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무랑 오이랑 상추랑 얼갈이배추랑 애호박도요.
텃밭이라니. 처음에는 정말 관심이 1도 없었다.
본인들이 사는 집의 베란다를 점령하다 못해 거실까지 밀고 들어온 화분들을 뿌듯하게 바라보는 엄마아빠 앞에선 차마 말하지 못했지만, 나는 식물에 큰 애착이 없었다. 정수한 수돗물도 아니고 무슨 돌덩이들을 넣어서 미네랄 함유량을 높였다는 물을 정성스레 화분에 부어주는 엄마를 보면서, '그렇게 좋다면 저것은 식물이 아닌 내가 마셔야 할 물 아닌가' 라는 생각을 했을 정도로.
그랬던 내가 흙에 식물을 좀 심어보기로 한 것은 순전히 짝꿍의 설득과 밴쿠버의 비싼 깻잎 값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곳에는 꽤 규모가 큰 community garden이 있는데, 거주자들은 소량의 금액을 내고 한 뙈기 텃밭을 받을 수 있다. 이것도 인기가 많아서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반년 가까이 기다려야 한다나. 이사온 해 여름, 내년을 기약하며 이름을 올려놓자는 짝꿍의 말에 건성으로 그러자고 대답했다. 각 plot이 별로 커 보이진 않아서 해바라기나 몇 송이 심으면 끝나겠다고 생각하며.
비가 점점 잦아들던 4월 어느 날, 우리가 드디어 작은 한 뙈기밭을 분양(?) 받게 되었다는 이메일이 왔다. 잔뜩 신난 짝꿍은 뭘 심을지 진지하게 고민을 하기 시작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칠리왁 어딘가에 대 농장을 소유한 농부의 아들 같았다. 그의 희망찬 눈을 보며 나도 이 한 뙈기밭을 깻잎 숲으로 만들고 말겠다는 원대한 계획을 세웠다. 아마도 손바닥보다도 작은 깻잎을 20장 남짓 넣어두고 쌀 때는 4-5불, 비쌀 땐 8-9불까지 호가하는 밴쿠버 깻잎 싯가를 보고 분노에 찼던 것이 틀림없다. 꽃을 심는 밭도 많았지만 우리는 철저히 자급자족의 삶을 실현하기로 했다. 네모 반듯한 plot에 구역을 나눠가며 상추도 심어야 했고, 잘 자란다는 열무도 심기로 했다. 혹시 모르니 코스트코에서 싸게 파는 방울토마토와 바질 모종도 갖다 심어 보기로 한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1도 모른 채.
경험자의 조언을 아무리 많이 들어봤자 초심자의 시행착오란 피할 수 없는 운명 같은 것인가 보다. 나는 타이슨의 저 위대한 명언 - 링 위에서 쳐 맞기 전까지는 모른다 (everyone has a plan until they get punched in the mouth) - 을 참으로 좋아하는데, 좋아한다고 해서 내가 그 명언을 비껴갈 순 없는 법.
마침 친하게 지내던 친구네 부부가 1년 먼저 텃밭을 일구고 있었기에 여러 가지 조언을 구할 수 있었다. 어느 정도 간격으로 작물을 심어야 하는지, 주의사항은 무엇인지 등에 대한 경험담을 듣고, 우리는 부푼 마음으로 기초 작업을 시작했다. 혹시 있을지 모를 외부의 습격을 막을 요량으로, 닭장용 알루미늄 펜스를 샀다. 높이는 성인 남자의 허벅지 중간에 올 정도였는데, 이 정도면 어지간한 형태의 습격(?)을 막을 수 있다고 믿었다. 큰 오산이었다. 왜냐하면 허접한 닭장용 펜스 정도로는 몸에 근육이 가득한 청설모와 아무거나 다 주워 먹는 라쿤을 막을 수 없었고, 날개 달린 짐승들의 서리도 막을 수가 없다. 사실 우리가 닭장용 펜스를 치자고 마음을 먹은 이유는 동물로부터 우리의 식량이 되어줄 식물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악명 높은 중국인 아줌마들의 서리를 막기 위해서였다. 뭐, 결론부터 말하자면 닭장용 펜스는 없는 것보다는 나았지만 대륙의 마인드를 지닌 아줌마들과 에너자이저 같은 아이들의 습격을 막아주진 못했다. 여하간 닥쳐올 일은 알지 못한 채, 우리는 plot 주위로 듬성듬성 말뚝을 박고 돌돌 말려 있던 알루미늄 펜스에 손가락을 찔려가며 평탄화 작업을 거친 후, 말뚝 주위로 펜스를 팽팽하게 둘러친 다음 케이블 타이로 꽁꽁 묶었다. 허술하지만 남는 펜스 쪼가리로 문도 만들었다. 하루에 2시간, 꼬박 이틀간 작업을 하고 나는 노동의 참맛을 느끼며 꿀잠을 잤다. 불면증에 가드닝이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이야.
