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오르는 여인의 초상>(2019)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2019)은 순간을 기억의 총체로 확장한다. 텅 빈 화판에 그어진 선은 흐릿한 형체로 나아가고 신중한 손길을 거친 흰 면은 어느새 화가의 인상으로 채워진다. 엘로이즈(아델 하에넬)의 부분을 붙들고 화폭에 옮겨 담는 마리안느(노에미 멜랑)의 작업은 불완전하다. 화가는 대상을 관찰한 순간과 그 순간을 상기시키며 초상 앞에 선 시간의 간극을 극복하기 힘들다. 결국 마리안느는 제 손으로 엘로이즈의 얼굴을 지운다. 이후 초상화는 화가가 홀로 붙드는 순간이 아닌 함께 나누는 기억으로 완성된다.
초상화는 시선이 오가는 순간을 겹겹이 쌓으며 관계의 흔적으로 남는다. 그림은 화가의 주관으로 그려지지만 그림의 모델은 화가의 주관 바깥에 있기에 엘로이즈와 마리안느의 시선은 충돌한다. 힐긋거리며 관찰하던 마리안느의 시선은 마주하는 시선으로 종종 끊어지고 차단되다가 하프시코드(harpsichord)를 연주할 때 시선은 조금 더 길게 서로에게 머무른다. 둘만의 시간이 허락되었을 때에야 화가와 모델은 같은 시간 속에서 온전히 시선을 나누게 된다. 그림이 모델을 닮으려면 화가는 그 살아있는 시선을 화폭에 옮겨 담아야 한다. 마리안느는 임신한 하녀 소피(루아나 바야미)를 돌보는 일상 속에서 사소한 행위를 나누는 편안한 관계, 사랑의 쾌락에 젖거나 갈등하는 내밀한 관계로부터 모델의 숨겨진 얼굴을 알아간다. 관찰자인 화가의 위치 역시 모델에게 보이는 위치에 있다는 엘로이즈의 말은 시선을 평등한 관계의 상호적 행위로 재조정한다. 모델의 얼굴에 녹아든 감정과 시선으로 완성된 초상화는 애초의 목적에서 벗어나 특수한 관계의 결과물로 남는다.
셀린 시아마 감독의 전작을 돌이켜보면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관계는 꽤 특수하다. 여인들은 사랑을 의심하지 않으며 스스로 반성하거나 상대를 탓하지 않고 온전한 관계를 맺는다. 전작의 인물들은 남성적 시선이 지배하는 사회의 모순으로 관계한다. 데뷔작 <워터 릴리즈>(2007)의 주인공 마리(폴린 아콰르)와 친구 안느(루이즈 블랑셰르)는 낭만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첫사랑을 경험한다. 마리가 좋아하는 수중발레 선수 플로리안(아델 에넬)은 부정적 방식으로 여성성을 소비한다. 또래에게는 질시의 대상, 남자들에게는 시선의 대상이 되려는 플로리안의 태도는 마리에게 혼란을 준다. 플로리안의 몸은 진심을 나누었던 마리의 손길에는 냉담하지만, 남성의 시선과 몸짓에는 쉽게 무너진다. 플로리안의 남자친구인 프랑수아(워렌 자퀸) 역시 성욕 해소를 위해 안느의 몸을 이용한다. 두 소녀의 첫사랑은 남성적 시선 아래 불가능한 관계로 남는다. <톰보이>(2011)의 로레(조 허란)가 경험한 정상사회의 모순은 친밀하고 일상적이라는 점에서 잔인하다. 아버지와 함께 운전하길 좋아하고 아이처럼 떼를 쓰지도 않으며 세심히 동생을 살뜰히 보살피는 성숙한 10살 소년 미카엘은 사실 소녀다. 이 소녀는 소년 못지않게 터프한 축구를 즐기고 주먹으로 상대를 제압하기도 한다. 소년 미카엘이 실은 소녀 로레라는 사실이 드러나자 모든 이의 태도는 변한다. 심지어 미카엘에게 키스한 리사(잔느 디슨)까지 말이다. 바지를 입건 원피스를 입건 이 10살 아이는 그대로지만 로레는 증오 섞인 친구의 냉대와 공개적인 성추행을 겪는다. 로레를 불온한 존재로 바라보는 시선은 모순된 세계의 것이다. 그 세계를 모르는 동생 잔느(말론 레바나)만이 로레를 온전히 받아들인다. <걸후드>(2014)의 마리엠(카리자 투레)은 가정과 사회에서 소외된 삶을 살아간다. 인문계 고등학교에 갈 기회를 잃은 학교나 엄마의 빈자리를 대신하며 오빠의 폭력을 견디는 가정에도 마리엠의 자리는 없다. 