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나를 찾아가는 이야기
눈을 떴다. 진아는 손목에 찬 핏비트를 두 번 두드려 시간을 확인했다. 오전 8시 20분이었다. 블라인드 사이로 들어오는 빛이 별로 없는 것을 보니 오늘도 흐린 것 같다. 대체 봄은 언제 오는 건지. 진아는 마치 4월이 우기인 나라에 살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겨울이 긴 것 까지는 어떻게든 적응을 좀 해보겠는데, 이렇게 공식적인 봄이 시작되고도 흐린 날이 계속되는 건 어쩐지 참기 어려웠다. 누가 뭐라고 한 것도 아닌데 꼭 진아 인생 자체가 궂은날의 연속인 것 같아 짜증이 일었다.
아, 이제 하다 하다 사형선고까지 받는구나.
진아는 대체로 꿈을 잘 기억하는 편이었으나, 오늘 꾼 꿈은 앞부분이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K와 함께 걷던 길이 도심 한복판이었는지, 풀냄새 가득한 한적한 공원이었는지, 손을 잡고 있었는지, 계절은 어땠는지, 두려움에 울고 있었는지. 그 어떤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무언가 억울한 일로 사형선고를 받은 것은 분명한데, 아무리 꿈이라지만 재심을 청구하지 않은 것은 더더욱 억울했다.
설마 정말로 죽는 걸까. 진아는 믿기 힘들었다.
진아와 K는 한참을 걷다 독서실 칸막이 책상처럼 생긴 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진아는 번역을 해나갔다. 평소와 다른 점이라면 맥북 대신 얼마 전 새로 구입한 잉크를 가득 채운 만년필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노트 한 페이지가 금세 빼곡히 채워졌다. 옆자리에 앉은 K도 묵묵히 자기 일을 했다. 진아에게 허락된 시간은 그 날 오후 5시까지였다. 이후에는 어딘 가로 가야 했는데 이번 생에 마지막이 될 그 자유의 길에 K가 함께 해주기로 한 것이다.
설마 정말로 죽는 걸까. 진아는 여전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때 진아가 앉은 책상 앞에 놓여있던 전화벨이 울렸다. 깜짝 놀란 K가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진아에게 전화를 받아보라고 했다.
여보세요.
숨이 막혔다.
아, 여보세요. 오늘 저희 남편이 저녁에 중요한 약속이 있어서 야근을 할 수가 없는 상황이라서요. 죄송하지만 지금 빨리 좀 가주시겠어요?
진아의 신변 관리를 맡게 된 공무원의 아내 되는 사람이라고 자기를 소개한 여자가 불쑥 전화해서 한 말이었다. 정말로 죽는 걸까 생각했던 진아의 질문에 실낱같이 매달려있던 삶에 대한 희망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시계를 보니 5시 20분이 넘어가고 있었다.
서둘러 책상을 정리하던 진아는 맡은 분량의 번역 작업을 미처 끝내지 못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왕 늦은 거 자리에 앉아서 마저 끝내고 싶은 마음이 일었지만, 어서 오라는 독촉 전화까지 받은 마당에 시간을 더 지체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운이 좋으면 진아가 죽고 난 뒤 다음 세대의 어느 누군가가 이 작업을 마무리해줄지도 모른다. 세상은 그렇게 가로로, 세로로 이어져 있는 것이니까.
옆에 앉아 있던 K는 다 사람이 하는 일이니 조금 늦었지만 괜찮다며 진아를 안심시키려고 노력했다. 그 순간 진아는 엄마를 떠올렸다. 몇 시간 후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르는 지금에 대해 알려야 할 것 같았다. 마지막 인사와 함께. 아마도 진아의 엄마는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이냐며 상황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을 것이다. 아, 어쩌지. 그러면 시간이 더 늦어질 텐데. 어쩌면 엄마는 이야기를 듣다가 화를 낼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하게 그럴 것이다. 그리고 한걸음에 비행기 표를 끊어 진아가 있는 곳으로 오겠지. 그러나 직항이 없는 이곳에 엄마가 아무리 빨리 와도 그것은 최소 17시간 후에야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꿈에서 깨며 진아는 사형제도가 있지만 집행하지 않는 대한민국이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그렇더라도 이 해괴망측한 꿈을 어떻게 감당하면 좋을까. 어쩌면 진아는 본인이 생각한 것보다 정신이 많이 피폐해져 있을지도 모른다. 지난번 세 번째 상담 이후로 아무것도 기록하지 않은 노트를 내려다보았다. 어제 네 번째 상담이 끝나고 K와 다퉜던 내용도 다시 한번 떠올려 보았다. 속 시원히 무언가 적어 보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어떻게, 얼마나 적어야 할지. 그럴수록 머리는 텅 비었다.
2019년 4월 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