다음날 허벅지의 근육통을 고스란히 느끼며 고랑을 예쁘게 판 후 상추 씨앗을 뿌렸다.
정말 말 그대로 고랑을 예쁘게 파기만 하고 상추 씨앗도 심는 게 아니라 뿌리기만 했다. 초심자 생각엔 고랑이 열과 행으로 잘 자리 잡고 있기만 하면 된다고 믿고 고랑 사이 간격을 크게 벌릴 생각을 못 했는데, 이러면 나중에 사람이 들어가서 잡초를 뽑거나 수확을 하기가 힘들어진다. 이런 일을 알 턱이 없는 나는 고랑 간격을 벌리고 자시고 하기 이전에 심지어 상추씨앗 봉투를 뜯다가 쏟았기 때문에 씨앗은 뿌려진 것이 아니라 던져졌고, 그냥 먼저 자라 나오는 놈만 키우기로 했다. 그러다 보니 나중에 민들레 홀씨 같은 싹이 상추의 꼴을 갖추기 시작했을 때, 한 뙈기밭에 있는 상추만 25 포기가 넘었다.
깻잎은 한인 농장에서 모종을 구해다 심었다. 역시나 아무런 감이 없었던 나는 깻잎도 사이좋게 지내라고 각 모종을 서로 가까이 심어버렸고, 나중에 깻잎 숲이 우거졌을 때에는 안쪽에 있던 깻잎에게 당최 다가갈 수가 없을 정도로 고랑의 간격이 좁았다. 그 와중에 또 이것저것 다 해 먹어보겠다고 방울토마토와 딸기도 심었는데, 딸기는 열리자마자 벌새며 청설모가 달려들어서 건드리는 통에 제대로 열매를 맺기 어려웠다. 원래 자연은 동물의 것이니 사람 주제에 동물에게 '빼앗겼다'는 생각을 하면 안 되는 것이지만, 이제 겨우 불그스름하게 익어서 딸기의 꼴을 갖춘 열매를 딱 한 입 먹고 맛이 통 없어 (아직 덜 익었는데 맛이 있을 턱이 있나!!) 땅에 버리고 간 만행을 여러 날 겪으면, 내 이놈의 털뭉치들을 잡아다가 딸기 값을 받고야 말겠다는 생각을 안 할 수 없게 된다. 결국 딸기는 한 달 정도 지켜보다가 개미가 꼬이자 뽑아버렸다. 방울토마토와 일반 토마토는 그나마 좀 버틸 수 있었고 꽤 잘 자랐다. 본격적으로 폭염이 시작되면서 토마토는 새빨갛게 잘 익어갔고, 너무나 당연하게도 청설모들은 우리 밭을 자주 방문했다. 딸기를 통해 어느 정도 단련이 되었던터라 마음을 내려놓았지만, 여전히 씹다 버린 열매를 마주하는 것은 은근 부아가 치미는 일이어서 방울토마토에 치약을 뿌릴까, 하는 생각도 했더랬다. 이웃 Plot owner들이 오며 가며 칭찬할 정도로 토마토가 많이 열렸지만 첫 해 온전히 내 입에 넣을 수 있었던 방울토마토는 고작 5-6개에 지나지 않았고 일반 토마토도 3-4개 남짓이었다.
