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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굴이 Dec 01. 2023

2023년 여름, 나의 성장기

복부비만과 빨대이론

**밀렸던 여름방학 일기를 개학 전날 밤에 쓰는 마음으로 올여름을 돌아보다 보니 글이 꽤 깁니다**


예전만큼 비가 매일같이 오지는 않지만 그래도 해는 오후 4시면 얄짤없이 지고 비가 질금질금 오는 우기가 시작되었다. 햇살이 강렬하여 블라인드와 암막커튼을 뚫고 들어오는 통에 늦잠을 자기가 쉽지 않았던 여름이 끝나고 한 해의 마지막을 앞두고 있자니 감회가 새롭다,라고 말해야 할 텐데 생각보다 별 감흥이 없다 (ㅋㅋ). 이 우기가 피부만큼 익숙해질 때면 나는 이 도시를 떠나게 될까, 머물게 될까. 만남이 있으면 이별이 있다고 하니 언젠가 Paula랑 헤어지는 날이 올 텐데, 벌써부터 못내 그날이 아쉽다.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이 막막한 불안의 저주에서 나를 구해준 한마디가 있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를 매 순간마다 상기시켜 준 Paula가 없었다면, 2023년 여름은 8년 전 여름처럼 더웠는지 추웠는지도 기억나지 않는 거대한 찰흙 토막으로 기억에 남을 뻔했다. 다행히 인간은 과거의 경험을 통해 오늘 조금 더 나은 선택을 할 능력이 있고 (있으리라 믿고 싶다), 한 번 아프지 두 번 아픈 것은 죽도록 싫었던 내 안의 어떤 부분이 기민하게 움직인 덕분에 2023년 여름의 각 면면이 어땠는지 기억에 또렷이 남긴 채 다음 해를 맞이할 수 있게 되었다. 




8월이 되자 받아놓은 시간은 끝나가고, 나는 다시 성과를 내야 하는 일개미가 되어야 했다. 9월에 가야 할 학회가 코 앞으로 다가왔지만 써 놓은 것이 없었고, 연구를 위한 인터뷰를 가기 위해서는 일찌감치 준비할 것이 많기 때문이었다. 


Paula는 약간의 우려가 섞인 눈길을 보냈지만 모든 연구 활동을 전면 중단하고 학교로부터 거리를 좀 두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던 5월과 달리 이번에는 막지 않았다. 또한 7월 말부터 서서히, full capacity로 돌아가는 계획에 대해 말이 나오고 있었기에 어느 정도 업무 정상화에 대한 생각을 마음 한편에 두고 있긴 했었다. 


완벽한 적은 단언컨대 절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텐데, 사소한 것까지 신경 쓰는 성격 때문에 한 달 내내 몸에 긴장이 들어간 것이 느껴졌다. 출국 날 아침까지 초를 다투며 글을 다듬었고, 비행 중에는 계속 발표 준비를 위해 스크립트를 짜고 PPT를 수정하면서 발표문이 입에 익도록 염불 외우듯이 중얼거렸다. 그 와중에 1시간이 넘도록 이어지는 심한 난기류를 만나 과호흡이 온 바람에 조건반사적으로 눈물을 줄줄 흘리며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비상구 좌석에서 엄마에게 안겨 얼굴이 시뻘게지도록 엉엉 우는 아기가 있었는데, 내 속눈썹도 눈물로 가득 젖은 채 그 아기랑 정다운(?) 아이컨택을 하던 기억이 난다. '너도 힘드냐, 나도 힘들다', 뭐 이러면서... 난기류가 잦아들자 다시 랩탑을 열었는데, 내 옆 좌석 승객은 마치 과제가 너무 많아서 펑펑 울다가 마지못해 다시 과제를 하기로 마음먹은 학생을 만났다고 생각했는지, 매우 측은한 눈으로 나를 계속 곁눈질하며 위로의 말을 건넬까 고민하는 듯 입을 달싹였다. 뭐... 과제라면 과제이지만, 너무 하기 싫어서 운 건 아니라는 말을 꼭 하고 싶었으나 이미 늦었다. 나는 '너무 힘들어 울지언정 일을 손에서 놓지 않는 super hard working 동양인'으로 옆 자리 승객과 그의 파트너에게 이미지 메이킹을 제대로 했기에, 비행 내내 감히 랩탑을 덮지 못했다. 


