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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굴이 Dec 15. 2023

나는 '나의 신'을 믿겠습니다

민감한 주제다. 종교. 


그래서 절친한 친구들과도 입 밖에 꺼내놓고 말해본 적이 없다. 개인적으로 정치관과 종교관은 지극히 사적인 영역이라 생각해서 구태여 남들과 이야기를 하지 않는 편이다. 애초에 이성적으로 접근할 수 없는 주제에 대해 갑론을박하는 것도 가당치 않아서,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조금 조심스럽다. 


학창 시절 친구들 중에는 모태신앙 기독교인도 있고, 절에 다니는 친구도 있고, 무속신앙을 믿는 친구, 신을 믿지 않는 친구 등, 다양했었다. 새삼 친구들에게 감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다가 주말마다 교회를 나가는 친구가 있어서 약속을 조정해야 하면 그제야 그 친구가 기독교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을 정도로, 내 친구들은 자신의 종교관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 배려심을 보여주었다. 모태신앙 기독교인이라는 친구랑 사주카페를 간 적도 있다. 가끔 이상형 남자 친구 혹은 미래의 남편상에 대해 시답잖은 수다를 떨 때면, '교회에 다니는 사람'을 언급하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러면 그때가 그 친구의 종교관을 알 수 있는 시기였다. 그리고 밴쿠버에 온 이후로는 그 신의 범주가 마구 늘어나서 다양한 종교와 문화를 만나고 살았다. 이렇게 말하는 나도 한 때는 천주교 신자로서 대학 입학 후 세례를 받고 약 7-8년 정도 열심히 성당을 다녔다. 



그리고 나는 지금 신을 믿지 않는다. 



왜 나는 신을 믿지 않게 되었을까?  

몇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로 '스스로에 대한 실망'을 꼽고 싶다. 나는 철저히 나 자신의 복을 위해 신을 믿었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런 내 모습에 회의감을 갖게 되었다. 


이렇다 할 종교가 없던 중/고등학교 시절에도 시험을 치는 날이나 수능, 논술 등의 큰 시험이 있을 때 두 손을 맞잡고 시험을 잘 보게 해달라는 경건한(?) 기도를 올리곤 했다. 약간의 강박이 있었던 탓에 시험을 친다든지 따위의 중요한 의식을 치를 때에는 나만의 루틴을 따라야만 했는데 '신'에게의 청탁도 그 중 하나였다. 물론 내 청탁의 대상은 특정 종교의 '신'이 아닌, 초월적 존재로서의 '신'이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원하는 대학을 입학하게 된다면 당신의 성전에서 세례를 받겠다고 혼자 발칙한 계약서를 들이밀었던 것 같다. 당시 부모님은 이렇다 할 종교가 없었고, 내 주변에서 우리가 '종교'라고 인지할 수 있는 형태의 신을 믿는 사람은 성당을 다니던 외할머니뿐이었으니, 자연스럽게 '세례'는 천주교의 그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내 머릿속에 입력되었다. 누구의 강요도 없었다. 지금 짐작해 보건대, 10대 후반 소녀의 고만고만한 짱구로는, 계속 상대에게 뭔가를 바라기만 했으니 나도 상응하는 무언가를 대가성으로 줘야 한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 아닐까, 정도...


대학을 서울로 가면서 첫 두 해는 외할머니 댁에서 학교를 다녔다. 이제 약속을 지킬 시간이라며 성당을 나가려고 보니 세례는 어느 정도 시간과 노력을 들인 다음에야 가능한 것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성당에 정해진 기간 동안 나가서 교리 수업을 받아야 했지만, (바쁜) 학생이라는 허울 좋은 핑계 하에 통신교리라는 형태로 교리 공부(?)를 얼렁뚱땅 마쳤다. 세례를 받기 위해서는 세례명부터 대모까지 결정할 것들이 많았다. 대부분 내가 하고 싶은대로 골랐던 기억이 난다. 특히 대모는 성당에서 세례자를 영적으로 인도해줄 수 있는 사람으로 고르는데, 유아 세례의 경우 부모의 친구가 대신해주고 성인 세례의 경우 성당 공동체에서 찾는 경우가 많단다. 나는 성당 공동체에 아는 사람도 없었고 그렇다고 일면식도 없는 사람을 대모랍시고 세워두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나를 이 종교로 발 들이게 해 준 사람을 대모로 모시는 것이 의미있겠다 생각하여 외할머니를 대모로 하겠다고 통보했다. 성당에서 흔히 있는 일은 아니지만 내 설명을 들으신 신부님께서 허락해 주셨던 기억이 난다. 


세례 당일 찍은 사진을 보면 유난히 내 얼굴이 달떡같이 허옇게 떠 있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여기에는 한 가지 에피소드가 있다. 대학 입학 후 갑자기 주어진 엄청난 자유를 죄다 술로 탕진하다가 술살이 오르고야 만 나는 당시 다이어트를 하고 있었기에 빈속으로 다니는 경우가 많았다. 문제는 성당에서 미사를 볼 때 좀처럼 앉아 있을 겨를이 없이 계속 일어났다, 걸어 나갔다, 앉았다를 반복해야 한다는 것인데, 그럴 때마다 저혈압인지 저혈당 때문인지 눈앞에 반짝이는 별이 쏟아지면서 식은땀이 흐르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는 것. 세례식 당일도 꼬까옷을 입어야 된다고 점심을 거르고 갔더니 어김없이 그 증세가 나타났다. 평소 주일미사였다면 조용히 앉아 있으면 될 일이지만, 세례식 당일이라 세례 당사자인 나는 끊임없이 일어섰다, 걸어 나갔다, 를 반복해야 했고 정말 헛구역질이 나오기까지 했다. 이 모습을 지켜보시던 성당 내 봉사자 중 한 분이 나를 데리고 나가 "긴장해서 체했나 보다"라고 하시며 애먼 엄지손가락까지 따주셨다. 세례는 무사히 마쳤지만 당시 사진을 보면 처녀귀신처럼 얼굴이 허옇게 뜬 처자가 하나 있는데, 그게 나다. 


