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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영 Apr 18. 2024

아침 그리고 저녁


#아침그리고저녁 #욘포세 #문학동네



  끝맺지 않은 문장 vs. 끝맺은 문장    


글을 읽는 것에 있어서 마침표가 이리도 큰 역할을 했을 줄이야! 쉼표와 띄어쓰기로만 이어지는 문장들이 호흡을 가쁘게 만든다. 큰따옴표로 묶이지 않은 누군가의 말은 행간을 바꿔 쓰지 않으면 소속이 영 불분명하다. 어떤 말은 이 사람이 했어도, 저 사람이 했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대체 누구의 말일까? 어쩌다 한 번 나오는 마침표가 반갑고, 끝을 맺은 문장에는 나도 모르게, 어쩌면 작가가 담으려고 했던 것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 확실한 것은, 그가 올라이이고 어부이며 마르타와 결혼했고 요한네스의 아들이며 이제, 언제라도, 조그만 사내아이의 아버지가 될 것이며, 아이가 할아버지처럼 요한네스라는 이름을 갖게 되리라는 것이다. 신이 존재하기는 하겠지, 올라이는 생각한다. 하지만 그는 너무 멀리 있거나 너무 가까이 있다. 그리고 그는 전지전능하지도 않다. 
<아침 그리고 저녁>  p.17


'확실한 것은'으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이어지는 이 문장부터 시작해 그 뒤로 이어지는 4개의 문장에는 반가운 마침표가 보인다. 누구와 결혼했고, 누구의 아들이며, 누구의 아버지가 될 것이라는 것만이 확실하다고 하는 것, 결국 '나'라는 존재는 내가 아닌 '타인'으로부터 분명해진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걸까? 그렇다면 신은? 존재하더라도 너무 멀리, 혹은 너무 가까이 있다는 그 신은? 존재하지만 결코 전지전능하지 않다고 말하는 그 신은 뜬금없이 왜 튀어나온 것일까? 인간인 나는, 인간 세계에서, 또 다른 인간의 존재로 인해, 그 존재가 정의되지만, 신은 이런 방식의 존재 정의가 불가능하기 때문일까?  


마침표가 있는 문장마다에 마음을 두기 시작하자 끝이 정확하게 맺어진 문장에서조차 확실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마침표를 찍을 수 있는 문장, 요한네스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그의 몸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일상'이라고 언급하고 있으나, 오히려 2부 전반에 걸친 서술 방식인 '그의 몸에서 일어나는 일과 일상'은 되려 물음표만 그리게 만들지 않는가. 






  '삶'이 빠진 '탄생'과 '죽음'  


소설의 1부는 올라이가 아들의 탄생을 기다리며 겪는 기대와 설렘, 그리고 출생 직후의 모습들(특히 울음소리에 대한 부분이 인상적이었음)이 생생히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2부가 시작하자마자 곧바로 죽음으로 이어지는 전개는 보통의 마음으로는 쉽게 따라가지지 않는다.  탄생과 죽음의 시점 사이에 놓인 '삶'이란 것이 완전히 배제되었기 때문이다. 분명 아들의 탄생을 기다리며 올라이는 '자신의 근원인 어머니의 몸속에서 나와 제 삶을 시작해야 한다'라고 말하면서도, 그 '삶'은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는 것이다.  



어린 요한네스가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다, 어린 요한네스, 그의 아들, 이제 그의 어린 아들은 이 험한 세상으로 나와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살아가는 동안 겪는 가장 힘든 싸움 중 하나일 것이다, 자신의 근원인 어머니의 몸속에서 나와 저 밖의 험한 세상에서 제 삶을 시작해야 한다, 
<아침 그리고 저녁> p.18 



