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이 잘 안 들면 어떡" 까지 생각한 기억은 난다. 그 생각이 문장으로 만들어지기 전에 까무룩 잠이 들었다. 원래 잠드는 걸 굉장히 힘들어하는 편인데, "침대에 머리 대자마자 잠든다" 는 경험이 몹시 놀라웠다. 새벽 4시쯤 잠을 깼는데, 미국에서 온 친구는 각종 전자기기들을 혹사시키며 활발하게 활동 중이었다. 미국 시계가 밤으로 향하는 아침이 가까워오자 드디어 친구가 잠이 들었다.
매일 챙겨먹는 영양제들이 점점 많아지는 나이가 됐다. 나도 짐 한켠에 "영양제코너" 가 꽤나 큰 자리를 당당하게 차지했다. 나는 친구에게 "안 자도 잠이 안 오는 기적의 명약" 이라며 비타민 B 를 먹였고, 친구는 나에게 "혹사해도 무릎이 아프지 않은 기적의 명약" 이라며 글루코사민을 먹였다. 그렇게 이태리에서의 체력전을 위해 서로의 영양제를 투입시킨 후 조식을 먹으러 나섰다.
조식하는 곳 입구에 있는 이태리 아가씨는 어제 프론트 아저씨와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너무나 친절했다. 잠시 이태리 사람들은 왜 이렇게 친절한가에 대해서 대화를 하다가, 친절의 완성은 얼굴인데 얼굴이 예쁘고 잘 생겨서 그렇다 => 그래서 우리는 친절을 완성할 수가 없고 => 그래서 우리 인생은 미완성이고 쓰다가 만 편지이니 아름답게 써가야 한다는 기적의 논리를 이어나가며 몹시 뿌듯해했다.
텐트밖은 유럽에서 30년된 모데나산 발사믹 식초를 신주단지 모시듯 들고 다니면서 빵을 찍어먹는 모습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얼마나 맛있으면 저럴까 싶었는데 가격이 30만원이 훌쩍 넘어서 망설이다가, 10만원 정도의 가격으로 다른 발사믹 식초를 하나 사 갔다. "소화에 도움이 된다" 는 말에 평소 소화를 잘 못 시키는 친구의 지병에 도움이 될까 싶어서 라는 이유라고 정리했지만, 사실은 단순히 내가 먹고 싶어서 샀다. 조식을 먹는 식당에서 조심스럽게 꺼내서 올리브유에 섞어서 빵을 찍어먹는데, 그냥 그랬다. "이게 약이다" 생각하면 맛있게 먹을만한 정도랄까. 맛이 강해서 그런지, 빵보다는 소세지를 찍어먹는게 더 맛있었는데, 케찹과 발사믹 중 뭘 찍어먹고 싶냐고 하면 솔직히 케찹이라서 현타가 왔지만, 그냥 좋은 걸로 하기로 했다.
오늘의 첫 목적지는 까르푸 수퍼마켓. 내 친구랑 같은 회사를 다니는 이태리 아이가 "부활절이 끝난 월요일은 모든 상점이 문을 닫는다" 라는 정보를 알려주기도 했고, 토스카나 지방에서 3박할 곳이 조식이 제공이 안 되기도 해서, 먹을 것들을 사려고 했다. 그러나 까르푸는 "부활절이 끝나지 않은 일요일" 에도 문을 닫았고 원하는 먹거리를 구하지 못한 나의 불안감, 원하는 주류를 구하지 못한 친구의 불안감들을 안고 앞으로 4일간의 여행지가 될 토스카나로 이동했다.