외할머니를 대모로 할 정도이니 영적으로 굉장히 가깝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나는 주일 미사를 갈 때 철저히 혼자였다. 그 1시간만큼은 나 홀로 내면의 나와 마주하는 시간이라 생각했기에, 아는 사람이 주변에 있는 것이 불편했다. 몇 번 같이 미사를 가자고 제안하던 외할머니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동네 할머니들과 오전 미사를 보러 가셨다. 그 이후로 성당을 여러번 옮기면서도 미사는 항상 혼자 보는 것을 선호한 것을 보니, 이미 성당에 발을 들이던 미사시간을 오롯이 나에게만 집중하는 '명상의 시간' 쯤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세례를 받고 1달 보름 정도 될 무렵, 첫 고해성사 시간이 왔다. 일반 신자들의 고해성사에는 딱히 의무가 없지만, 세례 후 첫 고해성사는 의무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무 냄새가 물씬 풍기는 작달막한 방에서 신부님과 나는 나무판자로 만든 창문(?)을 사이에 두고 앉았다 (고해성사 방은 신자가 들어오는 입구와 신부님이 들어오는 입구가 따로 나뉘어 있고, 신자와 신부님은 나무판자로 된 벽을 사이에 두고 그곳에 난 조그마한 창문(?)을 통해 대화를 나눈다. 물론 이 창문은 검게 처리되어 있어서 상대방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게 되어 있다). 첫 고해성사인 만큼, 내가 동생을 줘 팼다거나 엄마가 아끼는 유리컵을 깨고 어디 창고에 숨겨놓았다든지 등의 잘못을 고해야 하나 고민했지만, 나는 그냥 내 마음속에 있던 말을 꺼내놓기로 했다. 


"신이 정말로 존재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신부님은 이런 것을 두고 신앙 권태기가 온 것이라 표현한다면서, 첫 세례를 받고 1달 반 만에 오는 경우는 드문데 좀 빨리 온 것 같다고 하셨다. 그 이후의 말이 기억나지 않는 것을 보니, 그냥 별다른 조언 없이 묵주기도 몇 번을 바치라, 정도로 끝나던 것 같다. 


그 이후로 내 신앙은 철저히 구복신앙이었다. 의무적으로 주일 미사를 나갔지만, 나가야 한다고 하니 나갔던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것 같다. 원체 술을 많이 마시기로 유명한 대학이었지만 그 중에서도 넘치는 혈기를 주체하지 못하고 특별히 술을 진탕 퍼 마시던 나는 시험기간만 되면 술을 끊었다. 펑펑 놀아도 학점은 잘 받고 싶었던 마음에 벼락치기를 하며 염치 불구하고 신을 찾았다. 2년을 할머니 댁에서 학교를 다니다가 시험공부를 위해 신림동 고시촌으로 옮긴 후에는 좀 더 열심히 신을 찾았다. 시험이라는 절체절명의 목표가 있었으니, "이번 한 주 공부 잘 되게 해 주세요" 혹은 "이번 시험 잘 치게 해 주세요"를 빌기 위해 바지런히 녹두거리를 가로질러 성당으로 갔다. 어쩌다가 공부가 잘 안 된 주가 있으면 나를 자책하면서 신에게 또 빌었다. 다음 주 공부가 잘 되게 해달라고. 시험장에 가기 전 성호를 긋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시험 결과가 마음에 들면 신을 잊고 시험 결과가 좋지 않으면 다시 신을 찾았다. 복학을 위해 다시 학교 근처로 자취방을 옮겼을 때에도, 술집만 가득한 학교 주변이 지겨워 자대 석사진학이지만 또 이사를 나갔을 때에도 근처에 있는 성당부터 확인했다. 시험공부를 접고 대학원 공부로 방향을 바꿨지만, 종목만 바뀌었을 뿐 바라는 목표를 추구하는 삶임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러니 나는 늘 신이 필요했다. 나 자신을 믿지 못했고 내 불안함을 외부로 발산하거나 혹은 내부에서 묵히다가 나를 괴롭히는 것 밖에 할 줄 몰랐다. 외부로 발산할 때면 술이 술을 부를 때까지 와장창 마시고 묵혀놨던 마음을 펑펑 울면서 꺼내는 것 정도 (최악의 주사다 ㅠ), 내부에서 묵힐 때에는 자책을 하면서 그나마 경건한 방법으로 신을 찾아 속죄하고 다시 복을 빌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내가 원하는 시점에 갖게 해달라고. 


애석하게도, 어차피 구복신앙으로 시작한 것 끝까지 구복신앙으로 바라보면 좋았을 것을, 내 마음 한 곳에 있던 얄팍한 양심이 점점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너, 신이 존재하는 지도 잘 모르겠다며. 그런데 네가 필요할 때는 그 있을지도 모를 존재를 찾고 있네?"라는 내면의 속삭임. 마치 구내염 같았다. 별로 아프지 않지만 은근히 거슬리는. 그래서였을까. 밴쿠버로 나오기 전까지 살던 동네의 성당에 처음 발을 들이던 순간, 혼자만 하던 구복신앙을 접고 다른 신자들과 성당을 위해 봉사를 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물쩍 거리던 나를 발견한 수녀님이 나를 반겨주셨고 곧 신부님을 소개해주셨다. 그 수녀님의 얼굴은 참으로 맑았고 내 손을 잡아주시던 두 손이 정말 따뜻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 시험공부에서 대학원 진학으로 인생경로를 막 바꾼 참이라 더없이 막막하고 약간 우울하기까지 했던 것 같다. 우중충한 바이브를 발산하는 나를 따뜻하게 맞아주시는 수녀님과 굉장히 잘생긴 신부님의 소개로 주일 학교 봉사를 하게 되었고 어쭙잖은 피아노 실력으로 주일학교 반주를 맡아 아이들을 가르치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 봉사활동 경험은 내가 성당으로부터 정을 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물론 성당은 잘못한 것이 없다. 학교에서 만난 친구들로만 이루어진 인간관계에 익숙했던 내가, 학교 밖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이질감을 느낀 것은 어쩌면 당연했을 것이다. 나보다 3-5살 어린 친구들이 본인의 학교 생활보다 더 열심히 성당 활동을 하는 것이 신기했다. 이질감이 느껴지는 그들의 일처리 방식이 내 성에 차지 않았던 기억도 난다. "언니가 계시니까 뭐든 일이 빨리 진행되네요"라는 누군가의 말에 "너네가 너무 비효율적으로 일을 하고 있는 거야"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정말 오만한 생각이었지만 그때의 나를 위해 변을 하자면, 대학원 생활로도 바쁜데 1주의 하루를 통째로 빼내어서 왔건만, (내가 보기에) 말도 안 되는 일을 말도 안 되게 길게 하면서 그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는(?) 그들이 답답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게다가 초등학생으로 이뤄진 주일 학교 성가대를 담당하면서 나라의 희망인 어린이들을 상대하는 것이 나와 절대 맞지 않음을 깨달았다. 다른 봉사자는 힘들어도 아이들 보면 힘든 마음이 풀린다면서 성가대를 떠날 수 없는 이유라고 했는데, 아이들을 상대하느니 논문을 1편 더 쓰는게 낫겠다고 생각한 나는 아무런 말도 못 하고 혼자 죄책감을 키우고 있었다. 