그래도 첫 텃밭 가꾸기라 그런지 내 새끼 키우는 심정으로 하루 2번씩 꼬박꼬박 들여다보고 물을 주었다. 행여나 새싹이 힘들까 정말 열심히 잡초를 뽑았다. 화학 비료를 쓰지 말라고 해서 (plot을 받을 때 계약서 내에 화학 비료를 사용할 수 없다는 조항이 있다), 유기농 비료를 구해다 물에 희석시켜 뿌려주었다. 혹시 마주치는 까마귀나 청설모가 있으면 저리 가라고 협박 아닌 협박을 했다. 울타리를 치고 씨앗을 뿌리고 모종을 심은 것이 5월 초였는데 한참 더디 자라는 것 같다가 어느 날 갑자기 텃밭이 상추 숲으로 변해버린 것은 6월이 채 지나가기 전이었다.
조막만 한 땅에 상추가 20 포기 가량 있으면, 3-4일에 한 번씩 상추를 수확하고 그걸 씻어서 정리하는 데에 1-2시간이 걸린다는 걸 몰랐다. 깻잎도 4그루나 있었지만 그나마 좀 괜찮았다. 왕창 따서 장아찌를 담가버리면 되니까. 하지만 상추는 차원이 달랐다. 상추와 깻잎을 먹기 위해 고기를 사고 신나게 삼겹살을 구워봐도, 돌아서면 상추는 미친 듯이 자라 있었다. 친한 사람들에게 채소를 나눠주기 시작했다. 손이 크다는 오해(?)를 받기 좋은 경험이었다. 상추와 깻잎을 제일 큰 지퍼백에 가득 채워 두 팩씩 전달해야 했으니까. 나중에는 그다지 교류가 없던 지인에게도 안부를 묻는 척하며 상추와 깻잎을 투척했다. 진짜 미친 듯이 자랐다.
그러던 와중에 동네를 누비는 무법자 중국인 할머니 무리와 교우를 하고야 만 사건이 있었다. 전체 community garden의 규모가 꽤 되었는데 (plot이 60개 정도 된다), 우리처럼 열심히 채소를 기르는 집도 있지만 씨앗만 뿌리고 방치하는 집도 꽤 되었기에 무주공산이나 다를 바 없는 plot이 꽤 많았다. 즉, 씨만 뿌려놓고 관리 및 수확을 하지 않는 텃밭이 적지 않다는 뜻이다. 게다가 우리가 지내는 곳은 학교 부지에 위치한 가족 단위의 기숙사이긴 하지만, 주변에는 민간 건설사에서 지은 콘도 및 하우스가 많았기에 학교 건물과 민간 주택이 섞여있는 모양새였다. 한국처럼 엄격하게 '들어오지 마시오'라는 팻말이 있는 것도 아니고, community garden은 말 그대로 'community'라서 외부인의 접근을 막을 방법이 없다. 사실 이렇게 빡빡하지 않은 분위기를 더 선호하긴 하지만, 막상 내 '재산상의 피해'가 발생하자 손해 보기 싫어하는 한국인의 기질이 발휘되었다.
텃밭메이트인 친구네 부부에게 듣기로, 매일 엄청나게 큰 복실이 강아지를 데리고 가든을 방문하는 중국인 할머니가 있단다. 기숙사는 애완동물을 기를 수 없기 때문에 주변의 민간 주택에 사는 사람이 틀림없었다. 보아하니 영어는 한 마디도 못하는 것 같은데, 주로 가든에 사람이 없을 애매한 시간 혹은 밤에 들러서 신선한 채소를 훔쳐가거나 흙을 퍼 간다는 것이다 (화학 비료를 쓰지 않아 토질이 좋다고 소문이 났다나 어쨌다나). 어차피 community garden이니 좀 가져가면 어떠냐,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애지중지 기른 채소를 몰래 훔쳐가는 것도 모자라, 급하게 훔치다가 채소 뿌리나 가지에 상해를 입히거나 조금 더 익혀서 따려고 생각했던 성인 남자 주먹만 한 토마토가 한밤 중에 없어지는 걸 몇 번 경험하면, 중국인 할머니에게 뾰족한 눈길을 보낼 수밖에 없다. 종종 동료 중국 할머니들과 가든의 벤치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발견되었는데, 막상 내 눈앞에서 훔쳐가는 모습을 들키는 것은 아니라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때는 7월 어느 여름날.