고대 로마는 모든 신을 인정했다고 한다. (유명한 판테온도 모든 신을 위한 신전이라는 뜻이란다) 그래서 다른 나라를 정복하면, 그 나라의 종교를 포함해서 모든 걸 "살던대로 살라" 고 인정해 주고, 무역만 로마와 하는 것으로 했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유통은 큰 돈이 된다. 점령국 A 에서 물건 떼와서, 점령국 B 에 좀 더 비싸게 파는 유통업. 이런 방식으로 전세계를 상대로 유통업을 한 로마는 사업이 궤도에 오르자 1년에 100일이 휴일, 200일이 축제여도 배부르게 잘 먹고 잘 살 수 있었다. 그러나 빈익빈부익부가 심했고, 이 틈에 예수님이 세상에 등장하여 하나님이 유일한 신이라고 주장을 하자, 모든 신을 인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땅을 넓혀가던 로마의 business model 이 무너지면서 로마 시대가 끝나게 된다. 로마 시대가 끝난 후, 작은 도시 국가들 중심으로 시작된 시대가 중세시대이고, 피렌체가 중심이 된 르네상스 시대가 열리면서 중세시대가 끝난다. 토스카나 지방은 중세시대에 유명한 도시국가들이었으나, 피렌체와의 경쟁에서 밀려서, 중세시대에서 발전이 멈춘 관계로, 그 시대의 건물이 그대로 남은 곳들이다. 도시국가들이다 보니 지대가 높은 곳에서 성벽을 쳐서 적들의 침입을 감시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도시마다, 광장, 광장에 성당, 성벽 (전망대) 이라는 비슷한 루트가 존재한다. 주차장을 하나 찾아서 주차를 하고, 광장을 찾아서 간 후, 성당 구경하고, 전망 좋은 곳으로 가서 힐링. 이게 여러 블로그들을 뒤졌을 때의 비슷한 루트였다. 이 지역에 유명한 와이너리 투어는 내가 "세상에, 술도 못 먹으면서 운전도 못해?" 라는 천인공노할 쓸모 없는 존재인 관계로 패스하기로 했다.
아무튼 오늘은 천공의섬라퓨타 (치비타디반뇨레조를 외우지 못해서, 계속 "이태리 천공의섬라퓨타" 로 검색했던 곳) 와, Slow city 의 발상지라는 오르비에토를 방문한 후, 숙소로 가는 일정이다.
막상 출발하려는데 행선지로 입력할 주차장을 둘다 모른다는 걸 깨달았다. 첫 행선지이다 보니 서로 "이건 니가 알아봤겠지" 라고 생각했다. 우당탕탕 대충 주차장 하나 찾아서 입력하고, A1 고속도로가 알 수 없는 이유로 갈 수 없다며, 산길로 꼬불꼬불 안내하는 구글 지도에게 끊임없이 의심을 보내는 친구의 투덜거림을 들으며, 행선지에 도착했다. 구글지도가 외지인은 갈 수 없는 마을 안쪽 주차장으로 우리를 보내려고 하자, 이태리 아저씨들이 막아서서 돌려보내는 약간의 헤프닝과, 혹시 ZTL 벌금을 낼까 싶은 약간의 쫄림이 있었지만, 앞차와의 간격 1.3cm 까지 차를 오밀조밀 움직여 주차하는 주차달인의 쇼를 탄성과 함께 라이브로 감상할 수 있었고, 주차할 자리가 없어서 울먹이는데 우리 앞에서 차가 한 대 빠져서 긴 기다림없이 바로 주차하는 행운도 있었다.
자 이제 주차비를 어떻게 내지?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는 뭔가 돈을 내는 것같은 기계 앞에서 얼쩡거렸다. 오늘의 경험들을 요약하면 이렇다. 먼저 언제까지 주차할 건지 시간을 결정하고, 그 시간까지의 돈을 내서 티켓을 끊은 후 차에 티켓을 보이게 놔둬야 한다. 티켓을 끊는 기계는, 버튼이 많으면 차 번호를 먼저 입력한 후 돈을 내야 하고, 버튼이 별로 없으면 차 번호 입력 안 하는 거다. 동전이 들어가는 구멍은 힘으로 누른다고 동전이 들어가지 않는다. 돈을 넣어도 되는 순간에 알아서 입을 벌린다. (차번호를 먼저 입력...ㅠ.ㅠ) 크레딧카드는 아직 성공하지 못했다. (남들은 크레딧카드로도 하는 것 같았다.)