결정적 어퍼컷은 주일 미사를 마치고 매일같이 봉사단원들과 회식을 가거나 노래방을 다니는 성직자의 모습이었다. 성직자라고 해서 모두 천편일률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이전에 다니던 성당 주임 신부님은 달리기와 술을 아주 좋아하셨지만 독보적인 신실함을 보여주셨기에, 술과 신앙심의 상관관계가 없음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성당의 '굉장히 잘생긴 신부님'을 두고, 어머니회나 수녀회에서도 우려의 눈으로 지켜볼만한 일이 계속 생긴다는 것을 전해 들은 이후로 그 봉사단체에 머무르고 싶지 않았다. 6개월 남짓 봉사를 하면서 내가 회식에 참석했던 것은 단 2번이었고 그 중 1번은 나의 환송회였다. 마지막 날, 식사를 마치고 봉사단원들과 근처 하천을 걷는데 신부님이 말씀하셨다. 


"너굴이도 살만 좀 빼면 되게 예쁜 얼굴일 텐데. 야옹이(다른 봉사자) 봐봐. 같이 서 있으면 둘이 키는 비슷한데 얼굴이 두 배야." 


그렇다. 당시의 나는 4년에 걸친 시험공부의 스트레스를 얼굴과 온몸으로 때려 받은 상태였기에 정말 뚠빵한 너구리 같았다 (야옹이의 얼굴이 비정상적으로 작았던 것도 있다). 성인 여드름이 삐죽이 올라와 있고, 아무렇게나 길러 해리포터의 해그리드 같은 머리를 질끈 묶고 다녔다. 옷을 살 마음의 여유도 돈도 없어서 맨날 같은 청바지만 입고 성당을 나갔다. 마음이 중요한 것이라 생각하면서. 하지만 그 신부님에게는 외모도 중요했나 보다. 


언제 봉사활동을 그만둘지 적당한 타이밍을 보고 있던 찰나, 자주 들려오는 불쾌한 루머들은 내 마음을 더욱 부채질했다 (신부님의 외모 지적도 한몫했으려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학업을 핑계로 봉사단체에 안녕을 고했고, 그 이후 주일 미사는 나갔지만 봉사단원들이 오지 않을 일반미사에 참석했다. 그러다가 유학을 준비하고 그 와중에 인턴십을 하러 뉴욕에 몇 달 머무르다 보니, 성당에 가지 않는 시간이 길어졌다. 그 전에는 늘 내가 원하는 것을 신에게 청탁하러 주일미사를 갔으니 행여나 한 주라도 빠지면 내가 청탁한 것이 이뤄지지 않을까봐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구복신앙에 입각한 두려움이 성당을 부지런히 나가게 만드는 원동력이었지만, 곧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뉴욕에서 지내는 기간 동안 학부 신입생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진탕 술을 퍼먹으며 현실도피를 하다보니, 성당을 나가지 않아도 내 삶이 그럭저럭 굴러간다는 것을 깨달았다 (혹은 착각). 그러다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유학 준비를 마무리할 땐 - 어쩌면 신에게 큰 청탁을 넣어야 했을 시기였는데도 - 성당을 가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이후 밴쿠버로 오면서 자연히 냉담자가 되었고, 지금은 관광지에서의 성당 구경 혹은 1년에 2-3차례 마음이 동해서 아무도 없는 성당에 가는 것 빼고는 '종교'활동을 하지 않는다.  




아이러니하게도, 밴쿠버로 온 이후 '하느님' 소리를 참 많이 듣게 되었다. 뉴욕에서도 '장로님' 소리를 듣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많이 봤는데, 내 지인 왈, 이민사회에서 믿고 의지할 곳이 마땅치 않다 보니 교회를 위주로 사람들이 모이고 초기 정착에 필요한 도움을 받고 또 베풀다 보니 그 세력이 꽤 공고해지는 것으로 분석했다. 실제로 내 주변에도 밴쿠버로 유학을 와서 첫 해외생활을 시작하는데 아예 교회와 그 단체를 통해서 정착에 지대한 도움을 받고 그 단체에서 지금의 배우자를 만나 결혼한 사람이 둘이나 된다. 나의 다른 지인은 우스갯소리로, 편하게 정착하고 싶으면 교회에 나가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자기처럼 하나부터 열까지 뼈 빠지게 시행착오 겪으면서 정착하게 된다고 했다. 물론 다른 종교 집단 - 성당이나 절 - 에도 적용되는 이야기겠지만, 기독교가 보편적으로는 활발한 활동을 하니까 우리 눈에 더 잘 보이는 측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올 여름 성당과 절에서 하는 행사에 간 적이 있는데, 모두 한글학교를 운영하는 등 각자의 방식으로 지역사회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을 보고 흥미롭다고 생각했다. 


안타깝게도 성당을 다닐때조차 '하느님'을 일상에서 부르짖는 광경을 썩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내가 성당을 그나마 조금 더 좋아했던 이유는 오는 신자 막지 않고 가는 신자 잡지 않아서였다. 믿을 사람과 믿지 않을 사람의 마음 모두를 존중하는 태도가 좋았다. 그런데 밴쿠버에서 듣는 '하느님'은 성당에서 쿨내 풍기며 들리던 하느님이 아니었다. 내가 천주교 신자였던 것을 알게 된 교회 신자들은 나에게서 일종의 동질감을 느꼈는지, 갑자기 자기들의 '하느님' 이야기를 조심성없이 늘어놓았다. 슬슬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물론, 주변에서 듣는 '하느님' 소리는 내가 안 들으면 그만이다. 집들이에 와서 자기 멋대로 이 집에 복을 주기 위해 기도를 하고 싶다고 아멘을 외치는 사람도, 대화 중 시도 때도 없이 할렐루야를 외치는 사람도, 누가 봐도 지금 증상이 심각한데 주치의가 처방해준 약을 먹지 않고 하느님을 찾으면서 나에게 조언을 구하던 사람도, 학술적인 토론을 하는데 개인의 종교관을 들먹이며 자기 주장이 무조건 맞다고 말하는 사람도, 그냥 내가 고개 한번 젓고 다시는 안 보면 그만이다. 이민자로서 도움이 필요해도 종교 집단을 통하지 않고 조금 고되지만 스스로 하면 될 일이다. 문제는 내가 원치 않는데, 나에게 하느님을 믿으라고 강요하는 사람을 만날 때 발생한다. 특히 그 사람이 가족 구성원일 경우 머리가 진짜 많이 아파진다. 