작가가 '죽음'에 관심을 두었다는 것이 이런 형태로 나타날 것이라고는 사실 상상하지 못했다. 최근 꽤 많은 사람들이 잘 죽는 것(웰다잉)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지만, 사실 죽는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삶의 종착역으로 인식되곤 한다. 누구에게나 언제나 '삶'이 먼저이고, '(행복하든 부자가 되든 어떤 형태로든) 잘 사는 것'이 중요하며, '잘 죽는 것'이 중요한 것은 결국 그것이 '잘 사는 것'의 마침표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2부에서 요한네스는 등장도 전부터 죽어 있다. 그의 삶이 어떠했을지, 아버지의 예상대로 힘든 싸움을 했을지, 아들이 있다면 그의 아버지가 그러했던 것처럼 자기 아버지의 이름(올라이)을 지어주었을지, 신에 대해서는 어떤 마음이었을지, 이런 것이 궁금했지만 그는 이미 죽어버리고 만 것이다. 






  좋은 죽음이라는 것?   


죽은 요한네스를 두고 딸 싱네와 그의 남편 레이프가 주고받은 대화는 어딘가 모르게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다. 밤사이에 주무시다가 편히 돌아가셨을 거라는 추측, 건강하고 정정하셨으며 거의 매일 바다에 나가셨다는 회상, 마음이 아파 눈물이 핑그르 돌지만 결국 누구에나 닥칠 일이고 언젠가는 우리 모두의 차례가 올 거라는 불필요한 위로, 그리고 아버님은 천수를 누리신 거라는 이야기는 2부 첫 장부터 시작되는 쓸쓸한 분위기를 어떻게 해도 따뜻하게 바꾸지 못한다. 



오늘은 뭘 해야 하나? 온종일 틀어박혀 있을 수도 없고, 에르나가 죽은 후로는 마치 모든 온기가 그녀와 더불어 떠나버린 듯 집안이 너무도 썰렁해졌다, (...) , 하지만 어떻게 해도 집은 온전히 따뜻해지지 않았다, 그리고 전등을 아무리 켜도, 더 이상 온전히 환해지지 않았다, (...), 너무 늘어져도 못쓰는 법, 몸을 움직여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결국 완전히 녹슬고 말 테니, (...), 너무 불평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 나쁠 것도 없다,
<아침 그리고 저녁> pp. 33, 35



싱네와 레이프가 생각한 것처럼 적어도 큰 고통을 경험하며 숨이 끊어진 것은 아니니 이쯤이면 '좋은 죽음'이었다고 얘기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더군다나 죽음을 향해 가는 마지막 순간에는 가장 친한 친구가 마중까지 나와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늘그막에 혼자가 된 요한네스의 삶에는 외로움과 쓸쓸함이 뚝뚝 묻어난다. 독자로서 요한네스가 노쇠한 몸으로 젊은 사람들처럼 생기가 넘치는 삶을 원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조금은 안온한 느낌을 줄 수 없었던 걸까? 결국 좋은 죽음이라는 건, 그저 산 사람들 입장에서의 이야기일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죽음 이후의 세계  


그리고 페테르와 그는 그 자신이면서 동시에 아니기도 하다, 모든 것이 하나이며 서로 다르고, 하나이면서 정확히 바로, 그 자신이기도 하다, 저마다 다르면서 차이가 없고 모든 것이 고요하다 
<아침 그리고 저녁> p.134



페테르가 요한네스를 데리고 가는 '죽음' 이후의 그곳은 목적지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장소가 아니라 이름도 없고, 말이란 게 없으므로 위험도, 아픔도, 영혼도, 너도 나도 없다.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으며, 그저 거대하고 고요하고 잔잔히 떨리며 빛이 나고 환하다. 사랑하는 건 거기 다 있으며, 사랑하지 않는 건 없고, 하늘과 바다는 둘이 아닌 하나이고, 빛과 물도 하나이다. 그 어떤 것도 개체로서 존재하지 않는 곳. 도무지 자아가 꺼질 틈이 없는 현생의 나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세계라는 생각이다. 결국 이상한 호기심이 발동하여 욘 포세의 다른 책들도 덩달아 주문했다는 좀 이상한 끝맺음... 뭔가 어설픈 결말이니 나도 문장 부호 따위는 생략해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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