이 일련의 과정이 이루어지는데 도움 주신 이태리 여자분, "Not card number, but car number" 라며 열심히 설명해 주시던 이태리 남자분, 동전이 없어서 동전을 바꾸려고 10유로 지폐를 들고 불쌍하게 부탁하자, 흔쾌히 10유로를 11.5 유로로 바꿔주신 화장실 앞 문지기 아저씨께 대단히 감사드린다. 이러한 전 국가적인 아름다운 협조와 도움으로, 대략 20분에 걸친 주차비 정산 여정이 끝나고, 치비타디반뇨레조 근처까지 데려다주는 2유로짜리 셔틀버스를 탔다. (2시간 동안 쓸 수 있어서 돌아올 때도 쓸 수 있다. 체력이 넘치면 셔틀 안 타고 걸어가도 되는 듯 하다. 버스 대기시간이 있어서 소요시간은 엇비슷할 듯 하다.)
치비타디반뇨레조는 사진들을 보면 이게 현실에 존재하는 공간인가 싶은 입이 딱 벌어지는 느낌이다. 그런데 실제로 눈으로 보면 그것보다도 훨씬 좋다. 나처럼 고소공포증 때문에 다리 건널 때 양옆을 못 보고 친구 옷덜미를 움켜쥐고 덜덜 떨며 걸은 아이도 쌩눈으로 영접한 그 한순간이 너무 선명하여 아무 불만이 없을 정도로 좋다. 내부로 들어가면 워낙 작은 동네라 그리 많은 볼거리가 있진 않아서, 평생 두번 올 정도의 공간은 아니지만, 한번쯤은 좋은 경험이 될 것 같다.
오르비에토는 치비타디반뇨레조보다 훨씬 큰 도시다. 주차장도 여러개 있고, 아기자기한 골목들에 상점들도 많고, 성벽 전망대도 넓고 탁 트여있다. 중심부는 자리가 없을까봐 성벽 전망대 근처 주차장을 골랐는데, 주차장 자리가 안나서 한참 기다리다가 겨우 주차하고, 15분 정도 오르막을 걸어서 광장으로 갔다. 여기 있는 성당이 이태리에서 두번째로 큰 성당이라는데, 보통 성당 안으로 갔을 때 느끼곤 하는 정서적으로 압도하는 그런 느낌은 없었다. (내가 정서적으로 변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전에는 천장을 보며 마냥 신기해 하고 홀리홀리 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저기서 그림 그린 아이는 어떤 자세로 얼마나 오래 그렸을까, 목디스크는 안 왔을까 같은 구체적인 상상을 하느라 홀리해지지 않았을지도.) 이 성당에서 가장 신기했던 건 정면 외관이었다. 마치 하늘을 도화지삼아 그림을 그려놓은 것 같은 느낌이다. 성당을 보고 나오니 비가 와서 골목의 정취를 충분히 느끼지는 못했지만 야무지게 젤라또도 하나 사 먹고 카페에 들어가서 커피도 한잔 마셨다. 이태리 유경험자인 나는 늘 무난한 "카푸치노" 를 주문해서 먹었는데, "아메리카노" 를 마시고 싶었던 내 친구는, 커피부심이 높은 직원의 "아메리칸 커피" 라는 몹시 또박또박한 발음의 비웃음과 함께 다소 부끄럽게 커피를 마셨다. 이태리 식당은 자리세를 낸다는데 이 곳은 자리세도 받지 않았다. 카푸치노 1.2유로, 메뉴판에 없던 "아메리칸 커피" 2유로를 지불하고, 공짜로 화장실도 썼다. 오르비에토 성벽에서 바라보는 전망은 감동까지는 아니었지만, 충분히 좋았다. 비가 안 왔거나, 비에 대한 충분한 대비만 되었었다면 (여행 온다고 회사 사람들이 챙겨준 귀여운 우산을 차에 두고 내렸다 ㅠ.ㅠ) 아기자기한 접시를 파는 가게가 많던 골목길 나들이가 참 좋았을 것 같아서 약간 아쉽기는 했지만, 이 정도면 머 나쁘지 않았다.
