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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혜미 Jan 11. 2021

#1 나는 글로벌 시민이 되기로 했다

우물 안의 개구리가 싫다면?

#1 나는 글로벌 시민이 되기로 결정했다

원조 기러기 엄마로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지금은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뉴질랜드에 살고 있는 딸아이, 그애가 막 중학생이 되어 1년을 보낸 1997년 말이었다.  4년간을 준비하였던 교육이민을 뉴질랜드로 떠났다.  인터넷 사정도 안 좋았던 그 시절 그러나  다가올 21세기의 정보사회의 새 물결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좀 더 넓은 세계로 나가서 새로운 것을 배우며 미래를 준비하고 싶었다. 대기업에 다니는 남편이 간간히 해외출장을 다니면서 들려주는  경험담은 새로운 문화충격이었다. 그 시절에는  해외에 나가기가  지금처럼 쉽지 않았었다. 고작해야 외국영화나 잡지 또는 책에 의존하여 조금씩 외국에 대한 정보를 갖는 것 이외에 직접 경험할 수 있는  통로는 지극히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경제적 여유가 있다면 유학을 택할 수 있었겠지만, 요즘처럼 누구나 쉽게 외국의 문턱을 드나들 수 있는 시절이 아니었기에 이민을 가야겠다고 결심을 하는 것 자체가 사회적 분위기상 쉽지 않은 일이었다. 


독서를 유난히 좋아하고 자신의 주관이 뚜렷한 딸아이에게 한국의 교육제도와 주입식 교육방식은 그다지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단 문화와 획일성에 대한 거부감이 심했던 나 자신도 한국에서 보낸 청소년 시절은 물론 직장생활과 결혼생활의 불합리성에 대한 갈등이 항상 있어왔기에 선진화된 새로운 나라에 가서 그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오감을 통해서 직접 경험하고 싶었다.   다가올 21세기를 준비하기 위해 다양하고 풍부한 경험이 필수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이민에 대한 꿈을 키워가기 시작했다. 다행히 남편이 나를 이해해 주면서 자신이 이민의 주신 청자가 되어 뉴질랜드 이민을 준비하게 되었다. 


그러나 회사에서 중요한 프로젝트를 맡게 된 남편은 선뜻 가족과 함께 이민을 떠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는  "몇 년 뒤에 상황을 봐서 갈 테니 당신이 딸아이랑 먼저 가고 싶다면 떠나라며" 우리를 먼저 보내주었다. 장남으로 시부모님을 모시고 살던 나는 딸아이와 둘만 뉴질랜드로 향했다. 오클랜드에 도착하여 친구 집에 며칠간 머물다가 지인의 소개로 현지인의 집에 홈스테이를 들어가게 되었다. 마침 딸아이와 동갑내기 여자아이가 있는 집이었다. 부부는 아시아에 대한 이해가 있었고 해외생활을 많이 했던 사람들이라 외국인에 대해서 우호적이었다. 보통 홈스테이는 유학생 위주로 받았지만, 나의 경우는 특별하게 모녀가 함께 살겠다고 하니 일단 3개월 동안 실험적으로  살아보고 나서 그 후에  결정해보자고 제안했다. 


나의 뉴질랜드의 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홈스테이 가족들과 매일 저녁시간에 식탁에서  함께  자연스럽게 영어로 대화를 하게 되었다. 때문에 청취력이 빨리 느는 것 같았다. 홈 스테이 집에는 내 딸과   동갑내기 여자 아이가 있었기에  홈스테이 맘은 내 아이에게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잘 대해 주었으며 학교에 적응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친절하게 조언을 해 주었다. 따뜻한 마음을 가진 그 집 식구들을 만난 것이 나와에 내 아이에게는 더 없는 행운이었다. 덕분에 뉴질랜드 생활을 빨리 적응할 수 있었다. 낯선 나라에서 적응하기에 이민 첫  1년이 가장 힘든 시간이라고 하는데 나는 가족과 같은 울타리가 있어서 비교적 외로움을 잊고 비교적 잘 지낼 수 있었다. 


