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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레오 Mar 23. 2020

02 ‘가리망상(?)’하게 쓰지 마라

사장의 첫 번째 글쓰기 가르침

주말 아침에 떨어진 폭탄


그룹에 소속된 회사는 회장 비서실이나 지주회사에서 갑작스러운 자료 요청을 받는 일이 허다하다. 기한이 넉넉하거나 이미 만들어놓은 자료가 있다면 크게 부담되지는 않지만 문제는 주말에 갑작스럽게 자료가 필요하다는 연락이 올 때다. 일정은 항상 타이트하다. 대부분 아랑곳하지 않고 오늘이나 내일까지 보내달라고 한다. 보고 대상이 회장이라면 더욱더 낭패다. 회장에게 나가는 보고서는 사장부터 엄청난 신경을 쓰기 때문이다.


2019년 7월 어느 주말 아침, 회사로 불려 나왔다. 그룹에서 긴급하게 자료 작성을 요청했다고 한다. 당시 일본은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제조에 필요한 핵심 소재의 한국 수출을 금지하였다. 계열사 사장단이 모여 각 회사의 예상 피해를 보고하고 대응 방안을 논의하는 긴급회의가 소집되었다고 한다. 심지어 기한은 오늘까지다. 기가 찼지만 안 할 수 없는 노릇이다.


사업과 공장 부서 담당자들에게 연락을 돌려 필요한 정보를 얻어냈다. 일본 수출 규제에 따른 사업 영향과 대응 방안을 6쪽 정도 꾸역꾸역 완성했다. 일시적인 영향은 있겠지만 직접적인 관련이 없어 피해가 크게 없다는 톤으로 보고서를 작성했다. 밤을 새우고 다음날 아침 간단히 검토 회의를 했다. 약간 수정을 한 다음 사장은 자료를 들고 보고를 하기 위해 출발했다. 휴, 드디어 끝났다. 해방감이 밀려왔다.

@ Unsplash




사장의 불콰한 얼굴


보고를 마치고 돌아온 사장은 보고서 작성에 참여한 임원, 팀장과 실무자를 호출했다. 이 날따라 분위기가 싸했다. 후속 조치가 필요한 건가? 아니면 새로운 숙제가 떨어졌을까? 조마조마해하며 사장 방으로 들어갔다. 표정을 살피려 힐끔 쳐다봤는데 사장 얼굴은 불콰했다.


우리가 앉아마자 사장은 작정하듯 말을 쏟아 냈다. 우리 얼굴과 보고서를 번갈아 보면서 불만을 토로할 때는 언성이 다소 높아지기까지 했다. 다른 회사들과 비교하여 보고서 수준이 마음에 들지 않았나 보다. 같이 들어간 임원, 팀장과 함께 나는 두 시간이나 꾸중을 들어야 했다. 우리는 숨죽인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사장은 우리 보고서가 어떤 문제가 있었고 다른 관계사는 어떻게 보고서를 만들어왔는지를 조목조목 설명해주었다. 다른 회사들은 실제 해결해나가야 할 문제들을 깊게 분석을 해왔고 당장 실행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한 곳도 있었다고 한다. 그에 비해 우리 수준은 너무 원론적이고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많았다고 한숨을 쉬어가며 말했다. 자세한 현장 분위기를 설명하며 한참을 야단을 들어야 핬다. 그러고 나서 주제는 자연스럽게 보고서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로 넘어갔다. 뜻 밖에 사장 직강(?)을 듣게 된 것이다.

@ Unsplash


가리망상한 표현


‘이 부분은 너무 가리망상해.’ 보고서를 가리키며 사장은  말했다. 응? 가리망상 무슨 말이지, 일본어인가? 한자표현인가? 아니면 사투리인가? 순간 혼동스러웠다. 뜻은 잘 모르겠지만 단어가 주는 소리를 들으면 대충 의미를 알 듯했다. 알쏭달쏭하고 불명확하다는 뜻으로 들렸다.

(나중에 인터넷에 가리망상이라고 쳐봤다. 관련된 결과가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사장이 지적한 부분에는 이런 식으로 적혀있었다.



[예시]

수출 제한으로 고객사 영향 있으나 당사 피해는 제한적



고객인 TV나 디스플레이를 만드는 회사는 원료 조달이 어려워 큰 피해를 입는 반면, 우리 같은 소재 회사는 직접적으로 연관된 제품은 없지만 고객사 여건이 안 좋아지므로 제한적인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취지의 글이었다. 최대한 간결하게 작성하려고 했는데 그러다 보니 의미가 다소 모호해 보였다.