텃밭메이트인 친구는 텃밭을 바로 위에서 내다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콘도의 3층에 살고 있었는데, 그 거리와 높이는 그의 텃밭과 내 텃밭에서 일어나는 일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깝고 정확했다. 어느 날 이른 오후, 무심결에 창문 너머로 텃밭을 확인하던 내 친구는 복실이네 중국할머니의 친구인 분홍 꽃모자 중국 할머니와 그의 어린 손자가 나의 깻잎을 격하게 뜯고 있는 장면을 보고야 말았다. 급하게 카톡 메시지가 왔고, 언제고 현장을 급습하려고 벼르고 있던 나는 하던 일을 멈추고(재택근무 중이었다) 즉시 출동했다. 당시 가든을 가로질러 보무도 당차게 걸어오던 내 모습을 자기 집 창문 너머로 지켜보던 친구네 부부는 나에게서 약간의 걸크러쉬를 느꼈다며 엄지 척을 날려주었다.
휘뚜루마뚜루 뜯겨 있는 내 깻잎을 보고 분기탱천하여 (곱게나 뜯어가지), 나는 분홍 꽃모자 할머니에게 방금 내 깻잎에 손을 댔냐고 물었다. 할머니는 중국말로 무언가를 설명했지만, 나는 중국말을 할 생각이 1도 없었다. 그의 어린 손자가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고 중재를 시도했다. 아이는 세계화 시대에 준비된 시민답게 영어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다. 어린아이에게 이런 일을 겪게 해서 미안했지만, 나는 '네 것도 내 것, 내 것도 내 것'이라는 그들의 대륙 마인드에 동의할 수 없었다. 방금 한 행동은 '절도'에 해당되니 자꾸 이런 일이 반복되면 경찰을 부르겠다는 말을 할머니에게 전달해 달라고 어린 손자에게 부탁했다. 분홍 꽃모자 할머니는 쏘리쏘리를 염불 외우듯 있었고, 어린 손자는 자기가 예전에 텃밭을 가꾼 적이 있다며 사실 그 깻잎은 자기 친구의 텃밭에서 딴 것이라는 맹랑함을 보였다 (요것 봐라?) 나는 '중국인인 자네가 깻잎 맛이 뭔지나 아냐'고 친절히 물어보려다가 중국인이지만 드물게 깻잎을 즐길 수도 있으니, 남의 물건에는 손을 대면 안 되는 것이라고만 말해주었다. 돌아오는 길에 흘깃 올려다보니, 인간 파놉티콘으로 활약하던 내 친구네 부부가 창문에 매달려 입을 쩍 벌리고 바깥 사정을 살피고 있었고, 그들과 함께 있는 카톡 단톡방은 메시지로 터져나가는 중이었다.
사실 분홍 꽃모자 할머니에겐 조금 너무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사전에 양해를 구하지 않았을 뿐이거늘 그냥 홍익인간의 마인드로 깻잎 몇 장 좀 주면 되는 것을... 다만 나는 분홍 꽃모자 할머니가 복실이네 할머니랑 같이 다니는 것을 여러 번 봤기 때문에, '저 가든에 깨물 준비가 되어있는 미친 한국 X이 있다'는 정보를 복실이네 할머니에게 전달해 주길 바라는 마음이 더 컸다. 복실이네 할머니는 정말 과장 보태지 않고 매일같이 들러서 남의 밭에서 파도 뽑아가고 상추도 뜯어가고 토마토도 따서 슥슥 닦은 다음에 먹고 잘 관리된 밭에서는 흙도 퍼가는데, 이것도 공동체 정신으로 봐줘야 한단 말인가?