서울 한복판에 위치한 호텔 체크인을 마치고 나니 곧 자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뭐가 그렇게 불안했는지 다크서클만 조금 옅어질 정도로 눈을 붙인 후 다시 일어나서 발표 준비를 했다. 솔직히 말하면 잘하고 싶다는 마음은 치워버린 지 오래고, 그저 쪽팔리기 싫다는 마음이 지배적이었다. 모든 일이 늘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지만, 일을 겪기에 앞서 내가 해치워야 할 그 과제가 얼마나 힘든지 혹은 얼마나 쉬운지를 미리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딱 필요한 만큼의 고민과 걱정만 하고 내 애간장을 좀 덜 태울 수 있을 텐데... 


아마도 학회 참석자들 대부분이 이름만 대면 알만한 사람이라 더 긴장했을까? 숫자와 통계에 능한 사람들 앞에서 추상적인 이야기를 늘어놔야 하는 내 발표 내용에 조금 자신이 없었던 것일까? 곧 잡아서 튀겨먹을 먹잇감을 보는 눈빛으로 바라보던 우리 학과 교수들의 태도가 내 뇌리에 너무도 강하게 박인 탓일까?  모든 것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겠지만, 막상 발표장에서의 상황은 생각과 많이 달랐다. 노교수들의 따뜻한 격려와 큰 환대를 받고 나니 (나 혼자만의 착각일 수도 있다) 과하게 걱정했던 지난 3주가 조금 허무하게 느껴졌다. 아니야 - 곧이어 머리를 저었다. 어르신들의 조건 없는 따뜻함에 속지 말자. 노교수들이 대체로 온화하고 인자한 미소를 띠는 이유는 그들이 학생을 다그쳐도 소용없음을 알기에 일찌감치 포기한 탓이라 들었다. 노교수들의 발 빠른 포기가 사실인지와 상관없이, 개인적으로 어떤 퍼포먼스든 120%를 준비해서 실전에서 80% 정도 보여줄 수 있다면 정말 훌륭한 결과라 생각한다. 실전에서의 긴장, 예상치 못한 변수 등을 고려하면 늘 120%를 준비하는 것이 (준비한다고 생각하고 노력해 보는 것이) 맞다고 믿는다. 게다가 이 모든 것은 내 모국어가 아닌 영어로 이뤄지는 것이니 나의 출발선은 이미 영어 원어민에 비해 한참 뒤로 빠져있지 않은가.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긴장의 끈을 놓지 않으려 했지만, 5일에 걸친 학회는 내가 굉장히 자유로워질 수 있었던 해방의 장이었음을 깨닫는 데에는 채 하루가 걸리지 않았다. 학회란 곳이 원래 나쁜 소리도 좋게 돌려가면서 말하는 것이 미덕인 곳이라, 참석자들의 속마음을 다 들여다 봤다고 말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렇지만 마이크로 방법론에 집중하거나 그놈의 인과관계 타령 혹은 학생들의 취업 현황에만 온 정신을 집중시켜 애를 쥐 잡듯 잡는 우리 과에서 내가 받았던 인상과는 사뭇 달랐다. 숫자와 통계를 다루는 데에 누구보다 통달했을 원로 경제학자들이 오히려 거시적인 관점으로 정치학에서 다루는 현실 정치를 분석하려는 모습을 보고, 내가 속한 곳의 편협함을 다시 한번 느꼈다. 그곳에서 나는 자유로웠다. 백인 남성으로 점철되기로는 학교 내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우리 학과에서였다면, 내가 무슨 말을 할 때마다 따라붙을 날카로운 눈초리와 방법론으로 치고 들어올 질문들에 대해 지레 겁을 먹고 조금은 위축되었을 텐데, 오히려 원로 경제학자들과 있을 때에는 더 마음이 편안했다 (어차피 다시 볼 일 없다는 마음이 작용한 것일지도). 마음이 편안하니 질문이 자동적으로 샘솟았고, 목구멍에서 막히지 않고 자연스럽게 말을 내뱉을 수 있었다. 내가 잘해서 잘했다는 말을 해준 것이 아님을 안다. 나는 단지 누군가 나를 평가할 준비를 하면서 내가 입을 떼는 순간을 지켜보고 있지 않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자유로웠다. 자유로움을 등에 업고 조금씩 앞으로 나가려는 내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나는 더 이상 무언가를 입증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었다.   