사장은 왜 이 표현이 ‘가리망상’한 지 가르치기 시작했다. 먼저 ‘고객사 영향 있으나’ 부분을 지적하며 물었다. ‘고객이 누군데?’,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제조 업체입니다.’ ‘영향은 무슨 영향?’, ‘원재료를 공급받지 못하니 지금 가지고 있는 재고가 소진되면 생산에 차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지금 가지고 있는 재고로 얼마나 버틸 수 있는 건데?’. ‘시장에서는 대략 3개월 정도 보고 있습니다.’ 사장은 이야기를 들으며 자리 앞에 놓인 종이에 적기 시작했다.


다음으로 ‘당사 피해는 제한적’을 이야기했다. 사장은 시점을 구분해서 물었다. 단기는 기간이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인지, 시간이 지나 상황이 심각해지면 피해규모가 얼마나 커지는 건지, 회사가 취해야 할 방안은 무엇이며 조치를 취하면 어느 정도 만회가 가능한지를 따져 물었다. 더 나아가 그룹 차원에서 공동으로 대응할 수 있는 건 무엇이 있는지 아이디어를 달라고 덧붙였다.


대답을 들은 사장은 자신이 적은 메모를 우리에게 돌려줬다. 거기엔 이런 식으로 쓰여 있었다.



[예시]

고객사(반도체/디스플레이) 생산 차질 심화
 - 대체 공급처 확보 어려움(현재 3개월분 재고 확보)

당사 단기 피해 없으나 규제 지속 시 판매 감소 불가피
 - 판매수량 10% 이상 감소/월(20~25억 영업손실)

그룹사 공동대응 통한 소재 개발 적극 추진 및
미국/유럽 등 신규 고객 확보 통한 사업 체질 개선 추구



사장은 보다 내용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이래야 보고를 받는 사람이 명료하게 상황을 이해하고 정리할 수 있으니 보고서 작성할 때 주의하라고 했다. 우리에게 자신이 쓴 글을 한번 읽어보라고 한 뒤 사장은 말을 이어갔다.


“보고를 받는 사람이 보고서만 보고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질문이 나오는 순간, 보고서는 가치를 잃는다. 질문이 받았을 대답을 못하는 순간, 보고 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걸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다. 즉, 사장으로서 자격이 있는지 심각하게 의심받는 것이다. 당신들이 이렇게 보고서를 쓴 것은 두 가지 이유다. 게을렀거나 아니면 나를 엿먹이기 위해서다.”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 Unsplash


2-Layer(2겹) 사고


사장은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고급진 충고를 건넸다. 2-layer사고에서 벗어나라고 했다. 보고서의 깊이가 2층 정도밖에 안된다고 했다. 수박 겉 핥기식 내용만 잔뜩 늘어놓고 더 깊게 파고들면 아는 게 부족하여 밑천이 금세 드러난다는 것이다. 사장의 보고서를 쓸 때, 한 단어, 한 문장을 쓰더라도 전후좌우 현황과 정보를 샅샅이 살펴야 한다. 한, 두 단계 더 깊게 내려가 상황을 분석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내용이 공허해진다. 보고서는 하얀 종이에 내용을 채우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보고를 받는 상대에게 정보를 전달하는 매개체여야 한다.


좋은 보고서는 독특하다. 독특하다는 건 다른 것과 구분되는 고유한 특징이 있다는 이야기다. 고유한 특징, 즉 차별화는 구체적이고 명료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에서 온다. 너무 일반적이어서 정작 아무런 정보가 들어가 있지 않거나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은 ‘가리망상’할 뿐이다. 보고서는 진짜 우리의 이야기로 채워져야 한다. 두 시간 넘게 사장 방에서 꾸지람을 들으며 배운 사장의 첫 번째 가르침이었다. 누군가 ‘가리망상’의 뜻이 뭐냐고 물으면 이렇게 대답해줄 수 있을 것 같다. 세상 사람 다 아는 모호하거나 평범한 보고서는 ‘가리망상’할 뿐이라고. ‘가리망상’의 반대말은 구체적이고 명확한 메시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라고.

(가리망상은 표준어는 아니고 특정 회사에서만 사용되는 괴상한 용어임)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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