적이고 강력한 환상은 모두의 시선을 빨아들인다. 우리는 실제와 환상이 뒤엉킨 낯선 세계를 현재로 마주한다.
도시는 무수한 환상이 관계하고 거래되는 세계다. 나의 욕망은 누군가의 욕망을 만나면서 유지된다. 불확실하고 유동적인 얼굴은 현실과 환상이 교란된 낯선 세계에 반응하며 그 표면을 더듬어 왔다. 사프디 형제는 자신의 욕망이 반영된 환상을 사랑한 나머지 상실을 받아들이거나 견디지 못해 빠져드는 잔혹한 낙관을 질문한다. 우리가 확인한 사랑은 대상이 부재함으로써 유지되는 환상에 대한 사랑이다. 닉이 부재함에도 불구하고 코니를 이끈 힘은 자신이 약속한 버지니아에서의 소박한 삶이다. 보석이 값어치 있는 돌덩이에 불과하더라도 미래가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한 하워드의 사랑은 멈출 줄 모른다. 두 사람은 욕망을 유지하기 위해 대상 없는 욕망을 환상으로 보충한다는 사실, 좋은 삶이란 미래를 위해 현재의 삶을 소진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 사랑의 결과는 어떠한가. <굿 타임>의 마지막 장면이 우리를 가슴 아프게 하는 것은 코니의 부도덕함이나 실패 때문이 아니라 그의 노력이 사랑의 수신에 실패하면서 홀로 남겨진 이의 망연한 외로움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무모했던 코니의 사랑은 ‘형은 책임질만한 행동을 했다’라던 상담사의 흐릿한 언급 정도로 요약된다. 각기 다른 세계로 분리된 두 형제의 사랑은 동일한 세계에서 조우할 기회를 잃는다. <언컷 젬스>의 마지막 장면이 허탈한 웃음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죽음만이 그 사랑을 끊어낼 수 있었던 유일한 탈출임을 알기 때문이다. 환상에 취한 채 죽음을 맞이한 하워드에게 남겨진 것은 역설적인 순간에 인조 치아를 드러낸 입과 총상의 텅 빈 구멍이며 신체의 구멍은 다른 세계로 나가는 길을 열어준다.
사프디 형제는 실제와 허구로 교란되는 세계의 실패를 통해 현실의 잔혹함을 일깨운다. 사랑이 부재한 현실에 갇혀 사랑으로만 유지되는 미래를 향한 얼굴들. 그 얼굴을 바라보고 경험하고 견디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영화로 마주한 현실과 현실이 뒤엉킨 허구 사이에서 대상을 찾아 헤매는 필름 느와르의 세계는 감각될 정도로 직접적이며 실제적인 허구라는 점에서 잔혹하다. 현실의 재현이길 멈춘 영화는 허구로 보충된 현실, 허구의 실재성을 드러내며 낯선 세계가 진실임을 주장한다. 나는 낯선 감각으로 미로를 헤매는 사프디 형제의 또 다른 세계를 경험하고 싶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