Paula와 나는 여름 동안 내 삶을 움직이는 진짜 동기에 대해 긴 대화를 나누었다. 무엇이 나를 움직이는지 제대로 아는 것만으로도 불안을 상당히 줄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이가 들면 여러 가지가 아쉽고 서러워지지만, 그래도 하나 좋은 점을 들자면 나를 보다 잘 알아간다는 것 아닐까. 내가 어떤 점을 타고났고, 어떤 후천적 성격을 지녔고,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반응하고 내 방어기제가 무엇인지를 알면, 이 불확실한 세계를 조금 덜 불안하게 걸을 수 있다고 믿는다. '나는 왜 이렇지'가 아니라, '이래서 이렇구나'라고 생각의 회로가 바뀌면 나를 불필요하게 탓할 필요도 없고, 남과 비교할 필요는 더더욱 없으며,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할 수 있는 첫걸음이 된다고, Paula 앞에서 조심스레 결론 내리던 그 날이 생각난다. 


진정한 동기를 찾는 여정 중, 여름 동안의 몇 가지 에피소드는 나로 하여금 학과에 그나마 있던 정을 아주 쉽게 뗄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들과 비슷한 부류의, 인간미를 상실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들이 보는 그 편협한 세계에 같이 소속되어 있기 싫었다. 성과가 당장 나오지 않는다면 그만둬야 할 것이라는 둥, 공부가 건강을 '위협'한다면 내일이라도 그만두라는 둥, 모든 것을 근시안적인 성과 위주로 생각하는 사람과 같은 세계에 속하고 싶지 않았다. 물론 그들은 말할 것이다. 지금 내 위치에서는 그들이 보는 것을 볼 수 없다고. 이 관문은 앞으로 거쳐나가야 할 수많은 관문 중 하나에 불과한 것이며, 여기서 지체할 시간이 없다고 말하는 그 논리를 내가 모르는 바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그 길을 가기 위해서는 아주 획일화된 방식을 선택해야 한다. 나처럼 변수가 많아진 사람에게는 더 이상 적합하지 않다. 게다가, 나는 그들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길을 더 이상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바라보는 미래가 다르다는 것이 명확해지자, 그들이 맞다고 믿는 그 길을 가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버겁고 지겨웠다. 


모든 것에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을 때에는 오히려 마음이 더 복잡하더니, 아예 한쪽 문을 닫아버린 후에는 나 자신이 가야 할 길이 더 명확하게 보였다. 속은 시원했지만 한편으로는 안타까웠다. 그토록 그 누구의 삶이 아닌 나의 삶을 살자고 마음먹었건만, 나도 그들도 결국 거시적 구조에서 자유롭지 못한 한낱 개인이라는 것을 그 어느 때보다 분명히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시스템을 바꿀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시스템의 모든 면면을 다 따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이제 안다. 




