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깅이 Apr 11. 2023

3일차 - 몬테풀치아노

여행이 무서운 아이의 이태리 여행기 (4)

새벽에 일어나서, 브런치에 올릴 글을 쓰고 있는데 밖에서 부스럭대는 소리가 오래 들렸다. 분명히 미국 시차상 이제부터 숙면이 가능한 시간일텐데 왜 저러나 싶었는데, 친구가 커피에 진심인 국가의 모카포트 사용법을 배우는 소리였다. 한참 후에, 상기된 얼굴 (커피 제조 방법을 알아낸 뿌듯함이 가득한 얼굴) 로, 아이스 아메리카노 샘플과, 라떼 샘플을 들고 와서 먹어보라는 친구 덕에 호사스러운 아침을 맞이했다.


오늘은 쉬엄쉬엄 동네 산책이나 하며 보내기로 한 날. 숙소가 있는 동네가 몬테풀치아노 외곽이라서 몬테풀치아노를 다녀오자 정도의 생각을 했더랬다.


나는 습관적으로 날씨를 잘 보지 않는다. 그냥 그게 버릇인것 같다. 극도의 계획형 성격이면서 딱 하나 받아들인 게 랜덤인 날씨인 듯 하다. (어렸을 때 "기상청 체육대회 때 비왔대" 라는 농담이 너무 진실처럼 받아져서 예보에 대한 신뢰가 없어진게 계기일지도 모른다고 진지하게 생각한다.) 비가 오면, "날씨를 미리 확인할 걸" 이라고 하기 보다 "아 비가 오는구나" 라고 생각 하는 편이다.


반면, 친구는 여행 전부터 날씨 확인을 열심히 했다. (날씨 확인이 약간 즐거운듯도 보였다.) 그러더니, "오늘이 여행 중 가장 날씨가 좋은 날이 될거다. 앞으로 이정도의 날씨는 다시는 없다." 라고 했다.


커피를 마시고 친구와 동네 산책길에 나섰다. 이리로 가면 성당 같은 게 나온다며, 산책 치고는 너무 오르막이 아닌가 싶은 길로 데리고 갔다. 아 그러고 보니 날씨가 아주 좋댔지? 로션도 안 바르고 쫄랑쫄랑 따라나선 나는, 상식 부족으로 마이애미 3개월 출장 동안 선크림 없이 하늘을 마주하다 망했던 시간들이 떠오르며, 이태리 여행 최고의 날씨, 최고의 햇살을 아무 방어막없이 받아들였다. 걸어가던 길에 오밀조밀한 중세도시가 보였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거기가 몬테풀치아노였는데, 알고 있는게 어제 간 오르비에토밖에 없다 보니, "아 저기가 어제 간 성당이고, 저기가 어제 본 종탑이고" 하면서 대화를 나눴다.


아침 산책길


오늘은 온 상점이 문을 닫는다는 부활절 다음날. 한국에서 싸 간 전복죽에, 김치랑 김을 주섬주섬 꺼내서 나름 속편하고 맛있는 조식을 완성했다. 한국에서 작은 참기름 병도 하나 사서 갔었는데, 전복죽에 참기름도 딸려 있어서 엄청 섭섭했다.


느릿느릿 움직여서 오후쯤 몬테풀치아노로 가기 시작했다. 나중에 돌아오면서 알게 됐는데 원래는 6분이면 오는 단순한 경로인데, 초반에 길을 잘못 들어서 20분 정도 긴 거리를 드라이브 했었다. 혹시 수퍼가 열었을까봐 기웃거리다가 길을 좀 잘못 들어서 후방 카메라가 없는 차에서 삑삑 경고음을 들으며, 길거리에서 유턴을 하는 친구의 운전을 (숨 안 쉬고 살짝 겁내면서) 몇차례 지켜보았다.


약간의 우여곡절이 있긴 했지만 목적한 P8 주차장에 무사히 도착. 넓다길래 선택한 주차장인데, 기대하지 않게 무료였고, 몬테풀치아노 간 김에 다녀오면 좋다는 글들을 봤던 산 비아지오 성당이 바로 눈앞에 보이는 위치라 그것도 좋았다.


중세도시들은 광장이 가장 높은 곳에 있다보니, 주차장에서 광장까지는 무조건 오르막이다. 보통은 잘 못 보던 풍경에 아기자기한 가게들 보면서 전혀 힘들지 않게 올라갈 수 있는데, 여기 주차장부터 광장은 약간 등산에 가까워서 강아지마냥 헥헥 거리며 입구에 도착했다. (평소 달리기를 좋아하는 내친구는 전~~~혀 숨이 가쁘지 않았다.)