15년 전 즈음 퇴직한 이후 엄마는 교회를 나가기 시작했다. 엄마가 기독교인이었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던 나는 조금 놀라웠지만, 엄마는 워킹맘으로 살면서 먹고사는 일이 바빠 교회는 언감생심이었고 이제는 시간적 여유가 생겨 본격적으로 나가는 것이라고 했다. 내가 감히 미루어 짐작하건대, 엄마는 직장을 그만두고도 여전히 바빴지만 마음이 많이 외로웠을 것이다. 지난 10년 동안 자식을 통해 큰 상처를 받았으며, 세상사 자기 마음대로 되는 일 하나 없고, 1년 전에는 남편과 본인이 각각 큰 수술을 받아야 했던 엄마에게 초월적 존재로서의 하느님은 어쩌면 이 혼탁한 세상에서 유일하게 엄마의 마음을 보듬어줄 존재였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엄마는 예배만 열심히 나가는 조용한 신자로서 다른 교회 사람들과 친목을 하지도 않고 엄마가 유일하게 의사소통을 하는 사람은 목사님 뿐이었기에, 나는 그녀의 마음에 평화를 줄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것으로 다행이라 여겼다. 문제는 언젠가부터 엄마가 나를 그 '구원의 세계'에 데려가고 싶어 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가뜩이나 카톡으로 연락도 안 하고, 영상통화는 1년에 한 번 할까 말까 하는 나와 엄마의 카톡방 80%는 하느님에게 올리는 기도였다. 그 기도는 나를 위한 것이었지만 주로 일방적이었다. 아주 가끔 자신의 기도에 동참해달라는 엄마의 요구에 적극적으로 동의도 못하고 또 그렇다고 싫은 티도 많이 내지 못한 채 6-7년이 흘렀다. 종종 "내 종교는 내가 알아서 하겠다" 정도의 말을 전달하는 것이 전부였다. 엄마는 죽었다 깨어나도 모르겠지만, 그 말을 하는 이면에서 나는 많이 괴로웠다. 상대방은 잘 알아차리지 못했을 수도 있고 알아차렸지만 모른 척하고 언젠가는 저 아이가 하느님의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믿는 것일지 모르겠으나, 나는 숱한 날 마음이 괴로워 Paula와 이 주제에 대해 여러 번 이야기를 나눴다.


내가 성당보다 더 믿고 찾아가는 Paula는 신을 믿지 않는 사람이다. 

올 봄 내가 번아웃을 겪기 전에는 종교 이야기가 나와도, 엄마의 '강요'에 대해 내가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에 대한 대화가 주를 이루었다. 그럴 때마다 내 대답은 늘 복합적이었다. 내가 생각하는 가치관과 신념대로 삶을 살아갈 의지 그리고 그 자유가 무엇보다 중요했던 나에게, 엄마의 언행은 내 boundary를 존중하지 않고 침범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다른 주제에 관해서라면 이렇게 불통이 아닐텐데, 최근 10년 동안 들불처럼 번진 엄마의 하느님 사랑은,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그 하느님의 사랑을 나에게도 전파하려는 엄마의 노력은 이전에 볼 수 없었던 특이한 방식의 의사소통이었다. 어떤 형태로든 강압을 너무너무 혐오하는 나로서는 애초에 그 대상이 남이었다면 얄짤없이 관계를 청산했겠지만 피로 얽힌 인연을 그렇게 할 순 없었다. 그리고 모든 면에서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단 하나, 종교에 관해서만 이견이 있을 경우에는 이걸 무처럼 자르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내가 내 자유를 희생하면서 '하느님'을 외치지도 못하는 애매한 상황이 된다. 물론, 나는 내 나름으로는 최선을 다해 엄마에게 '설명'을 했다. 종교관과 정치관만큼은 지극히 사적인 부분이니 강요나 설득으로 한 사람의 생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 달라고. 다행히 엄마는 내가 말하는 동안에는 내 말을 들었다. 전적으로 나의 생각을 존중한다고도 했다. 그렇지만 이제는 안다. 엄마는, 내가 마음을 바꿔서 자신이 원하는 '구원의 세계'에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올 9월 한국에 일하러 들렀을 때 부모님 댁에는 약 10일 정도 짧게 머물렀었다. 시차 적응도 제대로 하지 못한 이튿날, 내가 점심을 먹는 동안 엄마는 내 손을 꼭 붙잡고 말했다. "이제 시간이 얼마 없다. 천국의 문이 닫히면 그 이후에 후회해도 소용이 없다". 


작년 여름 엄마의 부러진 다리를 부여잡고 나는 하느님을 불렀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사람을 구해줄 수 있다면 나는 그 어떤 신이든 불렀을 것이다. 20일 넘게 엄마의 대소변을 받으며 입원 간호하는 기간 내내 매일이 전쟁이었다. 몸이 많이 약한 엄마는 암수술에 비해 간단한(?) 정형외과 수술을 받으면서 더욱더 약해져 갔다. 환자의 몸이 받질 않으니 쓸 수 있는 약에도 한계가 있었고 엄마는 매일같이 먹은 것을 게워내기 바빴다. 내가 백방으로 노력을 다 해도 모든 일이 다 잘 된다는 보장이 없음은 이미 차고 넘치게 경험해서 알지만, 이 때는 경우가 달랐다. 학교 입학이나 장학금 혹은 논문 따위의 성과가 아니라 사람의 건강과 목숨이 달린 일에서는 내 종교관이나 자유의지 따위를 따질 겨를이 없었다. 응급실에서 고통으로 숨이 넘어가는 엄마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나는 무슨 말이든 했을 것이다. "내가 하느님 다시 부를게, 엄마." 엄마의 흐릿한 동자에 찰나의 생기가 돌았다. 고맙다고 했다. 무엇이 고마운지는 차마 묻지 못했다. 


간병하면서 엄마랑 이야기할 기회가 많았다. 나는 엄마의 마음이 약해지지 않도록 붙잡으며 침대 붙박이가 되어버린 엄마의 24시간을 보살피는 데에 집중했다. 엄마는 종종 말했다. "내 허벅지가 부러질 정도는 되어야 네가 하느님을 부르는구나." "네가 드디어 하느님을 부르게 되어 너무나 기쁘다". 뇌가 멍해지는 것 같고 가슴이 팍 막혀왔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었을 뿐인데, 졸지에 나는 부모의 다리 한 짝이 부러질 정도는 되어야 '자존심'을 꺾고 하느님의 품으로 들어가는 못된 양 한마리가 되었다. 하지만 나는 속으로 그저 삼켰다. 그런 주제로 대화를 할 시기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엄마를 간병인에게 맡기고 병원을 나오던 날, 그리고 며칠 뒤 엄마의 퇴원을 보지 못한 채 공항으로 향하던 날, 나는 많이 울었다. 엄마는 전화기 너머로 울지 말고 잘 가라고 했다. 나는 밴쿠버에 돌아오고 나서 21일 동안 - 한국에서 엄마를 간병했던 꼭 그 기간만큼 - 하루도 빠짐없이 누군가를 병원에 입원시키는 꿈을 꿨다. 도착 후 이튿날은 자다가 깨서 엉엉 우는 나를 달래느라 짝꿍도 밤잠을 설쳤다. 병원밥이 워낙 맛이 없고 밥 먹을 경황이 없어서 나까지 살이 빠지고 있었는데, 밴쿠버에 돌아오고 나서야 서서히 커피 생각도 나고 밥 생각이 났다. 