5월의 어느 날, 갑자기 비행기와 숙소 예약까지 마쳐둔 학회를 가지 않는다고 하자 적잖이 당황했을 내 지도교수가 미팅을 요청했다. 해를 등지고 노천카페에 앉아 나는 그와 삶의 의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일 죽으면 오늘 무엇을 할 것이냐고 묻길래 나는 그저 오늘 내가 하기로 했던 일을 한다고 했다. 짝꿍과 운동을 갈 것이고, 써야 할 글이 있다면 그 글을 마무리할 것이고, 날이 좋다면 일하는 틈틈이 해를 쬐러 산책을 가고, 짝꿍과 간단한 식사를 만들어 먹겠다고. 그는 다시 물었다. 나의 진짜 motivation이 뭐냐고. 나는 대답했다. 나의 성장이라고. 무엇을 하든 내가 크는 것을 보는 것이 나의 궁극적인 motivation이라고 말하자, 어린아이 같이 맑은 얼굴이 사뭇 진지해졌다. 그를 만족시킬 필요는 없겠지만 내 대답이 그의 귀에 썩 아름답지 않았음을 감지했다. 나의 동기도 좋지만, 무릇 동기란 조금 더 큰 의미를 가져야 한다고. 대부분은 남을 돕거나 세상을 더 좋게 만드는 것을 동기로 삼는데, 자기는 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 데에 일조하고 싶고 그것이 그를 움직이게 만드는 원동력이라고 말하는 그 입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혼란스러웠다. 나도 그런 동기를 가져야 한다는 뜻인가.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닌데... 그리고 대체 누가 누굴 돕는단 말인가. 나는 지금 당장 나 하나 살리자고 온갖 시간과 돈을 써가며 내 자신을 아등바등 붙잡고 있는데. 그리고 동기부여란 지극히 개인적인 것 아닌가... 여러 가지 물음표가 마구 떠올랐지만 말을 아꼈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곁에서 지켜본 그는 정말 좋은 지도교수였고, 아마도 내가 만난 교수들 중에 사람에 대한 애정이 많고 가장 인간적인 사람일 것이다. 그래서 그를 알게 된 초반에는 더 혼란스러웠던 것 같다. 나와 그는 너무도 다른 것 같은데, 내가 선생이 되려면 저런 사람이 되어야 한단 말인가? 나는 그와 같은 따뜻한 심장을 가지고 있지 않는 것 같은데, 나는 저렇게 에너지가 넘치지 않는데, 나는 그가 하듯이 1년의 절반을 비행기를 타고 여기저기 날아다니면서 열정적으로 살 자신이 없는데, 등등. 지금에서야 '나는 나, 지도교수는 지도교수'라는 분리사고가 가능해졌지만, 그를 만난 첫 해에는 늘 나는 그와 같이 '훌륭한' 선생이 될 수 없을 것 같은 일말의 죄책감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 것쯤은 되어야 진정한 motivation으로 삼을만하다는 듯 들렸던 그날의 대화가 계속 마음에 남았다. 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 것 - 너무도 아름다운 명제이고 궁극적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목표로 하고 있는 부분이지만, 내가 아는 한 나의 모든 에너지는 나를 향해 있었다. 나는 나를 먼저 살리고 싶었고, 나는 늘 내가 가장 궁금했고, 나는 내가 편안해지는 삶을 살고 싶어서 갖은 애를 써가며 내 몸과 마음을 돌보는 사람이다. 바꿔 말하면, 나는 아직 타인을 살리겠다는 그 거창한 말을 할 능력도 의지도 없었고, 그럴 수 있는 날이 과연 올 지도 의문이었다. 나를 살리지 못하는데 내가 누굴 감히 살린단 말인가. 남을 위한답시고 무의식 중에 저지를 오지랖과 주접 대신에, 그 누구도 아닌 나를 명료하고도 냉철하게 바라보고 싶었다. 


여름 내내 이 길의 의미는 뭔지, 내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별 짓을 다 했다. 남들이 보기에는 팔자 좋아 보였을 지 모르겠으나, 나는 물 밑에서 미친 듯이 다리를 젓다가 쥐가 나고 말 것 같은 숨 막힘을 종종 느꼈다. 그 보이지 않는 숨 막힘을 조금 완화시키고자 책도 읽어 보고 이런 추상적인 의미 탐구를 퍽 좋아하는 일본 작가들이 쓴 책을 보면서 나의 Ikigai (일본어로 '삶의 의미'라고 함)를 찾기 위해 내 생각을 수도 없이 끄적였다. 들로 산으로 떠나면서 내 머릿속 잡음을 가라앉히고 아주 단순하게 내 마음의 정중앙을 들여다보기 위해 노력했다. 상담도 2배로 늘렸다. 학교 측의 승인을 받기 위해 내가 얼마나 '현재 정상이 아닌지'를 증명하느라 꽤나 많은 서류 작업을 거쳤다. 단순하게 말해서, 돈과 시간을 펑펑 써 대면서 그놈의 '의미'를 찾는데에 진심으로 임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의 motivation은 이 여정을 끝내 보고 싶다는 것 밖에는 없었다. 여름 내내 생각해도 내 삶을 움직이는 원동력은 타인이 아닌 나를 향해 있었다. 미약하지만 나의 성장을 보고 싶다는 것. 이 여정도 그 성장의 일환이기 때문에 꼭 마침표를 찍어보고 싶다는 것. 내가 선택한 이 길, 어쩌다 보니 꽤 길게 이어져 온 길, 중간중간 크고 작은 돌 덩어리도 있고 타이어가 터질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내가 가보겠다 선택한 이 길에서 종지부를 찍는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대단한 업적을 이룰 깜냥이 안 된다는 것은 애초에 깨달았고, 무언가 의미 있는 것을 조금이나마 이뤄보겠다는 야망도 사라진 지 오래였다. 나는 그저 나에게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내 선택에 대한 책임을 내가 지는 모습을 나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도망가지 않고 버텨내는 모습을 나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이 길에 들어설 때의 나보다는 조금은 성장해 있을 나를 보고 싶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에게 보여줘야만 했다. 나의 얄팍한 마음과 게으른 구석, 그리고 충분히 노력하지 않고 무언가를 바랐을 내 욕망 등을 누구보다 많이 봤을 사람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니까. 내가 나를 인정하는 순간을 하나라도 더 늘리고 싶었다. 그게 전부였다.


