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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민령 Jul 02. 2016

과학 용어의 번역과 지식의 재생산

인공지능 번역 활성화를 위한 학술용어 변역 

얼마전 deep learning 을 심화 학습보다는 심층 학습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좋겠다는 피드백을 받았다. 듣고보니 정말 그랬다. 심층학습은 여러 층의 신경망을 활용한 학습이므로 심화 학습보다는 더 정확하다.


이미 심화학습이라는 표현이 더 널리 쓰이고 있어서 혼란을 주지 않을까 우려했더니 함께 공부하는 박사님이 통쾌한 해결안을 주셨다. 어차피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서 모든 언중의 용례를 통일할 수는 없고, 그럴 거면 보다 나은 표현이 더 널리 쓰이는 게 좋으므로 그냥 이제부터라도 심층 학습을 쓰라는 것. 그래서 이후의 모든 글에서는 심화 학습 대신 심층 학습이라는 표현을 쓸 예정이다.[*각주]


과학을 한글로 쓰려다보니 이같은 용어 번역 문제에 부딪힐 때가 많다. 예컨대, "mechanism"이라고 써야할지, 영어 단어의 발음인 "메커니즘"이라고 써야 할지, 한글로 번역해서 "기작"이라고 써야 할지 골치가 아픈 것이다.


(1) 영어로 쓰면 영어가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어렵고, (2) 그렇다고 영어 발음을 쓰면, 해당 단어를 독자가 검색하기가 어렵다. 단어의 철자를 알 수 없는데다, 영어 발음의 표기법이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3) 그렇다고 "기작"이라고 해버리면 "기작"자체도 흔치않은 표현이라 오히려 어려워지는 경우가 생긴다. "기작"은 그나마 나은 경우다. 학문 분야의 발전 속도가 워낙 빠르다 보니 적절한 한글 표현이 없는 경우가 정말 많다.


결국 내가 생각한 궁여지책은 "기작(mechanism; 메커니즘)"처럼 이 세가지 모두를 표현하는 방식이다. 모든 외래어를 이렇게 썼다가는 읽기에 불편하므로 가능하면 이렇게 쓰려고 노력한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싶을 수도 있는데, 나는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외래어 사용의 문제 

우리 모두는 실제나 객관이 아닌 표상의 세계를 살아간다 (링크). 삶의 경험을 내면화하여 표상을 만들고, 언어를 사용하여 그 표상들을 제련하고 다른 이들과 표상을 공유하며 살아간다.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 표상의 세계고, 표상을 다루는 도구가 언어이기에 언어는 아주아주 중요하다. 인간이 만든 모든 발명품 중에, 언어만큼 많은 사람이(한 나라를 살다간 사람들의 수) 오랫동안(수천년) 함께 빚어낸 발명품은 없다.


하나의 단어는 역사가 빚어낸 문화적 맥락과 그 맥락을 살아가는 개인의 경험을 통해 다른 무수한 단어와 연결되는데 외래어에는 그런 것이 없다. 그래서 번역되지 않은 외래어는 그 외래어의 의미만 전달할 뿐, 그 외래어와 연결된 다른 외래어들의 풍성한 의미 체계를 담아내지 못한다. 도우미와 나들목이 전하는 풍성함이 헬퍼(helper)나 인터체인지(IC)가 주는 느낌과 다른 것은 그 때문이다.


그래서 외래어를 사용하면 모국어가 보유한 역사적/경험적 자원을 활용하기가 어려워진다. "리더"는 그냥 지도자, 우두머리다. 이걸 "리더" 라는 외래어로 부르면, 대다수 사람들이 잘 알지도 못하는 "리더" 에 대한 외래의 논의가 많은 사람들에게 경험적으로 숙하고 한국 상황에 더 적합한 "대장, 지도자, 우두머리"에 대한 그간의 경험과 지식을 대체하게 된다. 많은 이들이 "리더"의 부재를 논할 때, 기록까지 잘 보존된 우리의 수천년치 역사나 개인의 경험을 들춰본 이는 몇이나 될까. 이래서야 논의가 추상적이고 모호해질 밖에.


또한 습득이 어렵다. 학습이란 새로운 것을 기존에 알고 있는 것에 연결하는 작업이고, 각각의 단어는 역사적/개인적 경험을 통해 다른 무수한 단어들과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하나의 단어를 다른 단어에 연관짓는 과정 (eg.신경 + 세포 -> 신경 세포)은 두 단어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연결망들을 포섭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외래어를 똑 따오면 해당 단어의 의미는 알 수 있지만, 그 외래어와 연결된 외래어들의 체계까지 알기는 어렵다. 이래서야 새로운 정보가 기존 세계관에 포섭되지 못하고 (지식 되지 못하고) 낱개로 동동 떠다니게 된다.


