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반영 Apr 10. 2019

02-2. 한 끗 차이

진짜 나를 찾아가는 이야기

진아의 아빠는 어떤 면에서는 좀 구도자 같은 면모가 있었다. 사주나 주역, 서양 별자리처럼 운명과 삶, 존재에 대해 조그마한 힌트라도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닥치는 대로 공부했다. 그러나 영화관 옆에 조그마한 부스를 내고 사주를 풀이해주는 사람들과는 좀 달랐다. 뭐랄까. 진아가 아빠를 '구도자'라 표현하는 밑바탕에는 아빠의 엄청난 독서력과 탐구 정신이 있었다. 종교를 넘나드는 박학다식함으로 아빠가 궁금한 것은 보다 근원적인 것들이었다. 가령 인간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와 같은 것들, 어린 나이에는 아무리 들어도 전혀 흥미가 생기지는 않는 것들, 되려 공포심만 자극하는 그런 것들이었다.


진아는 어려서부터 자신을 나타내는 여러 표현들에 아주 익숙했다. 사주에서 진아는 물이었다. 깊고 넓은 임수라면 조금 덜 예민했을지 모를 텐데, 아쉽게도 진아는 계수였다. 그러나 무엇과도 잘 섞이는 물의 기본적인 성질을 바탕으로 계수의 예민함은 쉽게 드러나지 않았다. 진아와 가장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K도 물이었다. 다행히도 K는 임수여서 진아의 예민함이 K에게 스며들어 갔을 때는 그 뾰족한 형태를 잃었다. 진아가 예각이라면 K는 둔각이었다. 진아 자신의 뾰족함을 K는 뾰족하게 알아주지 않았다. 진아는 가끔 그 점이 답답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좋은 점이 훨씬 많다고 느꼈다. 


진아는 처녀자리였다. 진아와 같은 날 태어난 사람 중에는 영국의 여왕 엘리자베스 1세가 있었다. 사실 진아는 엘리자베스에 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었지만, 영어권 국가에 살며 자신에게 리즈(Liz)라는 영어 이름을 붙여주면 어떨까 생각하기도 했다. 아빠는 진아와 같은 날 태어난 사람들은 'success seeker'라는 별칭을 얻는다고 말해주었다. 계속해서 도전하는 사람들,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 그래서 성공을 일궈내는 사람들의 특성이 분명 진아에게도 어느 정도는 있을 것이었다. 그래서일까. 진아는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온 이들의 궤적을 돌아볼 때마다 눈물이 났다.


진아는 대학 졸업 4학년 때 직업 시장에 뛰어들었다. 압구정에 위치한 작은 유학원이 진아의 첫 직장이었다. 직원은 원장님을 빼고 진아보다 4살 많은 언니 한 명이 전부였다. 언니는 털털하고 소탈했지만, 이상하게 진아에게는 꼬장꼬장하게 구는 구석이 있었다. 글 쓰는 재주가 좋아 장학생으로 대학을 다녔다던 언니는 진아의 글솜씨를 어떻게든 평가하고 싶어 했다. 그리고 어느 날엔가 원장님이 대신 부탁했노라며 A4용지 한 장 분량의 자기소개서를 써 오라고 했다. 이미 계약서에 도장까지 찍은 마당에 뒤늦은 자기소개서가 웬 말인가 싶었지만 진아는 꾸역꾸역 써서 가져갔다. 원장님에게 직접 내지 말고 자신에게 달라는 말이 어딘가 모르게 수상쩍었어도 그냥 모르는 척했다. 그리고 그 날 오후,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서 네이트온 메신저를 통해 자기소개서에 대한 끔찍한 평가를 들었다. 진아는 상대가 어떤 톤으로 말하는지 전혀 알 수 없는 글말이 때로는 세세한 떨림까지 동반하는 입말보다 더 큰 생채기를 입힌다는 것을 알았다. 