  


서울에서 학회가 끝나고, 나의 예전 선생님과 지금의 지도교수와 함께 셋이서 식사자리를 가졌다. 6년 만이었다. 셋이서 나누던 수다는 지도교수의 다음날 일정으로 인해 적당한 시간에 끝이 났고, 예전 선생님과 나는 단 둘이 밤늦도록 근황을 나눴다. 그러다가 오래전부터 정말 물어보고 싶었던 질문을 용기 내어 꺼냈다. 


나의 어떤 부분을 보고, 공부를 계속해도 좋겠다고 생각하셨냐고. 


나의 선생님은 성격 측면에서 나와 여러모로 비슷하다. 그래서 나를 더 잘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이기도 하고, 비슷한 구석이 많다는 이유만으로 상대의 이해심에 대한 기대를 과하게 가지면 실망할 위험이 있는 대상이기도 하다. 맞고 틀리고 가 분명한 나의 선생님은 나에게는 좋은 분이셨지만 간혹 마음이 여린 친구들은 그 분명한 지도편달 방식으로 인해 마음의 상처를 받기도 했다. 나도 몇 차례 묵직한 돌직구를 맞았을 텐데 크게 기억나는 것이 없는 것으로 보아, 오래전이라 잊은 건지 아니면 잊는 것이 내 정신건강에 좋다고 생각해서 잊어버렸는지, 잘은 모르겠다. 그렇게 분명하신 선생님이었으니, 제자들 중 공부를 계속하겠다고 했을 때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라는 말씀을 해주신 적도 있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몇몇 학생들은 서운해했지만, 결과적으로 보아 그들은 공부 외적인 부분에서 자신의 인생을 잘 꾸리고 있으니 선생님의 말이 맞았던 셈이다. 그래서 더 궁금했다. 매일같이 내 능력의 한계를 보면서, 내가 이것을 할 수 있는 깜냥이라 여기서 버티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내가 깜냥도 안 되는데 과한 욕심으로 버티고 있는지 궁금하던 나날들이 많았다. 능력과 의지가 훌륭한 사람들은 너무도 많았고, 나는 뭐 하나 내세울 것은 있을까 늘 의심하던 순간이 가을에 우수수 떨어지는 밴쿠버 낙엽보다도 많았다. 


항상 남의 시선 따위 신경 쓸 필요 없다고 말씀하시는 선생님이기에, 내가 선택했고 이 길에 서 있으면 되었지 이제 와서 본인의 생각이 뭐 중요하냐고 되물으실까 봐 얼른 말을 덧붙였다. 그냥, 내가 자기 확신이 조금 없을 때에는 나를 믿어주는 사람들의 확신을 빌어서라도 구멍 난 자기 확신을 조금 메우고 싶어 진다고. 내가 그런 여름을 보낸 모양이라고. 선생님은 별말씀 없이 듣다가 툭 한 마디 던지셨다. 나는 네가 당연히 잘 버틸 거라고 생각했는데?  