엄마와 아빠의 수술을 한차례씩 겪으면서 시간의 유한함을 피부로 체감한 나는, 이번에 밴쿠버로 돌아가면 연락을 자주 드려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러질 못했다. 오히려 이전보다 더 카톡에 손이 안 갔다. 엄마와 아빠의 회복기는 엄마가 하루가 멀다하고 보고서처럼 작성해 카톡으로 알려 주었기에 근황을 파악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 그 모든 '보고서'의 마지막에는 항상 하느님이 있었다. 빠른 회복을 바라는 기도, 나의 건강을 바라는 기도, 늘 다음 검진을 가기 전 불안이 극도로 올라오는 엄마는 자신을 향해서인지 나를 향해서인지 모를 기도를 카톡방에 남기곤 했다. 처음에는 대충 응답하는 답장을 보내다가, 그게 엄지척 이모티콘으로 변하더니, 언젠가부터 나는 답을 하지 않는다. 


그로부터 1년 3개월이 지나고 다시 한국행을 앞둔 올 늦여름, 어느 시점에서부턴가 가슴이 답답해졌다. 처음에는 학회 준비로 힘들어서라고 생각했다. Paula랑 한국을 가기 전 상담을 하는 날, 가슴이 답답하다고 말했다. Paula가 물었다. 집에 가는 것이 꺼려지냐고. 나는 부정할 수 없었다. 


내 마음은 단순히 좋고 싫고로 말할 수 없이 복잡다단했다. 병원에서 마지막으로 엄마의 등만 보고 돌아왔다. 그런 엄마가 제대로 걷는지 내 눈으로 봐야 직성이 풀리겠으면서도 여전히 불편한 몸으로 있을까 봐 그걸 대면할 자신이 없었다. 무엇보다, 그 고난의 시간 동안 더욱더 의지하고 매달렸을 엄마의 '하느님'을 더 이상 피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친구는 엄마를 만날 때만 사용할 '부캐'를 하나 만들라고 했다. 누가 교회에 다니면 그냥 다닌다고 답하고, 엄마가 아멘이라고 같이 말해주길 바란다면 그냥 영혼없이 따라 말하는 부캐. 아... 부캐를 갖기에 나는 너무나 고지식한 것이 틀림없었다. 죽었다 깨어나도 아닌 것을 맞다고 하고 싶진 않았다. 내 걱정은 기우가 아니었음을 부모님 댁에 도착하고 24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알 수 있었다. 이튿날 점심, 단 둘이 마주 앉은 식탁에서 엄마는 내 손을 꼭 잡고 "너의 뜻을 존중하지만 늦지 않게" 하느님을 부르라고 했다. 


Paula를 오래 만나며 나를 수련(?)한 덕분인지, 나는 머리꼭지가 돌아버릴 것 같다는 생각을 잠시 했지만 이내 심호흡을 하고 찬찬히 엄마의 눈을 마주 볼 수 있었다. 자기가 낳은 자식의 생각을 부모가 다 알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다만, 학창 시절에는 공부가 우선이었으니 10대 청소년의 가치관 따위 신경 쓸 겨를도 없고 중요하게 생각하던 어른들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성적이 그 청소년을 말하는 전부였으니까. 집이 서울이었다면 아이가 대학을 가고 취업을 하는 모습을 옆에서 보며 비로소 그 청소년이 사회 구성원으로서 자라나는 과정을 볼 텐데, 집이 지방이었던 나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는 내용이었다. 서울로 대학을 가면서 어제까지 교복을 입혀 학교를 보내던 아이를 독립시켰고, 그 아이는 방학이나 되어서야 겨우 집을 방문했다가 시험이다 뭐다 꿈을 찾아 나선다면서 1년에 한 번 겨우 발걸음을 했다. 그나마 한 나라에 있어서 엄마는 아이를 그리며 반찬이다 뭐다 바리바리 싸서 택배를 보내고 가끔은 서울로 올라와 음식을 한 박스 전달해주고 내려가곤 했다. 그 독립적인(?) 그 아이는 공부를 더 해야겠다며 아예 태평양을 건너 이름으로만 들어본 도시에 살면서 2년에 한 번 꼴로 얼굴을 보이러 온다. 20살이 된 이후 그 아이의 가치관이 어떤 방향으로 형성되었고 어떤 신념을 가진 채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는지 과연 부모가 알까. 잘 모르겠다. 


나는 최대한 목소리에 감정을 싣지 않을 채 말하려고 노력했다. 내가 왜 종교를 가지기 힘든지. 나는 스스로의 이기적인 마음에서 시작되는 구복신앙을 외면할 자신이 없다고 말했다. 내가 생각할 때, 종교를 믿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하지 않는 어떤 것을 추가로 하나 더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해서 좀 더 가치있는 삶을 사는 것에 가까워지게끔 노력하는 태도나 뭐 그런 것 말이다. 온갖 나쁜 짓은 다 저지르고 고해성사 하나로 죄가 씻긴다고 믿는 삶이 아니라, 혹은 함부로 하느님의 이름을 팔면서 자기 통장 잔고를 늘리거나 사람을 해하는 짓을 하는 버러지같은 삶이 아니라, 정말로 해당 종교에서 가르치는 내용을 삶에서 실천하려고 노력하고, 남에게 더더욱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그 종교에서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는 그 '신'의 말씀을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삶. 시계추처럼 교회나 성당, 절에 다니는 데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신의 말씀을 실천하는 '신앙인'의 삶이어야 했다. 그러려면 꾸준히 노력을 할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고, 신의 말씀을 기록한 성경이든 경전이든 뭐든 제대로 읽고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나는 철저히 나만을 위한 기도를 드리는 내 모습을 외면하다가 나자빠지거나, 아니면 죄책감을 한 줌 안은 채 기계적으로 성전을 드나들게 될 거다. 그런 마음가짐은 싫었다. 문제는 내가 지금 그런 마음가짐을 가질 여유가 없다는 것. 나는 현실에 발 붙이고 있는 것만으로도 벅찼고, 내 인생에서 '종교'를 하나의 기둥으로 넣을 자신이 아직까진 없다. 순수하지 않은 마음으로 종교를 욱여넣고 싶지 않았다.       