이 사건 이후 나의 바람이 통했는지 중국인 할머니들은 모임의 장소를 다른 곳으로 옮긴 듯 보였다. 한 동안 발걸음이 뜸했고 복실이도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씹다 버린 방울토마토를 이틀에 한번 꼴로 발견하며 그 이빨 자국이 사람의 것이 아니라 털뭉치 다람쥐의 것임에 안도(?)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인간 파놉티콘으로부터 우리 집 깻잎 나무들이 (그렇다, 나무가 되었다) 테러를 당하고 있다는 실시간 제보가 들어왔다. 파놉티콘의 위치에서 최대한으로 카메라를 끌어당겨 찍은 사진에는, 성인의 키만큼 훌쩍 자란 깻잎의 윗부분이 많이 꺾여 있었다. 인간 파놉티콘의 말로는 사내아이 둘이서 긴 장대로 깻잎을 후드려 팼단다. 이번에는 나보다 짝꿍이 먼저 신발을 구겨 신고 있었다. 사실 커뮤니티 가든 페이스북 페이지에는 심심치 않게 '누구네 텃밭이 짓밟혔네', '나무가 꺾였네', '뭐를 다 따 먹었네', 하는 글이 올라오던 참이었다. 물론 모든 '테러'가 중국인의 소행은 아닐 것이며, 아이들이 놀다 보면 크고 작은 사고가 생길 수 있다는 점을 잘 안다. 하지만, '아이들이 놀다가 그랬는데 뭘 그렇게 화를 내냐'는 적반하장식 태도를 보이는 사람은 이곳에도 없지 않아서, 페이스북 페이지에서는 가끔 설전이 벌어지곤 했었다. 우리도 사실 누가 깻잎이든 방울토마토를 따 먹든지 상관없었다. 다만, 나는 내가 정성으로 키운 내 작물에 대한 예의를 좀 보여주길 바랐다. 우리 텃밭에서 무언가를 가져가고 싶으면 나눠달라고 요청할 수 있는 기회는 많았다. 페이스북 페이지도 있고 하루 2번씩 가든에 꼬박꼬박 나가서 작물을 관리하는 우리를 만나기란 어렵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내 짝꿍은 중국인들의 '네 것도 내 것, 내 것도 내 것' 정신과 아이들의 모험정신, 그리고 부모들의 적반하장에 진절머리가 났는지, 이번에는 제 손으로 현장을 급습하겠다며 바람같이 뛰쳐나갔다.
짝꿍이 보내준 사진은 처참했다. 깻잎 3그루 윗부분이 전부 후려치기를 당해서 다 꺾여 있었고 가지가 많이 상했다. 씩씩 거리다가 나도 나갈 채비를 하던 찰나, 짝꿍으로부터 범인을 잡았다는 연락을 받았다. 잉? 나간 지 10분도 안 되었는데 이렇게 빨리??
짝꿍이 들려준 전말은 이러했다.
파놉티콘 텃밭메이트가 창문 너머 (몰래) 찍어준 사진의 화질이 썩 좋진 않았으나 사내아이 둘의 인상착의 정도는 파악할 수 있는 해상도였다. 짝꿍이 텃밭에 도착했을 때 개구쟁이들은 이미 달아나고 없고, 동네 꼬마아이들이 한 무리 놀고 있더란다. 짝꿍은 텃밭메이트가 찍어준 사진을 들고 한 무리의 아이들에게 사진 속 개구쟁이들이 누구인지 물어봤다고 한다. 그때만 해도 아이들을 잡을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을 하지 못한 채 밑져야 본전이라는 마음으로 물었던 건데 (솔직히 잡는다 한들 뭘 할 수 있겠는가), 갑자기 한 무리의 꼬마아이들이 우르르 일어나더니 다들 입을 모아 범인이 누구인지 안다며 길을 안내해 줄 테니 얼른 가보자고 하더란다. 