현실감 없는 치비타디반뇨레조와 오르비에토 대성당 정면
오르비에토 성곽과 드라이브중 흔히 보이는 풍경
숙소는 몬테풀치아노 외곽으로 잡았다. 몇몇 유명한 숙소를 도전했었는데, 부활절이라고 갑자기 cancel 이 되기도 하고 우여곡절을 겪다가, 이 곳으로 잡았다.
오르비에토에서 몬테풀치아노까지는 내 친구가 노래를 부르던 A1 고속도로를 이용하게 되었다. 이태리의 고속도로 운전은 "아무리 1차선이 비어 있어도 자신 없으면 1차선으로 오지 마라" 정도로 요약이 되겠다. 1차선은 정말 쌩쌩 달린다. 내 앞에 차가 좀 느린것 같아서 함부로 1차선으로 갔다가는 굉장한 압박감을 느낄 수 있고 민폐가 된다. 생각해 보면, 차선바꾸며 곡예 운전할 일이 없으니 이 시스템이 더 합리적인 것 같기도 하다. 고속도로 사고발생율은 어떻게 되려나 궁금했지만, 찾아보기 귀찮아서 궁금해하지 않기로 했다.
부활절이라서 고속도로에서 통행료 받아주는 사람이 없었다. 사람손 그림이 있는 톨게이트가 빨간불이었다. Self 로 계산해야 하는데 이 기계가 동전만 받았다. 남은 동전이 3.5 유로였는데, 통행료가 3.2 유로라서 정말 아슬아슬하게 성공했다. 자칫하면 동전이 없어서 차에서 내려서 뒷차로 가서 동전좀 바꿔달라며 울 뻔했다. 친구는 처음에 출발할 때는 동전이 아예 없었는데, 이 때 구글이 A1 고속도로로 안내했으면 큰일날 뻔 했다며 6시간 동안 멈추지 않던 구글 지도에 대한 의심과 원성을 거두었다.
숙소가 있는 여기는 완전히 깡촌이다. 주변에 아무것도 없고 달랑 이 건물 하나 있다. 조식은 주지 않지만, 합리적인 가격에 친구와 각방을 쓸 수 있고, 집이 넓고 시설이 좋고, 웰컴 드링크가 레드와인 한병이고, 친절을 완성한 훌륭한 젊은이가 넘치는 배려로 안내해준다. 원래는 마트에서 장을 봐 와서 남부럽지 않은 조식을 완성할 계획이었으나, 까르푸가 문을 닫는 바람에 월요일까지는 어떻게든 버텨야 할 것 같다.
저녁은 이 숙소와 붙어 있는 레스토랑에서 먹었다. 그래도 제법 유명한 레스토랑인지 저녁 시간이 되자 여러팀이 몰려왔고, 몇달 전 미리 예약 안 하면 자리 없다는 친절한 안내 덕에 미리 예약을 해서 오붓한 저녁 식사를 즐길 수 있었다. 이 지방에서 유명하다는 피치(pici) 파스타는 삿포로 지방의 탱탱한 우동면 같은 특징을 가진 아이였다. "맛있을 것 같진 않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맛은 봐야 하는 과정" 을 무사히 마쳤다.
밥을 먹고 나니 졸음이 밀려들어와서 또다시 침대에 머리를 대자마자 잠드는 경험을 하고,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여행기를 쓰기 시작했다. 지금시간 새벽 6시 40분. 친구가 일어났는지 밖에서 부산한 소리들이 들린다.
오늘은 쉬엄쉬엄 보내기로 한날. 이태리까지 와서, 한적한 하루라니, 왠지 너무 사치스러워서, 이런 사치가 가능하도록 열심히 살아온 내 인생에 문득 감사한 마음이 든다. 그럼 또 하루를 시작해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