그리고 소통이 어려워진다. 외래어는 다른 세대, 다른 분야의 사람들을 소외시킨다. 당장 신문을 펼쳐봐도, MOU 등 내 전공이 아닌 분야의 외래어는 낯설다. 사전을 찾아서 의미를 파악한들, 그 단어의 풍성한 의미 체계까지 단번에 습득할 수는 없기에 '이게 뭔 소리야' 하며 읽게 된다. 민주주의에서 중요한 요소인 소통은 당연히 어려워진다. 요즘 중요시되는 융합은 물론, 기술의 수용과 발전도 지체된다.


외래어 번역의 효과 

외래어의 번역은 중요하고, 그래서 쉽지 않다. <위키백과사전> 등 널리 쓰이는 하나의 플랫폼에 각 분야의 학자들이 번역 용어를 올리고, 국어원이나 번역원 등에서 이를 통합해주는 정도라도 하면 좋을텐데 그런 체계적인 노력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듯 하다.


그나마 번역 작업을 잘하는 것은 한국물리학회라고 한다. attractor 는 끌개, coherence는 결맞음, random walk는 "마구 걷기"라고 번역한다는데 이중에서 random walk가 내 시선을 끌었다.


나는 Markov Process에 대한 영어 원서에서 random walk라는 표현을 처음 접했는데, 영어를 못하는 나한테는 random walk가 피카이아 (멸종된 캄브리아기의 동물 이름; 척추동물의 조상이란다) 급으로 낯설었다. 그래서 수학에서 증명이나 정의를 할 때 "put x > 0" 로 x 를 정의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으로 "random walk"를 대했었다. 요컨대 나에게 "random walk"는 수학의 x나 마찬가지인 기호였다.


이제 한글 교과서를 상상해보자. 나는 x 나 피카이아 급으로 느껴지는 기호인 "random walk" 대신 "마구 걷기"라는 표현을 교과서에서 보게 될 것이다. 두가지 효과가 예상된다. (1) 우선 보자마자 풉~ 했을 것이다. 수학 전공서적에서 "마구 걷기"라니 좀 웃기잖나.  

(2) 그리곤 나의 "마구"와 "걷기"에 대한 경험/지식과 연관짓기 시작할 것이다. 반대로 내가 걷는 도중에 "마구 걷기"를 떠올리는 경우도 늘어날 것이다. 이런 연관이 좋기만 한 것은 아니다. "걷기"에 대한 기존의 지식과 Markov Process에서 마구 "걷기"가 뜻하는 의미의 차이 때문에 혼란도 겪을 것이다. 이는 random walk를 x라는 기호로 대할 때는 겪지 않는 혼란이다. 그러다 보면 내가 "심화 학습"대신 "심층 학습"이란 표현을 쓰기로 결정했듯이 용어를 바꾸는 사례도 생겨날 게다.


그렇게 (1) 기존의 지식체계, 경험체계, 세계관에 포섭되고, (2) 용어가 정립되는 혼란을 겪으며 생겨난 "결과물"이 내가 공부한 Markov Process 원서였다. 원서나 외래어만 볼 때는 상상조차 못했던 "지식이 생겨나는 과정"이다.


우리에게 과학은 아직 수입된 학문이다. 이 수입된 학문이 온전히 우리 토양에서 흡수되어, 싹을 틔우려면, 과학의 결과물만 따올 게 아니라 저렇게 좌충우돌하며 지식을 흡수하고 생산하는 과정이 필요할 것 같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번역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누군가가 만들어서 가져다 준 지식을 이해하려고만 하는 대신 "이 지식이 어떻게 생겨났는가"를 생각하다 보면 여러가지가 다르게 보이게 시작한다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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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2023년 2월 4일에 덧붙임)
'심층학습'을 몇 번인가 시도했으나 결국 포기했다. '심화학습'이라는 단어가 너무 빨리 너무 널리 퍼져서, 필자가 '심층학습'이라는 표현을 고집하면 독자를 혼란시킬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눈길을 처음 걷는 사람은 내딛는 발걸음을 조심해야 한다'는 말이 있다. 그의 발자취를 보고 뒷사람이 따라가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니 자신이 외국어의 번역어를 국내에 처음 들여오는 사람이라고 여겨질 때는, 다음 사람들을 위해 조금 더 정성을 기울이기로 하자. 언젠가는 인공지능이 우리를 위해 더 많은 일을 해줄테니, 그 때까지만이라도 정성을 들이자. 지금 우리의 번역이 인공지능의 학습자료로도 쓰일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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