마리엠은 열여섯 살 또래 소녀들, 레이디(아사 실라), 아디아투(린지 카라모), 필리(마리에투 투레)를 만나 ‘빅(Vic)’이라는 새로운 이름과 ‘절대 잊지 못할 완벽한 순간’을 가지며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간다. 그러나 여성의 위치는 위태롭다. 소녀 4인방은 언제나 남성 조직의 권력 아래에 있고, 과거 무리의 일원이었던 스위티(나세레바 키타)라는 친구는 아이 엄마가 되어있다. 유일한 피난처인 남자친구 이즈마엘(이드리사 디아바테)은 생각에도 없는 결혼을 권하고, 조직 보스인 아부(지브릴 게이)는 마리엠의 성을 이용하려고 한다. 마리엠은 남성 조직에서 돈을 벌기 위해 자신의 여성성을 감추면서도, 때론 그 여성성을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하기도 한다. 룸메이트 모니카(딜리카 쿨리발리)만이 그녀의 마음을 위로하고 다독인다. 셀린 시아마가 그리는 여성의 연대는 남성적 시선과 권력이라는 부정 속에서 위태롭게 손을 맞잡는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남성적 시선과 권력이 차단된 순간에 완성된 온전한 관계를 그린다는 점에서 특수하다. 내밀한 관계는 결혼을 압박하는 어머니(발레리아 골리노)가 자릴 비우면서 자연스럽게 시작된다. 주고받던 시선은 화염에 쓰러진 엘로이즈를 일으키던 손과 손, 해변에서 맞잡고 갈등하던 손과 손으로, 그리고 불길이 옮겨붙듯 사랑으로 확장된다. 이제 화가는 관찰자의 시선에 머무르는 대신 모델과의 관계로 끌어당겨 진다. 그리기를 멈출 때야 그림 그리는 과정이 끝나듯 사랑의 관계도 두 여인의 동등한 이해로 끝난다. 사랑의 매 순간이 묻어있는 초상화에 부정의 시선은 존재하지 않는다. 초상화는 지워지지 않는 공동의 기억으로 남는다.
사랑의 관계는 기억이 존재하는 한 영원하다. 마리안느가 엘로이즈를 처음 재회한 순간 그녀는 사랑의 순간이 기록된 ‘28페이지’를 들추고 있다. 마리안느가 엘로이즈를 마지막으로 본 순간에도 그녀는 기억의 일부인 ‘비발디의 사계 중 여름 3악장’을 감상한다. 마지막 순간,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시간의 흐름에도 가슴 벅찬 정념에 휩싸이는 엘로이즈의 얼굴이다. 눈을 질끈 감아 감정을 억누르지만, 기어이 흘러나오는 눈물에 숨을 몰아쉬고 주체할 수 없는 슬픔과 환희를 오가며 앞을 주시하는 엘로이즈의 옆모습. 흐려진 냉혹한 현실 앞으로 전방을 주시하던 마리엠의 선명한 옆모습(<걸후드>)처럼, 곧 웃음이 번질 듯 새로운 관계를 예고하던 로레(<톰보이>)처럼, 우리는 생생히 살아있을 사랑의 기억을 마주한다.
나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정면의 시선이 아닌 뒷모습으로 기억한다. 허옇게 부서지는 파도 앞에서 부동의 자세로 서 있던 엘로이즈의 뒷모습을 말이다. 자살한 언니의 과거와 자신의 미래, 이별이 예견된 사랑,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삶에 등 돌린 뒷모습은 금방이라도 자연의 거대한 흐름에 빨려 들어갈 것만 같다. 뒷모습이 위태로운 것은 우리가 오르페우스의 실패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고, 기록되지도 않은 에우리디케의 목소리가 운명에 관여하듯, 하얀 예복을 입은 미래의 환영이 마리안느의 뒤에서 나타나듯, 뒷모습에는 예상치 못한 시간의 개입이 기회를 엿보는 것만 같다. 그러나 엘로이즈의 뒷모습은 마리안느의 포옹으로 건져진다. 삶에 등 돌린 이를 붙잡는 것은 뜨거운 온도로 감각되는 현실의 사랑이다. 셀린 시아마는 비극으로 완성되는 예술 작품보다 모두를 살아있게 하는 사랑의 기억을 택한다. 그 기억으로 영원히 타오르는 삶과 소진되지 않는 사랑의 순간을 한동안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