선생님은 그날 아주 흥미로운 빨대이론을 만들어 내셨다.  

이 길고 지난한 여정은 빨대처럼 좁고 가느다란 통로 같은 건데, 체형에 따라 이 여정을 잘 통과하는 사람이 있고 중간중간 턱턱 걸리는 사람이 있다고. 안타깝게도 복부비만을 가진 사람들이 그 유형인데, 이 빨대는 항상 언제든지 나갈 수 있는 비상구가 있는 특이한 구조라 복부비만으로 크게 고통받는 사람들은 언제고 그 문을 열고 나가면 된다. 빨대가 얼마나 비합리적으로 만들어졌는지에 대해 논하면 끝도 없지만, 이 빨대는 오래전부터 내려오던 것이고 한 개인이 바꾸기 힘든 것이니, 열통 터지지만 개인에게 주어진 선택은 오직 두 가지 - 통과 혹은 통과하지 않기 - 밖에 없단다. 다만, 이 빨대를 통과하고 나면 넓고 넓은 바다 같은 곳이 펼쳐지는데, 그곳에서는 비로소 자유를 만끽할 수 있고 내가 원하는 언더더씨 생태계를 골라서 살면 된다고. 문제는 언더더씨 생태계에 입성하기 위해서는 빨대를 통과한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면허증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통과 혹은 통과하지 않기'라는 이분법적 선택 외에는 개인이 취할 수 있는 길은 없다고. 


이 '빨대'를 잘 통과하는 '체형'을 가진 사람들은 대체로 성격이 예민하지 않고 생각을 많이 하지 않으며 기계적으로 살아가는 삶에 익숙한 사람, 등등으로 몇가지 특징을 정리할 수 있단다. 안타깝지만 복부비만을 가진 사람들은 (참고로, 실제 복부비만과 1도 관련이 없다) 빨대를 통과하면서 굴곡진 부분에서는 덜 스무스하게 넘어갈 것이고, 빼빼로 체형을 가진 자들에 비해 부딪히거나 걸리는 곳도 많을 것이다. 한 가지 다행인 사실은, 조금 우여곡절을 겪더라도 일단 빨대를 통과하기만 하면 언더더씨 생태계에서는 아무도 복부비만으로 뭐라 하지 않는다는 점. 아니, 오히려 복부지방으로 인해 더 큰 부력을 가질 수 있으니 더 잘 살지도 모른다. 문제는 결국 이 놈의 '빨대'인 것이다. 


선생님은 나를 보며 가만히 말씀하셨다. 그 '빨대'를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몇 가지 자질을 갖춰야 하는데, 본인은 내가 그 자질을 잘 갖췄다고 생각했다고. 뭐, 복부비만은 좀 안타깝지만, 이 여정을 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버티는 힘이 있어야 하고 나에게 그 힘이 있다고 생각하셨기에 계속 공부를 해도 좋겠다고 믿었다고. 물론, 이 '빨대'에도 항상 비상구가 존재하니 내가 원하면 언제든 그 문으로 나갈 수 있다고 강조하셨다. 그러고 보니 내가 밴쿠버로 오기 전 선생님과의 마지막 식사에서 신신당부하시던 말씀이 생각났다. 가서 열심히 잘해라는 말과는 거리가 한참 멀었다. "언제고 힘들면 그만둬도 괜찮아." 그리고, 2년 차의 어느 겨울, 내가 나를 짓누르는 무게가 너무 버거워 결국 펑펑 울고 만 그 날, 선생님은 전화기 너머 한참을 깔깔 웃으시다가 다시 말씀하셨다. "많이 힘들면 언제든 그만해도 괜찮아." 4년 차를 마치고 의사도 잘 모르는 면역 질환이 생겨버렸다고 선생님께 말씀드린 날, 본인의 이야기를 공유해 주시며 덧붙이셨다. "힘들면 그만해. 죽을 만큼 힘들여가면서 해야 할 필요는 없는 일이야." 