엄마는 말했다. 다 그렇게 얄팍한 마음으로 시작한다고. 천천히 신앙인이 되어도 괜찮다고. 나는 대답했다. 내 진심을 이해하기는 했을까. 전도가 목적인 것만 같은 그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가 싫어, 엄마. 그 얄팍한 마음을 다른 누구보다 내가 알잖아. 내가 싫다고." 


그리고 덧붙였다. 나는 이성적인 사고를 하게끔 훈련을 받고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내가 받는 훈련과 종교는 상극이다. 지극히 주관적이고 심지어 과학적으로 입증도 되지 않은 존재인 신을 믿을 때에는 합리성이고 인과관계고 다 제쳐두고, '그냥' 믿어야 한다. 그런데 나는 그 '그냥'이 되지 않았다. 물론 이성적 사고의 최고봉을 달리는 과학자나 의사들 중에서는 합리성으로 설명되지 않는 그 어떤 부분을 보면서 신을 믿는 사람들도 꽤 있는 것으로 안다. 하지만 나에게 신은 입증의 문제가 아니라, 내 마음가짐의 문제였다. 어떤 존재에 대해 끊임없이 의구심을 가지면서 내가 필요할 때는 그 존재에게 매달리는 이중성을 지켜보고 있자니, 내 안에서 혐오가 올라왔다. 차라리 그 존재를 믿지 않는 게 속 편했다. 


엄마는 예전 나의 수학 과외 선생님이 한 이야기를 또 꺼냈다. 

"그때 그 선생님이 말하길, 네가 그렇게 수학의 정석을 하나부터 열까지 다 세세하게 마스터하려고 하다가 결국엔 지치고 만다고 하셨는데, 지금도 똑같구나."


"엄마, 이건 공부를 세세하게 하고 거시적으로 하는 것과는 차원이 달라. 내 가치관이자 내 신념의 문제야. 내가 어떤 것을 내 신념체계에 추가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데 계속 설득하고 우기는 건 무슨 경우야?"


나는 오랜 시간 엄마에게 차분히 설명했다. 종교는 사적인 영역이고, 나는 그 특정 종교를 지금 받아들일 생각이 없다고. 나는 덧붙였다. 


"엄마가 응급실에 있을 때 내 입으로 하느님을 불렀으니 내뱉은 말은 지켜야 한다고 생각해서, 입에도 올리지 않던 하느님을 부르긴 해요. 내가 내뱉은 말을 안 지키는 게 더 괴롭거든요. 다만 내 신과 나와의 관계는 내가 정할거라고 말씀드렸고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거에요. 그러니 개종을 하라는 둥, 교회에 가라는 둥의 소리는 하지 말아주세요." 


엄마는 더 이상 시간이 없다고. 성경에서 말하는 마지막 시간이 다가오고 있는데 그때 가서 후회하고 구원받고 싶은 순간이 와도 이제 천국의 문이 닫히면 더 이상 들어갈 수 없다고 했다. 나는 협박이 그 종교에서 써먹는 방법이냐고 되물었다. 그 천국의 문이 닫히면 닫혀도 어쩔 수 없지. 그 천국의 문이 닫힌다고 그 앞에서 싹싹 빌어서 그 세계에 들어간들, 그 신이 반가워해줄까? 내가 그 신이라면 나를 믿지 않아도 평소에 착하고 선하게 살던 사람을 더 귀히 여길 것 같다고 말했다. 신을 믿어서 구원을 받는 게 아니라, 초월적 존재인 '신'이 했을 법한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실천하고 살면 그 사람의 삶은 그 자체로 이미 구원받은 것 아닌가? 


엄마는 말문이 막힐 때마다 "그래도..."를 반복하며 이야기를 원점으로 되돌렸다. 그간 말로 엄마를 상처 주고 싶지 않아 이야기를 미뤄왔지만, 나는 오늘 정말 작정을 했기에 이야기를 멈출 생각이 없었다. 특정 종교를 믿는 사람들을 본받고 싶어지면, 그 자체로 전도가 된다고. 굳이 '예수 믿어야 천국 간다'는 계약적 프레임을 들먹이지 않아도, 그 종교를 믿는 사람들 자체가 아름다워 보이면, 복음은 알아서 선포될 것이고 예수의 세계에는 자동으로 사람들이 모일 것이라고. 왜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냐고. 얄팍한 내 성경 지식으로도, 하느님은 '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라'라고 하셨는데, 왜 종교의 이름을 들먹이면서 자행되는 더러운 일에는 다들 입을 다물고 그놈의 '천국'만 외치냐고. 나는 천국 자체를 믿지 않는다고. 애초에 천국을 믿어야 이 모든 이야기가 성립되는 것이 아니냐고. 


내 질문에 답을 하길 포기한 엄마는, 이왕 말 나온 김에 하나만 더 보태자며 다른 종교를 폄하하는 말을 기어이 꺼냈다. 그 말을 하지 않았다면 나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나는 엄마를 향한 실망이 배가되는 것을 느낌과 동시에 내 양 볼이 벌게지는 것을 느꼈다. 내가 다시 물었다. 종교의 참 의미가 무엇이냐고. 특정 종교로 전 세계를 지배하는 것이냐고. 그것은 정치이지 순수한 신앙의 세계가 아니지 않냐고 연거푸 물었다. 진정한 종교의 의미란 미시적으로는 한 개인의 마음의 평화에 기여하는 것이고, 거시적으로는 그 집단과 사회에 도움이 되자는 의미 아니겠냐고 물었다. 그렇다면 그 어디에도 배척정신은 없는데 타인이 믿는 종교를 존중할 생각은 들지 않냐고. 존중한다고 해서 개종을 하는 것도 아닌데, 왜 다른 종교를 있는 그대로 둘 생각을 못하냐고. 게다가 그 폄하에 담긴 내용이 대부분 사실이 아닌데, 제대로 알고 하는 말이냐고. 


