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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민령 May 03. 2016

제지술 전파의 역사와 금속활자

같은 시공간, 다른 세계


중국에서 105년에 발명된 제지술을 전세계에서 가장 먼저 받아들인 나라는 한국이라고 한다. 제지술은 2-4세기 경에 한국에 도입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프랑스, 독일, 영국, 네덜란드 등에 비해 천년 이상 빠른 것이다. 기록 문화가 발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더욱이 역사와 학문을 중시하는 유교 문화가 아닌가. 같은 유교 문화권이라도 중국은 한족과 이민족이 번갈아 왕조를 수립하며 분서갱유에 문화혁명같은 과격한 정책을 거쳤고, 일본은 무사계급이 천년 가까이 지배했으니 우리나라에서 상대적으로 많은 기록이 생산되고 보존되었을 것이다. "기록의 민족"이라고 할 때 연상되는 것처럼 우리에게 유별난 기록 DNA가 있는 게 아니라 우리 조상들은 당연히 그럴만한 맥락 위에 있었다.   

출처/ www.kculture.or.kr

우리나라의 금속활자가 서양보다 200년이나 빠른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다만, 제지술의 도입 시기와 금속활자의 발명 시기간의 간극이 우리나라에서 더 큰 것은, 서양의 표음문자와 달리 표의문자인 한자에는 활판 인쇄술이 덜 유용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나라는 금속활자를 세계 최초로 발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지배계급의 통제로 인하여 이 기술이 대중에게 널리 유익하게 쓰이지 못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금속활자 발명이 자랑스럽다기 보다는 부끄러운 일이라고 비난조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제지술의 도입 시기와 상황을 고려하면 이 역시 딱히 자랑할 일도 아니고, 비난할 일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인쇄물의 파급이 가진 영향력에 대해 지배계급이 알아야 통제를 할지 말지, 한다면 어떻게 할지 감이 잡힐 텐데 유럽에서는 왕과 귀족 중에도 문맹자가 더러 있었다. 더군다나 양피지보다 만들기 쉽고 값싼 종이란 건 바로 얼마 전까지 알지도 못했다. 종이에 관한 한 1000년의 잔뼈가 굵은 우리나라의 지배층과는 사정이 달랐던 것이다. 교회에서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이며 이단 서적들을 불태운 것을 보면, 유럽의 지배층이 지식의 통제를 덜 했다기 보다 통제력이 이미 약해진 데다가 (봉건제도가 붕괴되기 시작하던 무렵) 통제할 줄도 몰랐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고려 금속활자와 쿠텐베르크 활자의 영향력이 달라지게 된 더 중요한 이유는 제지술의 도입 시기에 있는 듯 하다. 우리에게 종이는 봉건제도가 철저하던 고대부터 계속 존재해왔 지배층이 주로 사용해온 도구였다. 한자가 어려운데다 제지술은 적잖은 노동을 필요로 하므로 일반인들이 종이를 쉽게 쓰기엔 무리가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진 종이의 역할, 종이의 주된 사용자, 종이의 사회문화적 이미지에 대한 관념에는 지배적인 것이 포함되어 있었을 수 있다. 그저 특정 가시광선 파장일 뿐임에도 염색이 어렵다는 이유로 황제만 입는 색이 된 보라색이 높은 신분과 고귀함이라는 역할, 사용자, 사회문화적 이미지를 획득한 것처럼.   


반면에 유럽에서는 하필이면 르네상스 직전에 제지술이 도입되었다. 십자군 전쟁과 흑사병의 영향으로 봉건제도가 뿌리부터 흔들리고, 새로운 기술과 예술, 사상이 일렁이며, 시민혁명과 과학학명, 대항해시대와 종교개혁의 텃밭이 일구어지던 시기. 그러니 제지술이 도입되고 채 100년도 안되어 뚝딱뚝딱 활판인쇄 기술이 생겨나고, 그로부터 채 200년도 안되어 잡지와 신문이 출간되었다. 지식과 사상이 적극적으로 생산/확산되던 시기에 제지술을 받아들인 유럽에서 종이의 역할과 주된 사용자 및 사회문화적 이미지는 봉건시대부터 종이를 사용해온 우리나라의 고착된 그것과 다를 수밖에 없었다.

  

종이의 도입시기와 역할, 사용자, 이미지간의 연관성이 다소 무리해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식과는 별 상관이 없을 것 같은 코코아와 커피를 비교해보면 이 연관성은 분명해진다. 스페인에서 코코아는 커피보다 먼저 도입되었는데 재미있게도 젊은이들과 진보적 인물들은 커피를, 종교인과 기득권을 비롯한 보수적 인물들은 코코아를 마셨다고 한다. 그리고 커피를 마시는 카페는 신 지식인들이 정보를 주고받고 토론을 하는 공론장으로 기능하게 되었다. 어디 커피와 코코아 뿐이랴, 와인 뚜껑도 그렇다. 밀폐 능력은 알루미늄 뚜껑이 더 우수하다고 알려져 있지만 코르크 마개가 더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풍긴다. 그래서 싸고 대중적인 와인은 알루미늄 뚜껑을 쓰기도 하지만 고급 와인은 그렇지 않다. 아니, 그럴 수 없다!  

출처/ pixabay.com

만일 제지기술이 카노사의 굴욕 이전에 유럽에 도입되었다면, 유럽에서 인쇄술의 기능과 영향력은 아마 우리나라에서와 비슷했을 공산이 크다. 우리나라가 딱히 잘나서 금속활자를 먼저 발명한 것도 아니고, 우리나라가 딱히 더 못나서 활판 인쇄술을 널리 활용하지 못한 게 아니었던 것이다.   


이를 놓고 보면, 어떤 사회가 잘나거나 못났다는 평가는 맥락을 고려하지 않았을 때만 가능한 듯 하다. 사실, 평가 기준 자체도 공정/보편/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평가자가 처해있는 맥락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어떤 사회가 잘나거나 못났다는 평가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은 평가의 내용보다는 평가자의 세계관이 아닐까...


금속활자를 최초로 발명했다하여 자랑스러워하는 사람들은 우리 나라 전체에 애국심에 대한 필요가 절실할 때 살았던 사람들, 혹은 그 교육의 영향을 많이 받은 사람들. 금속활자의 영향력을 운운하며 비판하는 이들은 이 시기의 영향에서 벗어나 과도한 애국심에 대한 반성이 시작된 시기의 사람들, 및 그 영향을 크게 받은 사람들. 그리고 자랑스러울 것도, 비판할 것도 없다고 하는 나는 그보다 나중의 시대를 산 덕분에 이런 생각을 할 수 있게 된 사람…


그래서 모두, 같은 시공간에 있으면서도 다른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  세상에 대한 시뮬레이션에서 사람마다 다른 변수, 사람마다 다른 가중치... 같은 공간, 다른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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