  

처음엔 힘들면 그만하라는 그 말에 오히려 오기가 생겼었다. 하지만 연차가 더해질수록 (어쩌면 내가 진짜로 힘이 들고 지쳐서), 힘들면 그만하라는 말씀이 진심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빨대'에는 늘 비상구가 존재하니까 언제든 그 문을 열고 나가면 된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신 것이었다. 힘들면 그만해도 괜찮다. 세상 그 어떤 일도 스스로에게 비가역적인 상처를 안겨주면서까지 해야할 일은 없다고. 다만, 본인이 살면서 버거운 순간을 맞이할 때 항상 이 선택은 본인의 결정이었음을 떠올리면 그 버거움을 한 줌 내려놓을 수 있었다는 말을 덧붙이셨다. 이 길에 들어온 것도 이 길에 남아있기로 선택한 것도 나 자신이고 타인에 의한 강요가 아니라고. 늘 그만두거나 다른 길을 가겠다는 결정을 할 '선택지'는 내 손에 있다고. 모든 것이 내 손에 달려있음을 인지한다는 것은 꽤 강력한 마인드셋일지 모른다. 어차피 내일이라도 힘들면 그만둘 텐데 오늘은 그냥 오늘의 일을 한번 해 보지 뭐, 하는 가벼운 마음을 갖는게 조금은 쉬워지니까. 

 

빨대 이론을 재미있게 듣다가 내가 '복부비만'을 가진 체형이라는 사실에 잠시 울컥했지만, 곧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선생님, 저는 그만두고 싶었던 적이 없어요. 요즘 주변에서 그만두고 싶냐는 질문을 많이 하는데, 저는 그냥 이 길을 끝내고 싶을 뿐이에요. 지금은 그게 전부에요. 게다가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은 몸이 안 좋아졌을 때에도 한 적이 없는걸요. 남을 돕는다거나 세상을 이롭게 만든다는 식의 동기부여는 저에게 너무 버겁고요, 저는 그런 사람도 아니에요. 저는 그저 제가 선택한 이 길에 종지부를 잘 찍고 싶은 마음, 그것 뿐이에요.' 선생님은 내 이야기를 가만히 듣더니 끝내고 싶다는 마음 하나 만으로도 너무나 훌륭한 동기라고 말해주셨다. 자기를 돕지 못하는 사람은 남을 도울 수 없다고. 내가 홍익인간의 정신을 가진 지도교수의 동기부여를 듣고 혼란스러워하다 조용히 내린 결론과 같은 말이 나오는 그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학회에서 느꼈던 해방감과는 또 다른 종류의 해방감이 마음 속 어딘가에서 올라왔다. 


아이러니하게도 올해 늦봄 번아웃이 막 시작되려는 그 때, 나는 선생님을 떠올렸다. 미주알 고주알 알리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간간히 중요한 소식은 알려드렸고,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하라고 해주셨기에 며칠 고민하다 '도움'을 요청했다. 그 때의 내 마음으로는 나보다 이 '빨대'를 먼저 통과한 사람들이 어떤 마음가짐으로 이 길을 마쳤는지 듣고 싶었던 것 같다. 선생님께도 본인이 학생이었을 때의 이야기를 좀 들려주십사 이메일을 드렸는데, 예상치못한 대빵 짱돌에 쳐 맞고 떡실신한 기억이 난다. 선생님은 모르셨을 것이다. 본인의 말 한마디가 이 여름의 "liberty clinic"을 시작하게 된 계기라는 것을. 그 말 한마디가 하루아침에 누군가의 의지를 훅 꺼뜨릴 만큼 위력이 강했다는 것을.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문제는 그 말 한마디가 아니었다. 언젠가 겪어야 했을 과정이고, 한 번은 당면했어야 할 질문들이었고, 그 누구도 아닌 내가 답에 대해서 진심으로 생각해봐야 했을 시간이었다. 선생님의 말은 그저 (강력한) 촉매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테다. 때문에 이번에 서울에서 만났을 때도 그것이 시작이었노라고 감히 말하지 않았다. 그때의 내 마음은 너무도 연약하여 순두부 같은 상태였을 것이고 평소라면 아무렇지 않게 넘겼을 그 말 한마디가 지나치게 크게 다가 왔었기 때문에. 결국 내 마음의 문제이지 않았을까. 