그렇게 5-6명 남짓되는 일군의 아이들이 이끄는 대로 짝꿍은 발걸음을 옮겼고, 한 블록을 지날 때마다 5-6명의 아이들이 어디서 나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추가로 행진에 동참하였다. 이윽고 범인으로 추정되는 아이들이 사는 집 앞에 도착했을 때에는 족히 15명이 넘는 아이들이 짝꿍 주변을 에워싸고 있더란다 (family residence라서 아이들이 동네를 뛰어노는 지역이긴 하다). 건장한 성인 남성이 피리부는 사나이가 되어 동네 꼬마 15명과 함께 자기 집 문 앞에 서 있는 모습을 보고, 범인 1의 어머니는 적잖이 놀랐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당신의 아이가 깻잎을 반 죽여놨다고 친절히 알려줬고, 이런 일이 다시 발생하지 않게 잘 타일러 달라고만 말하고 돌아서던 찰나, 범인 1은 자진해서 범인 2의 이름을 불었다. 졸지에 짝꿍은 16명 (15명 + 범인 1) 아이들의 기대에 찬 눈빛에 못 이겨 범인 2의 집으로도 떠 밀려가야 했다. 범인 2의 어머니는 꽤나 시큰둥한 반응이었다는데, 그것과 별개로 범인 1과 범인 2는 서로를 마주치자마자 '쟤가 먼저 시작했어요'를 시전 하며 퍽 얄팍한 우정을 보여주더란다. 피리 부는 사나이가 된 경험도 웃기고, 애들은 애들인지 혼날까 봐 무서워서 친구 핑계를 대는 것도 귀엽고 해서 '우리가 소중히 키운 작물인데 그렇게 처맞는 걸 보면 마음이 아프단다'는 말을 잘 전달한 후 짝꿍은 귀가했다. 15명의 무리 중 한 아이는 집으로 가려는 짝꿍에게 '동의 없이 찍은 사진은 곤란할 수 있으니 삭제하는 게 좋겠다'는 똘똘한 말까지 잊지 않았다고 한다.
우여곡절이 심했던 1년 차의 텃밭 경험은 엄청난 열무 씨앗을 수확하는 것으로 잘 마무리되었다. 다른 밭도 종종 해바라기 테러가 일어나 페이스북 페이지가 시끄럽긴 했지만, 나는 중국 할머니들이 서리를 멈췄다는 것에 만족했다. 2년 차의 텃밭은 나와 짝꿍이 한국에 다녀오는 바람에 꽤 늦게 시작했다. 이번에는 늦기도 했고, 직파법은 꽤 수고롭고 더딘 일이라 치트키인 모종으로 승부를 보자는 마음을 먹었다. 한인 농장에서 모종을 잔뜩 사서 훨씬 넓어진 고랑에 듬성듬성 심었다. 땅이 좋아 작물들은 무럭무럭 자랐다. 이번 해에도 나의 욕심히 과했는지 여름 내내 상추와 깻잎을 먹기 위해 고기를 사다 날랐지만 역부족이라 이웃에 강제로 채소 더미를 안겨주었다. 오이와 고추도 시도했는데, 열매가 맺히는 것들은 서리의 대상이 되기 쉬우니 청양고추를 가장 바깥에 심고 (매운맛을 보여주겠어), 오이는 안쪽에 심었다. 열무는 1년 차에 수확한 씨앗을 직파하였고 잘 자라준 덕분에 이모작이 아니라 사모작까지 하는 기염을 토했다.
3년 차인 올해에는 커뮤니티 가든 전체에 대대적인 공사가 있었다. 하여 우리가 쳐놓은 닭장 펜스도 철거되고, 모든 plot이 대대적으로 개보수 작업에 들어갔다. 다행히 작년처럼 여름이 엄청 늦게 시작한 것은 아니라 (5월 폭염 덕을 본 것 같다), 일찌감치 각종 모종으로 밭을 채웠고 지금껏 자급자족 작전을 잘 수행하고 있다. 올해는 애호박, 얼갈이배추까지 추가했는데, 꿀벌이 옆 밭 일반 호박이랑 우리 밭 애호박을 오가다가 접붙이를 해 버렸는지 애호박의 크기는 성인 남성의 팔뚝을 넘어서고야 말았다.