쨍한 날씨 때문인지, 아기자기한 가게들 구경보다는 예쁜 풍경이 더 좋기 때문인지, 우리에게는 여기가 최고였다. 광장에서 보이는 독특한 외관의 성당과 시청 (시청의 돌이 상대적으로 세월의 깊이는 덜 느껴지는 게 아쉽기는 했으나), 묘한 표정의 사자 조각이 있는 우물까지, 광장 자체가 앉아만 있기도 좋았고, 골목마다 들어서면 만나는 성벽 끝의 풍경은, 올리브와 와인의 도시 답게 넓은 평원에 푸릇한 색깔이 감탄을 자아냈다. 거기에 오늘은 "여행 중 가장 좋은 날씨" 라니, 햇빛이 더하는 아름다움도 무시할 수 없었다.


전날의 경험이 섞여서 인지, 이제는 안으로 입장하는 것에 큰 호기심이 없어졌다. "시청 전망대에 2.5 유로 내면 테라스까지, 5유로 내면 꼭대기 까지, 돈 내고 운동할 수 있다는데 갈래?" 라는 질문에 "아니" 라고 단호하게 대답하는 친구를 와락 안아주고 싶었다.


눈만 돌리면 보이는 풍경들


천천히 광장을 중심으로 여기저기 구경하다가, 주차장아래로 바로 보였던 San Biagio 성당으로 향했다. 길은 엄청나게 가파른 내리막이었다. "아 여기 어떻게 다시 올라오지?" 라는 생각에 눈물이 날 때쯤 사이프러스 나무들과 파란 하늘, 그리고 지금이 왜 12시가 아니고 오후 1시 30분인지 섭섭할 정도로 예쁜 교회 종소리가 울렸다. 이 성당은 뷰맛집이었고, 성당 주변으로 잔디밭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동네 사람들은 이미 이 곳을 잘 알고 있는 듯, 돗자리들을 챙겨와서, 샌드위치를 먹으며 소풍을 즐겼고, 뭣 모르는 관광객들은 돗자리 핀 동네 사람들을 부러워하며 여기저기 담벼락에 앉아서 멋진 풍경을 감상했다.


여기까지 온 김에 성당내부도 감상했다. 높은 천장, 내부 돔 모양은 굉장히 신기하고 좋았지만, 그림이나 조각은 뭔가 설명이 없으면 감상하기가 어려운 것 같다. 그림 그린 사람은 이런저런 걸 생각하며 묘사를 한 것 같은데, 나는 잘 모르겠다. 아주 어렸을 때, 미술 교과서에서, 짝궁이 그린 그림보다 뭐가 더 좋은 건지 잘 모르겠는데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인 피카소가 그린 그림이라는 걸 배우면서, 이 세계는 내가 알기가 어렵겠구나 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있다. 엄청 큰 미술관에 가서 엄청 많은 그림을 보면, 좋기는 한데, 이건 왜 유명하고, 저건 왜 그렇게까지 유명하지 않은지 도통 잘 모르겠다. 답답한 마음에 구글렌즈 앱으로 이태리어로 설명된 판넬을 번역해서 읽어봤는데, 아예 말이 안 되는 번역이라 서둘러 앱을 닫아버리고, 그냥 이 정도 입장료는 좋은 경치값이라고 생각하고 흔쾌히 밖으로 나왔다.


좋은 날씨 아래 잘생긴 성당


너무 좋은 날씨, 너무 좋은 경치, 너무 예쁜 성당 외관, 좋은 건 다 끝나고, 이제 유일하게 남은 건, 내게는 아마도 너무 가파르고 긴 주차장까지의 길밖에 없었다. 무서워한 것 보다는 그래도 한방에 무사히 잘 끝냈다. 속으로 걸음수를 세면서 500걸음 걸으면 쉬어야지 했는데 490걸음쯤 되니까 도착했다.


베게에 수면제가 발려 있고 그 수면제가 뒤통수로 전달되는 듯 눕자마자 숙면이긴 했지만, 4시간 정도 자면 벌떡 잠에서 깨어버렸었으니, 전체적으로 수면 부족이었다. 미국 시차를 이겨야 하는 내 친구는 나보다도 훨씬 더 수면이 부족했을 테고. 돌아오자마자 꿀맛같은 낮잠을 자고, 저녁식사를 만들었다. 김치찌개 1인분을 끓이면서, 실수로 고추가루는 5인분을 넣어서, 5배 더 매웠(지만 어쨌든 맛은 있었)던 김치찌개와, 호텔에서 챙겨온 버터에 볶은 김치볶음밥으로 야무지게 한끼를 무사히 마쳤다. 그리고 먹자마자 다시 잘 잤다.


밖에서 커피 끓이는 소리가 들린다. 이제 슬슬 글을 마무리해 볼까나...






매거진의 이전글 2일차 - 치비타디반뇨레조, 오르비에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