빨대 이론은 차마 이야기가 너무 길어 다 전달하기 못했지만, 서울에서의 학회, 인터뷰, 작년 여름 큰 수술 이후 처음 방문하는 부모님 댁, 급하게 결성한 부모님과의 오키나와 여행 (가이드로 부모님을 모시는 것이 쉽지 않았다) 등등을 다 들은 Paula는 자기가 생각했던 것 보다 한국에서 긍정적인 시간을 보낸 것 같다며 운을 뗐다. 무엇보다 학과에서의 경험과는 180도 다른 경험을 한 것에 진심으로 기뻐해주었고, 내가 여러모로 자신감을 되찾은 것에 흡족해하는 얼굴이었다. 


4.5개월 전의 나와 비교했을 때, 에너지가 많이 안정된 것 같고 자기 확신이 커졌으며 자기가 가야 할 길을 비교적 명확히 알고 있는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바이브가 보인다고 했다. 뭐 그렇게까지 엄청나게 긍정적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내 마음이 몇 천 미터 상공 위의 구름다리처럼 흔들리는 느낌은 없어졌다고 말해줬다. 그리고 항상 스스로에게 갖던 회의감도 많이 옅어졌다고 말했다. 항상 내가 얄팍한(?) 질환 뒤에 숨어서 자기 합리화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더 열심히 더 노오력해야 하는데 그럴 시기를 놓치는 것은 아닌지, 결국 내가 게을러서 혹은 약해 빠져서 더 잘할 수 있는 기회를 박차고 여기서 멈추는 것은 아닌지, 등등의 질문은 늘 마음 한 켠을 차지하고 있었고, 나는 대차게 "아니요"를 외치지 못했다. 정말로 그럴까 봐. 


그럴 때 Paula가 해준 말이 있었다. No pain, no gain이라는 말이 성립될 때도 있지만, 나에게는 아니라고. 무언가 더 열심히, 더 힘들게 하지 않아서 성장을 못 이루지 않나, 하는 생각은 나에게 적용되지 않는다고 해주었다. 나의 10대과 20대에는 그것이 훌륭한 '성공' 전략이었겠으나, 더 이상은 그 전략이 통하지 않음을 인정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캐나다에서 살고 있는 30대의 나는 이제 다른 전략이 필요하다. 스스로를 몰아붙이지 않는 마음가짐과 이를 실천하는 것이 나의 성장과 직결된다고. 학위 논문을 쓰면서 이 부분도 같이 '성장'하길 바란다고. 이 과정이 단순히 논문을 쓰고 학위를 받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spiritual journey임을 잊지 않길 바란다고. 그게 나의 진정한 성장이라고 강조했다. 


비행기에서 난기류를 만나 눈물을 줄줄 흘려야 했고 과호흡이 왔을 정도로, 그리고 겨울을 바라보는 이 시점에도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오면 예전보다 과하게 불안을 느낀다. 이 '불안'이 예전보다 내 몸과 마음에 좀 더 찐득하게 붙어있으면서 그 존재감을 자주 드러내는 듯 하다. 짧게는 작년 겨울부터, 아니 어쩌면 밴쿠버에서 지냈던 세월 동안 시나브로 불안이 커지다 못해 내 몸과 마음에 스키드 마크를 남길 때까지 나는 몰랐던 것 같다. 나의 고통에 참으로 무뎠던 대가는 생각보다 컸고, 그 불에 탄 자국 같은 부분이 없어질지도 잘 모르겠다.    


그래도 이건 내 선택이니까. 내가 이 여정을 끝내보기로 했으니까.

복부비만을 좀 줄이면서 빨대를 통과해 보면 물고기도 있고 인어도 있고 조개도 주울 수 있는 언더더씨 나라가 펼쳐지지 않을까. 그 시점에서 오늘을 돌아보면 정말 넓은 바다에 뽕 하고 뚫린 빨대 구멍 하나가 보일 테지. 내가 거기서 나왔다는 사실조차 언젠가는 잊고, 나중에는 이 모든 것이 다 별거 아닌 일이 될 거야. 용왕이 될 필요도 없고 인어공주가 될 필요도 없이, 그냥 나에게 주어진 가리비 껍데기 혹은 해초에서 나만의 영역을 가꾸며 잘 살 수 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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