3번의 여름을 거치면서 가드닝이 나에게 준 마음의 평화는 생각보다 값진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깻잎 값을 좀 아껴볼까 하는 마음으로 시작했었지만, 생명을 길러냄으로써 얻는 뿌듯함은 내 학업의 성취에서 오는 것과는 또 다른 자극이었다. 바쁜 여름 가운데 학업 이외에도 몰두할 수 있는 다른 일이 있어서 좋았고, 내가 하는 일보다는 결과가 빨리 도출되는 일이라 그 자체에서 위안을 많이 얻었다. 때로 비바람이 몰아치면 텃밭에서 버티고 있는 앙증맞은 새싹들 혹은 멀대같이 커버린 깻잎이 부러지진 않을까 걱정되어 다음날 아침 떠오르는 해를 이마로 받으며 달려 나가기도 했다. 실내에서 발아시킨 모종을 텃밭으로 옮겨 심으면 그렇게 연약할 수가 없다. 실제로 처음 1-3일은 곧 죽을 것처럼 시들어버리는데, 며칠만 지나면 너무 기특하게도 땅에 뿌리를 단단하게 다지고 일어나는 모습을 보여준다. 과연 저 아이들이 살아남을까 걱정을 했던 나에게 보란 듯 자기 몫을 해내는 그 작은 새싹에서 매 여름 잔잔한 위로를 받았다. 나도 여기 잘 버티고 있으니 너도 잘 버텨내서 몇 백배에 달하는 굵은 줄기로 성장할 수 있다고 말을 건네는 것 같았다.
내가 먹을 음식을 직접 길러서 다듬고 식사로 만드는 과정은 생각만큼 어렵지 않았다 (내가 쉬운 작물만 선택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만약 벼나 밀을 재배해야 했으면...). 자급자족의 느낌은 꽤나 보람찬 것이었다. 게다가 나눔의 즐거움도 생각보다 퍽 크게 다가왔다. 내 얼굴만큼 자란 깻잎과 열무 주제에 총각무처럼 자란 애들을 따고 씻으면서, 오늘은 누구와 나눌까, 그 사람 혹은 그 가족에게 한 끼 즐거운 기억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나눔 봉투를 채우는 경험은 이전에 알지 못했던 충만함이었다. 늘 삶이 바빴고, 내가 가진 역량 이상을 해야 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살았기에 누군가와 내가 가진 것을 나눌 여유조차 없었다. 바빴다는 말은 핑계이리라. 나에게 '오늘 하루 수고했다'는 말을 해 줄 여유도 없었던 것은 내 몸이 아니라 내 마음이었을 것이다. 어린 마음에 성공 혹은 실패라는 이분법적으로 삶을 바라보았고, 내가 원하는 결과가 아닌 삶은 모두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었다. 일확천금과 같은 결과, 혹은 남들이 우러러 볼 만한 결과가 아닌 다른 결말을 받아들일 여유가 없었다. 그런 강팍한 마음이었으니 스스로를 따뜻하게 바라볼 의지도 없었고, 내일의 결과를 위해 오늘을 희생하며 사는 것 외에는 방법을 몰랐다. 오늘의 햇빛과 물을 토대로 조금씩 커 나가는 경험, 누구도 알아채지 못하겠지만 나만이 아는 나의 성장, 그리고 굳이 '성장'이 아니라도 내 존재를 지탱하기 위해 들이는 노력, 그리고 그러한 나의 노력을 인정하는 경험이야말로 나를 더 단단하게 세울 수 있음을 몰랐다. 지루할 것 같다는 생각만으로 꺼려했던 식물과의 삶은, 오늘 땅을 뚫고 올라온 새싹을 알아봐주고 따뜻한 환영 인사를 건넬 수 있을 정도로 나를 변화시켰다. 비단 식물에게만 따뜻해졌겠는가. 나와 내 가족이 먹을 음식을 직접 기르고 이를 다듬어 오늘의 식사를 만드는 경험은, 빈말로 '수고했다'라고 스스로에게 말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나를 위하는 일이었고 내 안의 온기를 북돋는 경험이었다.
언젠가 이곳에서 떠나는 날에는 텃밭과도 작별 인사를 해야겠지. 학교에 살면서 매 순간이 감사하고 기억에 남지만 텃밭만큼은 그중에서도 각별한 기억이 될 것 같다.
PS. 지난주에 팔뚝만 한 애호박을 도둑맞았다. 중국 할머니들이 다시 나타난 게 틀림없다 ㅠ