결국 진아는 사표를 집어던졌다. 원장님은 가장 먼저 언니가 불편하게 한 것이 있느냐고 물었다. 진아는 원장님이 뭔가 눈치채고 있다는 것에 놀란 한편, 언니로부터 느껴온 불편감에 대한 당위성이 생기는 것을 느꼈다. 자기소개서 이야기를 주섬주섬 꺼냈다. 그만두는 이유가 꼭 그 때문은 아니라는 말도 덧붙였다. 하지만 진아는 알고 있었다. 그만두는 이유는 순전히 다 언니 때문이었다. 원장님은 그냥 참고 더 다닐 수는 없겠는지 물었다. 본인이 언니에게는 잘 알아듣도록 따끔하게 이야기하겠다고도 했다. 하지만 진아에게는 참고 견딜 이유가 눈곱만큼도 없었다. 


다행히 진아는 안정된 직장을 금세 잡았다. 전국에 지점을 두고 신입사원 교육까지 시키는 곳이었지만 1년 만에 매너리즘에 빠졌다. 그리고 대학원 진학을 이유로 또다시 사표를 냈다. 석사 후에는 한 연구소에서 일했다. 인턴부터 시작해 계약직까지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나가다 은밀히 정규직 제안을 받기도 했지만 또다시 대학원 진학을 이유로 사표를 던졌다. 그러다 결국 낯선 땅으로 건너와 세상에서 가장 오래 걸리는 일을 시작했다. 자기 자신에게로 가는 길이 가장 먼 길이라는 시구처럼, 진아 본연의 존재를 증명하는 방식과 맞닿아있는 공부는 자신의 민낯을 들여다볼 훌륭한 성찰 도구이자, 괴로움의 근원이었다. 


진아는 첫 직장을 그만두던 때 이제 더 이상 자신의 인생에서 사표를 내던지는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만약 직장을 그만두어야 한다면 그것은 더 좋은 회사에서 스카우트되었거나, 결혼하고 자녀 양육의 문제 때문일 거라 믿었다. 모든 사회 초년생들이 그렇듯 진아 본인의 인생에도 상승 곡선만 남은 줄 알았다. 그러나 진아는 일하고, 그만두고를 벌써 몇 번이나 반복했다. 어쩌면 'seeker' 앞에 붙은 'success' 때문일지도 몰랐다. 똑같은 단어인데도 아빠를 설명할 때는 '구도자'가, 진아를 설명할 때는 '성공 추구자'가 되어 버리는 것이 묘하게 기분 나빴다.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으며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을 구도자라 부른다면, 성공 추구자는 뭐랄까? 너무 세속적이고, 만족이라곤 할 줄 모르는 어리석은 자 같은 느낌이랄까? 


이렇게 한 끗 차이로 인생이 갈린다. 


진아는 헤어 나올 수 없는 수렁에 빠진 느낌이 들었다. 끊임없이 어딘가로 오르려 했던 선택들이 하나같이 운명의 장난 같았다. 성공을 거머쥐기 위해 무언가를 한다는 것이 스스로를 가엾게 만들었다. 'success seeker' 결국 만족을 모르는 상태가 지속된다는 것의 허울 좋은 표현 아닐까? 언젠가 'successful human'이 되기는 하는 걸까? 어쩌면 죽을 때까지 반복될지도 모르는 이 사이클을 벗어던지는 것이 진짜 성공인 것은 아닐까? 


진아는 새로 산 만년필을 꺼내 success에서 파생한 온 갖가지 단어를 적다가 생각했다. 한 끗 차이로 생각이 더럽게 많아지는 밤이라고. 스스로 인생 참 피곤하게 산다고. 어쩌면 이 모든 것이 한국에서의 '적령기'를 이탈한 탓이라고. 누구나가 선택하는 길을 가다 보면 더 이상 인생에 대해 물음표 따위는 그리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결국 majority와 minority로 귀결되는 문제인가 하다가 진아는 탁 소리가 나도록 노트를 덮었다. 어깨로 피곤이 몰려왔다.  


2019년 4월 8일 


 













작가의 이전글 02-1. 나를 불편하게 하는 사람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