나는 홈스테이 가족과 함께 먹기 위해  일주일에 2일 정도는 저녁식사로 한식을 준비했다. 또한 능통한 영어는 아니지만 함께 식탁에서 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비롯하여 이런저런 일상의  대화를 나누면서 서로를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했고,  문화적 차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 실제적인 경험을 통해서 배울 수 있었다.  3개월이 지난 후에 홈스테이 맘은 좀 더 있어도 좋겠다고 허락을  해서 우리 결국 1년이라는 시간을 그 집에 머물게 되었다. 사실은 더 있을 수도 있었지만 우리는 1년 뒤에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했다. 왜냐하면 이민자들이 한꺼번에 몰려 들어오는 바람에  학교에는 한국 학생들이 넘쳐 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외로운 이민 생활에서  한인들을 자주 만날 수 있다는 것이 나에게는 아주  것은 반가운 일이었다. 그러나  내 아이가  매일 학교에서 한국 학생들과 함께 생활하며 영어보다 한국어를 더 많이 쓰는 것은, 이 곳에  교육이민을 온  목적과 배치되었으므로 나는 과감하게 도시를 옮기기로 마음먹었다.


뉴질랜드의 지도를 펴 놓고 어디로 떠날 것인지에 대해 몇 며칠 고민을 하다가 바람이 심하게 분다고 하는 수도 웰링턴으로 이주를 하는 결단을 내렸다. 첫 1년 동안의  오클랜드의 홈스테이 집에서 살았던 것이 새로운 도시에서 삶을 시작을 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아이의 학교 입학을 위해서 사립학교 두 군데에 면접을 보러 가기 위해  나는 면접 예상문제를 뽑아서 아이와 함께 연습을 하였다.


왜 우리는 뉴질랜드를 선택했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 던져 보면서, 이 나라에서 내가 배워야 가야 할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단지 유창하게 영어를 하기 위해서 만  이 나라에 온 것이 아니라 글로벌 시민으로서 다양한 문화를 배울 수 있는 다민족 국가를 찾아서 왔다는 것, 또 출신 배경이 다른 이민자들로 구성된 나라에서 어떻게 그들과 어울리며 또 한국문화를 전할 것인가에 대해서 깊게 생각하게 되었다. 여기가 바로 글로벌 시민으로서의 살아갈 수 있는 가장 적합한 곳이다라는 확신이 들었다. 


뉴질랜드는 여성 참정권이 가장 먼저 실시된 나라라는 것이 또 하나의 매력이었다. 여성 수상, 여성 제독, 여성 장관, 여성 국회의원이 인구 대비 정말 많은 나라이다. 이 나라에다 이민 오게 되면서 가장 기뻤던 것은 정말 이런 곳에서 딸을 키우고 싶었던 소망이 이루 졌다는 것이다.  자신의 주도적인 삶을 살아가며, 결혼을 하거나 혹은 안 하거나 자신의 꿈을 위해 달려갈 수 있는 환경이 제도적으로 마련되어 있다는 것이 교육 이민의 선택지가 되기에 충분했다. 웰링턴에서 딸아이가 면접을 통과하여 원하던 사립학교에 입학을 하게 되었다. 빨간 정장 투피스 스타일의 교복을 입고 첫 등교를 하던 날 벅차오르는 감격이 느껴졌다.


  비록 낯선 곳이지만  뉴질랜드로 이주해  온 것에 대해, 그리고 타당한 이유와  목적에 의해 이 나라와 지역과 이 학교를 선택하였다는 사실에 대해 확신과 함께  다가올 미래에 대한 좋은 예감을 느껴졌다. 기러기 엄마 1세대로써 다민족 국가인 이 나라에서 제대로 보고 느끼며 글로벌 시민으로 내가 먼저 성장하고 또 내 아이도 잘 교육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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