언젠가부터 의문문으로 끝나는 내 말에 엄마는 더 이상 말을 보태지 않았다. 짝궁이 봤다면 엄마를 상대로 논리싸움해서 이길 생각이냐며 나를 말렸겠지만, 나는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엄마의 왜곡된 생각은 비교적 최근에 나타난 것이었다. 휴대폰을 새로 장만하면서 기존 휴대폰의 데이터를 이전시켜야 했는데, 그 과정에서 나는 엄마가 다니는 교회의 집사란 사람이 보낸 문자를 보게 되었다. 천주교는 마리아를 믿는 사탄이고, 불교는 무력하고, 이슬람교는 타락했고, 등등의 이분법적 사고를 조장하는 문자였다. 나는 좌절했다. 냉철하고 현명해 보였던 나의 엄마 주변에 이런 사람이 있다니. 아니, 엄마가 이런 사람과 같은 생각을 하기에 이런 사람이 옆에 있는 건가. 혼란스러웠다. 엄마의 종교관이 건강하다고 믿었던 것은 나의 희망일 뿐이었나. 가치관이 다른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 가치관의 뿌리가 건강하길 바랐는데... 실망스러운 실체를 마주하니 속이 터질 것 같았다. 나는 엄마에게 그 문자에 대해 묻지 않은 채 데이터 이동을 마쳤다. 


태평양 너머 밴쿠버에 살지만, 엄마가 한국에서 한 번씩 종교에 관련된 '폭탄'을 바다 건너로 던질 때면 나는 내 일에 집중하지 못한 채 끙끙 앓아야 했다. 며칠 고민하다가 정제된 단어를 고르고 골라 카톡으로 보내면 엄마는 답이 없거나 '알겠다'는 말로 일관했다. 엄마는 지난 6-7년 간, 말로는 내 의지와 선택을 존중한다고 했지만 틈만 나면 '하느님'을 은근슬쩍 의제로 띄웠다. 지난 1년 3개월 간 단 2통의 전화만 한 것은, 아마도 내 무의식 속에서 어떤 방어기제가 작동한 것임에 틀림없다. 나는 내 마음과 일상의 평화를 지키고 싶었다. 애써 균형 잡는 법을 배웠고 삶에 녹여놨는데, 외부에서 흔드는 것을 견딜 수 없었다. 그렇지만 상대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그 상대가 겪어온 삶을 비교적 잘 아는 사람 중 하나였고, 특히 최근에 겪은 일련의 일로 인해 심신이 지쳐있을 상대에게 행복한 소리를 전하지는 못할 망정 짱돌을 던지고 싶진 않았다. 때로는 엄마를 '엄마'가 아닌 하나의 '인간'으로 이해해 보고자 노력했고, 그 과정에서 엄마를 긍휼한 마음으로 볼 수 있게 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종교의 힘이라기보다는 Paula와의 상담 덕분이었다. 


나의 질문 세례 이후 한국에 머무르던 기간 동안 더 이상의 '하느님'은 없었다. 그렇게 잘 넘어갔나 보다, 혹은 엄마가 내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해주나 보다,라고 생각하며 밴쿠버로 돌아왔고 얼마 전까지도 그렇게 믿고 지냈다. 엄마가 난데없이 "주 예수 그리스도는 나의 구원주이십니다, 를 지금 외쳐야 한다. 교회는 나중에 나가도 되지만,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다"는 메시지를 보내기 전까지는. 하필 타이밍도 좋지 않아서 일본 출장에서 돌아온 후 몸이 많이 지쳐있을 때 이 '짱돌'을 봐 버렸다. Paula가 항상 내 boundary를 넘나드는 질문이나 행동에는 즉각 답을 하지 말고, "Do I have a room, do I have energy?"를 스스로에게 먼저 물어보고 생각을 정하랬는데, 이번에 나는 너무도 거대한 NO를 외치며 엄마에게 최후통첩을 보내버렸다. 종교 강요 그만하라고. 이럴수록 내 마음만 멀어진다고. 내가 너무 괴롭다고. 


엄마는 포기한 듯, 그래, 라는 짤막한 답과 함께 한동안 연락이 없었다. 슬프지만 편안했다. 나는 우리의 대화가 일상에서 벌어지는 시답잖은 일을 나누거나, 오늘 사 먹은 라떼가 맛이 없었다거나 따위의 이야기들로 가득 차길 바랐다. 안타깝지만 우리의 대화는 카톡이 생기기 전 그 옛날부터 사무적이었고, 목표 지향적이었으며, 무언가를 지시하거나 정보를 전달하는 내용이었다. 엄마는 어떻게 기억할까. 적어도 내 기억에서는 그게 전부인데. 오은영 박사가 봤다면 감정에 대한 수용이 없다며 두 눈을 동그랗게 뜰지도 모를 대화 패턴이다. 아이를 서울에 보냈다고, 공부로 바쁠 것이라고, 외국으로 보냈다고, 일상 대화까지 단절되란 법은 없는데. 분명 엄마는 (그리고 아빠도) 내 시간이 금이라 생각해서 정말 필요한 말만을 고르고 골라 보냈을 것이다. 그 말은 대부분 나를 향한 기도, 추우면 추워서 더우면 더워서 건네는 걱정, 그게 전부였다. 그 마음을 알면서도 한편으로는 조금 공허했다. 부모자식 관계도 어차피 한정된 시간 안에서만 존재하는 유한한 인연인데, 우리의 추억이 좀 더 다양한 모습으로 켜켜이 쌓여있었다면 좋지 않았을까.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내가 먼저 변화를 꾀해봐도 좋을 텐데, 그냥 썩 마음이 동하질 않는다. 짝궁도 매번 나더러 엄마 나오는 드라마 보면서 혼자 와앙 울지 말고 전화를 자주하라고 하는데, 전화를 자주 할 마음은 들지 않는걸 보니 나도 내 마음을 잘 모르겠다.  




작년 여름, Paula는 내가 응급실에서 엄마를 위해 '하느님'을 불렀던 이야기를 들으며, "매우 아름다운 사랑의 장면"이라고 평했었다. 그런 게 사랑인지 잘 모르겠는데,라는 나에게 "네가 그동안 고수해 오던 너의 중요한 가치관과 신념 등을 내려놔도 괜찮을 정도로 순수한 마음에서 나온 말이잖아. 그건 사랑하기 때문에 가능한 거란다"라고 말해주더라. '사랑'이라는 거창한 단어를 쓰니 조금 쑥스러웠지만, 그 순간만큼은 엄마를 위한 마음 밖에 없었음을 다시금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불편했다. 그래서 얼마전에 Paula에게 다시 물어봤다. 나는 신을 믿지 않는 편에 가까운데, 정말 내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초월적 존재인 신을 찾는다. 그 신은 천주교의 신도 아니고, 정말 인간의 능력을 넘어선 그 어떤 존재를 찾는 것에 가깝다. 예를 들어, 엄마를 살려달라든지, 아빠의 수술이 잘 진행되게 도와달라든지, 혹은 내 힘으로 도저히 안 되는 상황에서 힘을 보태달라든지 등등 (심지어 공중 화장실이 하나도 없는 곳에서 내 장과의 사투를 벌이며 인간으로서 처참한 꼴은 보지 않게 해달라고 신을 찾은 적도 있다). 그리고 일이 마무리(?) 된 후에는 신을 찾지 않는다. 이런 내 모습이 지극히 이기적이어 보이는데, 나는 최소한 종교를 제대로 가지려면 좀 더 순수한 마음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믿는다. 근데 나는 아직 그 준비가 안 되어있다,라고. 


Paula는 순수한 마음으로 종교를 (제대로) 가지겠다는 마음 자체가 이미 순수한 것(purity)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종교를 '강요'하는 엄마를 볼 때 어떤 마음이 드냐고 물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실망"이라고 대답했다. Paula는 또 덧붙였다. 실망을 하든 이기적인 마음을 갖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고. 실망이 아니라 더한 것을 해도 괜찮다고. 내가 실망을 한 이유는 냉철하고 현명하다고 생각했던 엄마가 더 이상 그렇지 않은 것 '같다'는 내 주관적 판단 때문이 아니라, 나는 나의 세계에, 엄마는 이미 전도를 최우선시하는 그 특정 종교의 세계에 속해버린 바로 그 '사실' 때문이라고 말해주었다. 안타깝지만 어떤 종교에서는 '전도'가 최고의 덕목이며 그들이 실천해야 할 의무 같은 것이니, 엄마는 이미 그 세계에 들어갔음을 인정하는 수밖에 없단다. 아, 그렇구나. 엄마도 내가 그 세계에 속하지 않아서 속상했겠지만, 나도 엄마가 나의 세계에 속하지 않아서 속상했던 것임을 문득 깨달았다. 


Paula는 쉬지 않고 말했다. 

어떤 장면을 상상할 때 내 마음의 옹이가 풀어지고 깊은 들숨과 날숨을 내쉴 수 있을 것 같냐고. 

불안과 강박을 주로 다루고 있기에 몇 년에 걸쳐 여러 번 나왔던 질문이었고, 나도 여러 번 같은 답을 했었다. 수영장 물에 혼자 떠 있는 상상, 밴프의 루이스 레이크, 모레인 레이크, 길을 걷다 만난 이름 모를 호수들, 켈로나의 오카나간 호숫가에서 캠핑 의자에 앉아 멍 때리던 기억, 동네에서 가까운 해변에서 바라보는 바다, 섬으로 여행 갈 때 페리 뒤로 펼쳐지는 물보라들, 등등. 내 모든 기억은 물을 향하고 있었다. 고여있든 졸졸 흐르든 콸콸 휘몰아치든, 조용하면 조용한 대로 역동적이면 역동적인대로 물 그 자체가 주는 이미지가 좋았다. 역설적으로 물이 아무리 깊어도 저항하지 않고 기다리면 몸이 금세 떠오르는 것도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었다. 눈을 감고 내가 좋아하는 이미지를 상상해 보라고 한 뒤 Paula가 말했다.


"긴장으로 인해서든 분노로 인해서든 숨이 짧아지고 몸에 힘이 들어가면 네가 지금 떠올린 그 다양한 물의 이미지를 소환하렴. 지금 너에게는 물이 곧 신이야 (water is your god).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을 때 신을 찾는 것은 이기적인 모습이 아니라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이라고 생각해. 그건 특정 신을 찾아서 광명을 바라겠다는 것도 아니고, 정말 무기력할 때 도움을 구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란다. 신을 찾아서 마음이 편하다면 신을 찾아도 좋아. 하지만 신이 아닌 다른 존재가 더 큰 힘이 된다면 그 존재에게 기대렴. 신을 믿지 않는다고 너를 괴롭히는 사람에게는 끊임없이 단호하게 "No"를 외치는 수밖에 없어. 네가 싫다고 했는데도 너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은 '괴롭힘(bullying)'이라고 밖에 설명할 길이 없구나. 너의 무신론에 대해 남에게 설명할 필요도 없고 그저 단호하게 너의 boundary를 명확하게 긋는 수밖에 없어."


"나는 신을 믿지 않고 신이 없다고 생각하는 이유를 100가지도 더 댈 수 있지만, 신을 믿는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무신론을 강요하지 않는단다. 중요한 것은 신을 믿고 안 믿고 가 아니야. 필요에 의해서 신을 믿어도 아무 문제가 없어. 정말 중요한 것은 내 세계가 소중한 만큼 남의 세계도 소중히 여기고 똑같이 존중할 수 있냐는 것 아닐까.'


평소답지 않게 한참을 열변을 토하면 Paula는 마지막에 귀여운 웃음과 함께 한 마디를 덧붙였다.

"well, that's my land".      


남의 영역을 깔아뭉개지 않고도 자신의 영역을 세련되게 지킬 수 있다니. 속으로 조용히 감탄을 삼키면서 이 기분에 대한 기시감을 느끼던 중, 몇 년 전 한국의 지도교수님과 나누던 이메일이 생각났다. 


건강에 적신호가 켜지고 말았습니다, 를 말씀드리던 초여름이었다. 여차저차 한국에서 필요한 검사를 마치고 딱히 뭔가를 해야 할 단계는 아니라는 의사의 말과 함께 밴쿠버로 돌아왔을 때, 나는 그저 내 일상을 이어가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었고 간략한 근황을 선생님께 메일로 알려드렸다. 잘 돌아왔고, 조금씩 일을 시작하려 한다는. 크게 기대하진 않았지만 선생님은 진심을 꼭꼭 눌러 담아 답변을 보내주셨다. 힘들면 그만해도 된다는 말, 본인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조언과 공감으로 가득했던 메일은 내 건강을 진심으로 바란다는 기도로 마무리되었다. 너의 건강과 마음의 평화를 "나의 신"에게 빈다, 는 말과 함께. 그 말에 또 눈물이 왈칵 올라왔던 날이 있었다. 


나는 그때 이후로 누군가에게 기도에 가까운 진심을 보낼 때, "나의 신"이라는 단어를 꼭 쓰게 되었다. 타인의 행복과 안녕을 내 힘으로는 구할 수 없기에 절대자에게 빌어서까지 구해주고 싶은 마음. 하지만, 그 마음이 갸륵하다고 해서 타인에게까지 내가 믿는 것이 정답일 순 없지 않나. 그럴 때, "내가 믿는 신"이라는 표현을 써 주는 것이 타인의 세계를 존중하는 표시로서 최고의 말이라고 생각했다. 



오늘 하루 마음이 바닥으로 떨어졌을 우리 엄마. 

지금 이 순간 신의 도움이 많이 필요한 우리 엄마 (그리고 아빠도). 

몸과 마음이 의지대로 되지 않을 정도로 불안해하는 그 불쌍한 영혼에게 조속히 마음의 평화를 불러주십사, 나의 신에게 진심으로 기도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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